5화
‹ ›임지훈이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 일격이 될 게 분명한 자세였다.
어깨선부터 검 끝까지 일직선으로 뻗은 그 각도가, 딱 봐도 "이번엔 확실하게 끝내겠다"는 선언이었다.
나는 옆구리를 움켜쥔 채 뒤로 물러났지만, 다리가 이미 말을 듣지 않았다.
발목이 후들거리는 게 마치 며칠 굶은 상태로 러닝머신 뛰다가 갑자기 속도 10으로 올린 느낌이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살면서 이런 생각을 진짜로 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평소엔 "야근하다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건 그냥 관용구였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욥기 4:9, 다 하나님의 입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지금 저 사람이 딱 그 콧김 같은 존재였다.
한 번 훅 불면 나 같은 건 그냥 사라질 것 같은.
욥기를 이런 순간에 떠올리는 내 정신머리도 참 대단하다 싶었다.
죽기 직전까지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걸 보면, 확실히 뭔가에 씌인 게 맞나보다.
그런데 손바닥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뜨거워졌다.
마치 손에 뜨거운 감자를 쥔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 한겨울에 핫팩을 손난로 삼아 꽉 쥐었을 때보다 백배는 더 화끈했다.
[조화신공 - 완전 해제]
[영동경 중기 → 영동경 후기]
[전투 특화 모드 활성화]
전투 특화 모드?
지금 이 상황에서 시스템 창이 옵션 선택창처럼 뜨는 게 맞나.
이게 무슨 게임 튜토리얼 끝나고 나오는 "이제 진짜 시작입니다" 메시지도 아니고.
근데 그런 의문을 할 여유가 하나도 없었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누가 내 몸을 조종하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뭔가 내 안에 있던 게 이제야 제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 것 같은 느낌.
임지훈의 검이 떨어지는 그 순간, 내 몸은 이미 그 아래를 벗어나 있었다.
촤아악!
검이 방금 내가 있던 자리를 갈랐다.
땅이 그대로 쪼개졌다.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성인 남자 팔뚝만 한 균열이 생겼다.
저게 조금만 늦었어도 저 균열이 내 몸에 나 있었겠구나 생각하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몸을 낮추고 그대로 임지훈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낫을 쥔 손이 그의 옆구리를 향해 뻗었다.
임지훈의 눈이 커졌다.
방금까지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던 그 눈빛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아까 땅에 생긴 균열이랑 딱 세트로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이게 어떻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낫이 옆구리를 갈랐다.
촤악!
피가 튀었다.
따뜻하고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사람 피는 원래 이런 냄새였나,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냄새인데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이 몸의 전 주인이었던 범인의 기억 어딘가에 저장돼 있던 감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화신경은 화신경이었다.
그가 부상당한 몸으로도 검을 다시 휘둘렀다.
나는 몸을 옆으로 틀어 피했지만, 어깨를 스쳤다.
뜨거운 통증이 어깨에서 목까지 번졌다.
불에 달군 젓가락으로 살을 지지는 느낌이랄까.
근데 이상하게 아까보다 몸이 더 가벼워졌다.
마치 통증이 힘으로 변환되는 느낌이었다.
[조화신공 - 상처 정화 중]
지금 이 순간, 청구슬이 내 상처를 뭔가로 바꾸고 있었다.
고통을 힘으로 바꾸는 연금술 같은 거였다.
현실에서 이런 게 있었다면 헬스 트레이너들이 전부 실업자가 됐을 텐데, 아쉽게도 이건 이 세계 한정 스킬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 힘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낫을 든 손이 어느새 두 배는 빨라진 것 같았다.
임지훈의 검을 흘리고,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발놀림이 저절로 스텝을 밟는 것처럼 가벼워졌다.
누가 보면 격투 게임 콤보를 외운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정작 나는 아무것도 외운 적이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욥기 39:19-20, 네가 말에게 힘을 주었느냐... 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가서 군사를 맞되]
말에게 힘을 준 사람은 나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몸에 힘을 준 게 뭔지는 알 것 같았다.
손바닥에서 뜨겁게 맥동하는 이 청구슬, 이게 지금 내 안에서 발굽질을 하고 있는 그 말이었다.
임지훈이 뒤로 물러나며 다시 검을 세웠다.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당황이 스쳤다.
방금까지 나를 벌레 보듯 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걸 보니, 묘하게 속이 후련해졌다.
이런 감정을 느끼면 안 될 것 같은데, 사람 마음이 그렇게 이성적이지가 않았다.
"범인 따위가 이런 힘을..."
"범인이라서 무시했다면, 그건 당신 실수입니다."
나는 말을 뱉으며 다시 파고들었다.
낫이 그의 검을 걸어 흘려버렸고, 그 틈에 팔이 그대로 그의 가슴을 노렸다.
임지훈이 검을 놓치고 손으로 붉은 기운을 뿜었다.
나는 몸을 비틀어 피했다.
기운이 옆으로 지나가며 바위 하나를 그대로 갈랐다.
쩌억!
바위가 두부처럼 쪽 갈라지는 걸 보고 잠깐 정신이 나갈 뻔했다.
저게 나한테 맞았으면 나는 지금 두부보다 더 볼품없는 상태가 됐을 거다.
생각만 해도 오한이 돌았다.
그 순간 그의 자세가 무너졌다.
부상당한 옆구리가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아까 내가 낫으로 그은 상처가 이제야 제대로 값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낫을 두 손으로 쥐고 그대로 그의 목을 향해 내리쳤다.
임지훈이 마지막 힘을 다해 검을 세워 막았다.
하지만 그의 검은 이미 옆구리 상처 때문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막아내는 각도부터가 아까와는 완전히 달랐다.
방금까지 나를 압도했던 그 검이, 지금은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촤아아아악!
낫이 검을 그대로 부수고, 그의 어깨를 갈랐다.
임지훈이 뒤로 넘어졌다.
피가 뿜어져 나왔다.
붉은 피가 야산의 흙을 시커멓게 적셔갔다.
그의 눈이 나를 올려다봤다.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뒤섞여 있었다.
저 표정 하나만 봐도, 이 사람이 살면서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다는 게 느껴졌다.
대가문의 공자라는 게, 평생 이런 눈으로 누군가를 올려다볼 일이 없이 살았다는 뜻이겠지.
"네놈... 정체가 뭐냐."
"범인입니다."
나는 다시 한 번 낫을 들었다.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손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제까지는요."
임지훈이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낫이 이미 그의 목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신명기 32:39,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지금 이 순간 죽이는 쪽은 나였다.
살리는 쪽이 되는 건 이번 생에는 못 할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살리는 쪽이 되고 싶다는 생각조차 지금은 사치였다.
촤악!
낫이 목을 가르는 순간, 임지훈의 눈에서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야산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숨소리도, 바람 소리도, 아무것도 없는 완전한 정적.
방금까지 검과 낫이 부딪히던 그 소란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방이 조용했다.
매미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매미들도 방금 벌어진 일에 놀라서 다들 숨을 참고 있는 건가 싶었다.
나는 낫을 든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이 떨렸다.
방금 내가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대가문의 공자를.
머릿속으로 그 사실이 뒤늦게 스며들었다.
사람을 죽였다.
살면서 벌레 한 마리 잡는 것도 손이 떨리던 내가, 방금 사람의 목을 그었다.
이 몸이 원래 살아온 세월 덕분인지, 아니면 그냥 지금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감각이 마비된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게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이 순간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대가문의 공자를 죽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머리로는 알 것 같은데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회사에서 사고를 쳐놓고 아직 상사한테 보고하기 전, 딱 그 애매한 정적의 순간 같았다.
다만 이번엔 그 상사가 대가문 전체라는 게 문제였다.
[영동경 후기]
[조화신공 - 안정화]
시스템 창은 태연하게 내 상태를 알려왔다.
마치 방금 있었던 일이 그저 레벨업 이벤트였다는 것처럼.
사람 하나 죽여놓고 이렇게 태연하게 스탯 정리를 해주는 걸 보면, 이 시스템은 진짜 인간의 감정 같은 걸 하나도 고려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게임 시스템한테 감정을 바라는 게 애초에 잘못이지.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렸다.
손바닥 안의 청구슬이 조용히 맥동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뜨겁게 타올랐던 게, 지금은 잠든 아기처럼 조용히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러 명.
말투가 하나같이 다급했다.
"공자님! 도련님!"
임가의 사람들이 오는 소리였다.
발소리가 여러 갈래로 겹쳐 들려왔다.
말발굽 소리까지 섞여 있는 걸 보니, 적어도 열 명은 넘게 오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두 시체와 함께, 완전히 노출된 채로 서 있었다.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몸을 숨길 만한 바위나 나무는 저 멀리뿐이었고, 지금 내 다리로는 그곳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 진짜 문제가 시작될 거라는 걸, 나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