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복도는 무너진 벽 조각과 뒤엉킨 마법 잔해로 가득했다.
발밑에서 유리 파편이 부서졌다.
서걱.
이서린은 그 소리에 어깨를 움찔했다. 학원장이 앞장서 뒤쪽 통로로 향했다. 도연과 채린이 그 뒤를 따랐다. 벽에 걸린 액자들이 반쪼가리로 갈라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한때 학생들의 마법 시연 사진이 담겼던 액자였다.
등 뒤에서 윤태석이었던 것의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느긋했다. 그 여유가 소름을 돋게 했다.
이서린의 손끝이 저절로 떨려왔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듯 뛰었다. 뒤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다리가 그대로 굳어버릴 것 같았다.
"이쪽으로."
학원장이 옆 통로로 방향을 틀었다. 좁은 계단이 아래로 이어졌다. 계단 폭이 어깨 하나 겨우 지나갈 만큼 좁았다. 벽을 짚은 손바닥에 습기가 배어들었다.
내려가자 낡은 창고가 나타났다.
곰팡내가 코를 찔렀다. 젖은 벽지가 손끝에 닿았다. 축축한 감촉이 소름처럼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천장 어딘가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톡. 톡.
"여기서 잠시 숨을 돌려."
학원장이 문을 닫으며 말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쿵.
그리고 곧바로 방 한쪽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와 벽 표면에 스며들었다. 빛이 벽을 타고 실핏줄처럼 퍼져나갔다.
위이이잉.
"임시 은신막이야. 오래 못 버텨."
학원장의 목소리에 지친 기색이 섞여 있었다. 이마에 맺힌 땀이 관자놀이를 따라 흘렀다.
채린이 안경을 고쳐 쓰며 벽에 등을 기댔다. 숨을 몰아쉬느라 어깨가 들썩였다. 도연은 여전히 그녀를 경계하듯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시선을 채린의 손끝에서 떼지 않았다.
이서린은 창고 구석에 쌓인 상자들을 훑어보았다. 오래된 마법 도구, 부서진 지팡이, 먼지가 뽀얗게 쌓인 서적들. 상자 옆면에 적힌 글씨는 이미 반쪽이 지워져 알아볼 수 없었다. 그 사이로 희미한 한기가 느껴졌다.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뭔가 있어.'
그녀의 시선이 창고 안쪽 어둠으로 향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야, 서린."
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공기가 순간 무거워졌다. 도연이 즉시 몸을 돌려 그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흑문이 손등에 떠올랐다. 검은 문양이 손등을 타고 빠르게 번져나갔다.
"누구야!"
도연의 목소리가 창고 안에 메아리쳤다. 채린이 벽에서 등을 떼며 자세를 낮췄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발소리가 거의 없었다. 마치 바닥 위를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회색 금발의 긴 머리가 검은 리본으로 땋여 있었다. 검은 실크 파자마를 입은, 성별을 가늠하기 어려운 이가 서 있었다. 서릿빛 은색 눈동자가 이서린을 향해 정확히 초점을 맞췄다.
이서린의 숨이 멈췄다.
목구멍이 좁아졌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설유겸.'
3년 전, 어느 밤이었다. 인간도 흡혈귀도 죽음술사도 아닌 그 존재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녀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날 밤의 공기, 그날 밤의 냄새까지 갑자기 되살아났다. 그날 이후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어떻게 여기…"
이서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설유겸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걸음걸이에 소리가 거의 없었다. 파자마 자락이 발목을 스치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학원이 이렇게 될 걸 알았거든."
담담한 대답이었다. 마치 오늘 날씨를 이야기하듯.
도연이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흑문이 떠오른 손을 여전히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뭔 소리야, 그게."
"세 신성이 동시에 봉인에서 풀렸어. 이 정도 사건은, 감지할 수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알아챌 수 있어."
설유겸의 시선이 채린을 향했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해모의 딸."
채린의 얼굴이 굳었다. 안경 너머로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신 뭐예요."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밑에 깔린 불안을 숨기지 못했다.
"중요한 건 아니야."
설유겸이 다시 이서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이 마치 그녀의 안쪽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지금 그쪽에게 필요한 건 나야."
학원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살폈다. 손끝에 아직 은신막의 빛이 남아 있었다.
"넌 학원 학생 명단에 없어."
"당연하지."
설유겸이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그 동작조차 소리가 없었다.
"나는 이 학원 소속도 아니고, 인간도 흡혈귀도 아니야. 그냥, 필요할 때 나타나는 존재라고 해두지."
이서린의 가슴속에서 오래된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왜 내 이름을 알았어.'
3년 동안 묻지 못했던 말이었다. 지금도 물을 여유가 없었다. 창고 밖 어딘가에서 무너진 벽이 다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서린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은 멀었다.
"협력하겠다는 거야?"
도연이 경계를 풀지 않고 물었다. 손등의 흑문이 여전히 옅게 빛났다.
"윤태석을 정면으로 상대하는 건 불가능해. 셋이 동시에 봉인에서 풀렸으니까."
설유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데 억압당한 해모가 딸에게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어."
설유겸이 채린을 가리켰다. 손끝이 정확히 채린의 심장 부근을 짚었다.
"그 신호가 약점이야. 억지로 셋을 동시에 상대할 필요 없어. 억압당한 쪽을 이용하면 돼."
채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제 어머니를… 이용하겠다는 거예요?"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이용이 아니야. 구하는 거지."
설유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감정이라곤 한 톤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였다.
"단, 조건이 하나 있어."
이서린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손끝이 저절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뭔데."
설유겸이 미소 지었다. 서릿빛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그 미소에는 온기가 없었다.
"오늘 이 일이 끝나도, 넌 나한테 대답 하나를 빚지게 될 거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톡. 톡.
도연이 이서린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놈이야."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이서린의 귓가에 그 숨결이 그대로 와닿았다.
이서린도 알았다. 3년 전 갑작스럽게 나타나 사라진 존재. 지금 다시 나타나 조건을 거는 존재. 신뢰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서릿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으면,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도 함께 알아버렸다.
가슴이 답답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도 산소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선택이 아니야.'
그녀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냥 남은 게 이것뿐이야.'
하지만 창고 밖, 무너진 벽 틈으로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느긋한 그 발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소리로 바뀌었다. 나무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하나씩 뚜렷해졌다.
끼익.
끼이익.
이서린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학원장의 손끝에서 은신막의 빛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막이 약해지고 있어."
학원장이 낮게 말했다. 목소리에 긴장이 섞여 있었다.
발소리가 이제는 창고 문 바로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숨소리조차 죄스러웠다.
선택의 시간이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