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달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져 내렸고, 내 몸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조차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마치 이어폰 노이즈캔슬링을 끄고 다시 켠 것처럼, 세상이 갑자기 고해상도로 바뀐 느낌이었다.
갈비뼈가 부러졌던 그 자리를 만져봤다.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게 아니라 아예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매끈했다.
그럴 리가.
갈비뼈가 하룻밤 사이에 붙었다고?
뭐지, 이 몸은?
병원 응급실이었으면 의사가 CT 다시 찍자고 난리 쳤을 상황이다.
근데 여긴 병원이 아니라 야산 한복판이고, 내 옆에는 의사 대신 죽은 우두야수 사체만 널브러져 있었다.
진단서 대신 뿔 값이나 계산해야 하는 처지였다.
일단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넘쳤다.
전생에 훈련받던 시절, 몸이 최고조로 컨디션이 좋을 때의 느낌이 딱 이랬다.
아니, 이보다 훨씬 나았다.
그때는 훈련소 조교가 옆에서 소리 질러야 겨우 끌어냈던 힘인데, 지금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저절로 끓어올랐다.
손바닥을 펴봤다.
청구슬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다만 색이 더 짙어졌고, 뭔가 살아 숨쉬는 것처럼 미세하게 진동했다.
꼭 휴대폰 진동 모드로 해놓은 것처럼, 손바닥 한가운데서 부르르 떨렸다.
[영동경 중기]
중기라니.
어제까지 영력 자체가 없던 범인이 하룻밤 사이에 영동경 중기라니.
이건 로또를 두 번 연속 맞은 거보다 더 미친 일이었다.
아니, 로또 2연속 당첨보다는 차라리 벼락 두 번 맞고 살아남는 쪽이 더 그럴듯한 확률이었다.
[시편 90: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난 밤과도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을 뿐임이니이다]
그래, 하룻밤이 천년 같았다는 뜻이겠지.
근데 성경 인용이 이렇게 편할 때도 있구나.
목사님들이 괜히 아무 데나 성구 갖다 붙이는 게 아니었다.
나는 죽은 우두야수 사체를 다시 살폈다.
가까이서 보니 몸통은 이미 절반쯤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영핵이 빠져나간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삭아가는 모양이었다.
이러다 아침 되면 그냥 흙더미로 변해버릴 것 같아서, 서둘러 챙길 건 챙겨야 했다.
뿔은 통째로 뽑아 챙기기로 했다.
상단에 팔면 값이 꽤 나갈 것이다.
영핵도 이미 흡수됐으니 사체는 껍데기뿐이지만, 그래도 뿔이랑 가죽은 돈이 된다.
뿔을 뽑는데 생각보다 힘이 하나도 안 들어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어제까지의 나였으면 손목이 나갔을 일이었다.
짐을 다 챙기고 나서, 뭔가 확인하고 싶어졌다.
이 힘의 근원이 뭔지.
청구슬이 대체 어디서 온 건지 알아야 다음 행동을 정할 수 있었다.
전생 특전사 시절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서, 정보 없이 움직이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정찰 없이 진입했다가 팀 전체가 위험해지는 걸 몇 번이나 봤는지, 그 기억이 아직도 등에 딱지처럼 남아 있었다.
야산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오래된 동굴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청호진 사람들은 그곳을 '핏바위 굴'이라 불렀다.
이름부터 불길했지만, 뭔가 힌트가 있을 것 같았다.
동네 어르신들이 애들 겁줄 때 써먹는 이름치고는 너무 구체적이라, 오히려 뭔가 진짜가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조심스레 굴 근처로 다가갔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피 냄새.
그리고 뭔가 낮게 울리는 숨소리.
그르르르...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덤불 뒤로 몸을 낮췄다.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 두 개가 나를 향해 켜졌다.
크다.
호랑이보다 훨씬 크고, 온몸이 핏빛 무늬로 덮인 거대한 짐승이었다.
근육 하나하나가 갑옷처럼 두툼했고, 숨을 내쉴 때마다 옆구리가 파도처럼 일었다.
혈문호.
청호진에서 가장 위험한 영수 중 하나라고 들었다.
술자리에서 사냥꾼들이 혈문호 얘기 나오면 목소리부터 낮추던 게 생각났다.
놈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둥지 때문이었다.
안쪽에 알이 있는 게 보였다.
크기가 성인 머리통만 한 게 두어 개, 은은한 붉은 빛을 내며 굴 안쪽 바위틈에 놓여 있었다.
어미가 새끼를 지키는 중이었다.
나는 그때 완전히 잘못 판단했다.
놈이 나를 향해 몸을 낮추는 걸 보고, 공격 자세라고 생각했다.
실은 경계 자세에 불과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때는 그런 미묘한 차이를 읽을 눈치가 없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게 나를 씹어먹을 수 있는 크기라는 사실만으로 판단이 끝나버렸다.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
어제 우두야수를 잡고 얻은 새 힘을 시험해볼 기회이기도 했다.
낫을 다시 고쳐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는 게 느껴졌는데, 이상하게 그 와중에도 심장은 차분했다.
이것도 청구슬 덕인지, 아니면 진짜 죽음 앞에 무뎌진 건지 헷갈렸다.
그르릉!
놈이 낮게 포효하며 몸을 일으켰다.
피할 곳이 없었다.
등 뒤는 바위벽, 앞은 혈문호.
좌우로는 가시덤불이 촘촘히 얽혀 있어서, 도망칠 구석이라곤 하늘로 솟든가 땅으로 파고들든가 둘 중 하나뿐이었다.
둘 다 지금 나한테 가능한 옵션은 아니었다.
[욥기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겠느냐]
못 낚는다는 건 나도 안다.
근데 지금은 낚느냐 낚이느냐, 둘 중 하나만 있는 상황이었다.
질문 자체가 사치였다.
놈이 앞발을 휘둘렀다.
쐐애액!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어제까지는 상상도 못 할 반사속도였다.
앞발이 코앞을 스쳐 지나가는 동안 나는 이미 옆으로 굴러 있었다.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뒤통수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 순간에도 머릿속 한 구석에서는 "와, 이거 진짜 죽었으면 목이 그대로 날아갔겠다"는 생각이 태연하게 떠올랐다.
사람이 죽음 직전에 이렇게 딴생각이 많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이게 영동경 중기의 힘인가.
몸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전생 특전사 시절보다도 반응이 빨랐다.
그때는 몸이 머리를 따라가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몸이 먼저 움직이고 머리가 뒤늦게 따라붙는 느낌이었다.
순서가 완전히 뒤바뀐 셈이었다.
놈이 다시 몸을 돌렸다.
이번엔 정면으로 나를 노려봤다.
붉은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번쩍였고, 그 눈빛 안에는 분명한 살기 대신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는데, 나는 그걸 읽어낼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뒤쪽 덤불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봐, 혈문호 둥지 아니냐?"
젊은 남자 목소리였다.
말투가 딱 봐도 귀하게 자란 도련님 톤이었다.
목소리에 긴장감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신난 기색이 역력했다.
"형, 저거 잡으면 우리 가문 위상 좀 올라가지 않겠어?"
또 다른 목소리.
더 젊고 들뜬 목소리였다.
동생 쪽인 모양인데, 목소리만 들어도 아직 실전 경험이 별로 없는 게 티가 났다.
나는 그 순간 완전히 얼어붙었다.
혈문호 하나 상대하는 것도 살 떨리는데, 이제 사람까지 더 끼어드는 상황이었다.
이거 완전히 던전 파티에 무단으로 껴든 트롤 짓 아니냐.
근데 트롤이 나인지 저 목소리들인지, 그것부터 헷갈렸다.
아니, 어쩌면 혈문호가 진짜 트롤이고 우리 셋이 다 파티원인데 서로를 몰라보는 상황일 수도 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상황은 점점 더 개판으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덤불이 갈라지며 두 남자가 걸어 나왔다.
한 명은 스물 초중반쯤, 다른 한 명은 그보다 몇 살 어려 보였다.
둘 다 화려한 옷차림에, 허리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검을 차고 있었다.
검 손잡이에 새겨진 문양만 봐도 대충 어느 가문 소속인지 짐작이 갔다.
한눈에 봐도 돈 냄새가 진했다.
옷 한 벌 값이 아마 내가 평생 벌어야 할 돈보다 많을 것 같았다.
형이라 불린 남자가 나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넌 뭐야? 이 근처에 범인이 왜 있어."
말투에 경멸이 섞여 있었다.
딱 봐도 나 같은 놈은 발밑에 벌레 정도로 보는 눈빛이었다.
발밑의 벌레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무시당하진 않을 것 같은데, 뭐 아무튼 그랬다.
"운이 없어서요."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건 혈문호가 아니라 이 두 남자일 수도 있었다.
사람이 짐승보다 더 예측 불가능하다는 건 전생에서부터 뼈저리게 느낀 진리였다.
형이라는 남자의 눈이 손에 든 낫을 봤다가, 다시 나를 봤다.
뭔가 재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값을 매기는 감정사처럼, 위아래로 나를 훑는 시선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넌 여기서 죽고 싶은 거냐, 아니면 재수가 없는 거냐."
그르르릉...
혈문호가 다시 낮게 울렸다.
놈의 시선이 이제 나뿐만 아니라 새로 나타난 두 남자에게도 향해 있었다.
동공이 세 방향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게, 마치 누구부터 처리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분위기가 완전히 이상하게 꼬여가고 있었다.
나는 이때까지도, 이게 얼마나 큰 소용돌이의 시작인지 전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