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씨 백작가의 상속녀, 이서윤.
스무 살.
검은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흘러내렸고, 눈동자는 짙은 갈색이었다.
웃을 때는 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사교계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불렀다. 얌전한 아가씨. 순종적인 예비 후작 부인.
다만 그 평가는 절반만 맞았다.
이 세계에는 '각성'이라 불리는 힘이 있었다.
귀족 혈통 중 극히 일부에게서 태어나는 특수한 자질이었다.
그리고 그 힘은 대개 감정과 얽혀 있었다.
분노가 크면 클수록, 슬픔이 깊으면 깊을수록 힘도 함께 끓어올랐다.
그래서 각성자들은 어릴 때부터 감정을 죽이는 법을 배웠다.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주변의 무언가가 반응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각성자였다.
다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저택 안에서도 손에 꼽았다.
각성자로 태어난 게 알려지면 어떻게 되는지, 나는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권력에 이용당하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래서 부모님은 내게 표정을 다스리는 법부터 가르쳤다.
웃을 때도 일정하게, 화가 나도 일정하게.
'덕분에 지금은 이 정도는 괜찮은데.'
문제는 오늘처럼 예상 못 한 순간에 훅 치고 들어오는 감정이었다.
"서윤 아가씨, 차가 식겠어요."
하녀의 목소리에 나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다과회 자리였다. 강씨 후작가에서 초대한 소규모 모임.
창가 자리라 햇살이 테이블 위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김이 그 햇살 사이로 흩어졌다.
건너편에는 내 혼약자, 강태오가 앉아 있었다.
강태오는 잘생긴 남자였다.
금발에 가까운 밝은 갈색 머리, 큰 키, 나른한 미소.
문제는 그 미소가 나에게만 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태오 도련님, 요즘 청화호텔에 자주 드나드신다고요."
옆자리의 백작 영애가 웃으며 물었다.
"거긴 다들 가는 곳이잖습니까."
태오가 능청스럽게 답했다.
그 대답에 다과회 안에서 잠깐 웃음이 돌았다.
"하긴, 거기 말고 갈 데도 마땅치 않죠."
다른 자작 부인이 거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웃음 속에 숨은 시선들을 놓치지 않았다.
곁눈질. 입가에 걸린 의미심장한 웃음.
내 쪽을 슬쩍 살피는 눈빛들.
다들 뭔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또 저 소문이구나.'
조하은.
조씨 남작가의 딸.
하급 귀족 출신이라 사교계 정식 모임에는 자주 나오지 못하는 여자였다.
그녀와 강태오 사이의 소문은 벌써 반년째 사교계 뒷골목을 떠돌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반년이 지나도록 사그라들지 않는 걸 보면, 아예 근거 없는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살짝 저릿했다.
찻잔 표면에 실금 하나가 갔다.
아주 미세해서, 나 말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또 이러네.'
감정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이렇게 표시가 났다.
유리가 갈라지거나, 촛불이 흔들리거나, 금속이 미세하게 울렸다.
나는 열 살 무렵부터 이 감각을 숨기는 훈련을 받았다.
숨을 천천히 내쉬고, 손끝의 힘을 빼고, 다른 생각으로 관심을 돌리는 식이었다.
덕분에 지금은 웬만한 자극에는 티가 나지 않았다.
다만 오늘은 조금 더 예민했다.
이유는 나도 잘 몰랐다. 그냥, 오늘따라 저 미소가 더 거슬렸을 뿐이었다.
다과회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화제는 자꾸만 청화호텔 쪽으로 흘렀다.
누가 거기서 뭘 봤다더라, 누구랑 있는 걸 봤다더라.
직접적으로 내 이름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대화가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나는 그 화제가 지나갈 때마다 찻잔을 조금씩 기울였다 세웠다.
그렇게라도 손끝의 감각을 다스려야 했다.
다과회가 끝나갈 무렵, 태오가 내게 다가왔다.
"서윤 양, 다음 주에 시간 괜찮으세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런 순간에도 저 목소리는 참 다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요."
나는 웃으며 답했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음 주엔 또 어디를 갈 생각인지.'
태오는 내 대답에 만족한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손님들 쪽으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애써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거리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노점상, 마차, 걸어가는 사람들. 평범한 오후의 풍경이었다.
손끝에는 여전히 저릿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이 정도로 흔들리면 안 되는데.'
나는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저택에 도착하자 집사 백도현이 마중을 나왔다.
백도현은 스물다섯의 남자였다.
허나 그 외모는 흔히 보기 힘든 종류였다.
긴 은발, 흰 피부, 가늘고 여린 손목.
처음 보는 사람들은 열에 아홉 그를 여성으로 착각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적부터 저택에서 일해온 사람이라, 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내 각성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아가씨,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괜찮아."
나는 짧게 답하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백도현은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며 겉옷을 받아 들었다.
그날 밤, 나는 서재에서 홀로 앉아 있었다.
창밖은 이미 어두웠다.
책상 위에는 읽다 만 서류 몇 장이 놓여 있었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촛불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통하는 것도 아닌데, 저 혼자 일렁이는 불꽃을 보며 나는 손끝을 매만졌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백도현이었다.
그의 손에는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그는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이게 뭐지?"
"청화호텔 쪽 지인에게서 받은 겁니다."
백도현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늘 침착하던 얼굴에 미묘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나는 봉투를 받아 열었다.
안에는 작은 수정 조각 하나가 들어 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 은은한 푸른빛을 띠는 물건이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서늘했다.
'이건, 기억석……?'
귀족 사회에서만 은밀히 유통되는 물건이었다.
특정한 순간의 기억을 담아, 원하는 사람에게 재생해줄 수 있는 물건.
비싸고, 위법 거래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이런 물건이 왜 내 손에 들어왔는지,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안에 뭐가 담겼는데?"
나는 물었다.
목소리가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질 만큼 차분하게 나왔다.
백도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침묵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태오 도련님과, 조하은 양의 모습입니다."
순간, 방 안의 촛불이 확 커졌다가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