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주말이 되었다.
나는 저택 안, 잘 쓰지 않는 별채의 방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먼지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방이었다.
평소에는 손님용으로도 잘 쓰이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방.
이런 일을 준비하기엔 딱 알맞은 곳이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옷차림이었다.
짙은 남색 드레스, 얼굴을 반쯤 가리는 베일.
머리는 낮게 틀어 올려 평소와 다른 인상을 주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었다.
'이게 나라고?'
평소의 나와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조신하고 얌전한, 어딘가 사연 있어 보이는 귀부인.
백도현이 며칠 전부터 공들여 준비한 이미지였다.
"이름은 뭘로 할까요?"
백도현이 물었다.
거울을 통해 내 뒷모습을 살피며, 드레스의 매무새를 마지막으로 손보고 있었다.
"이서화."
나는 답했다.
비슷하지만 다른 이름이었다.
혹시라도 실수로 본명이 튀어나와도 티가 덜 나도록, 일부러 비슷한 발음을 골랐다.
"좋네요. 입에도 잘 붙고."
백도현이 옅게 웃었다.
그 웃음에 나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청화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주변의 시선이 온몸에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침착해.'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너는 지금 이서화야. 백작가의 영애가 아니라.'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호텔 내부는 화려했다.
대리석 바닥, 높은 천장, 크리스탈 샹들리에.
곳곳에서 나지막한 대화 소리와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바이올린 선율이 낮게 깔리고, 그 위로 잔잔한 웃음소리들이 섞여 들었다.
향수 냄새와 술 냄새, 그리고 은밀함이 뒤섞인 공기였다.
이런 곳에서 얼마나 많은 비밀들이 오가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백도현, 아니 백하윤은 이미 이곳의 수용인으로 며칠간 일하고 있었다.
수용인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호텔의 안내인.
손님을 각 층과 방으로 안내하고, 필요한 것을 챙겨주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은밀한 공간의 구조를 낱낱이 파악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이기도 했다.
그가 눈짓으로 나를 3층으로 안내했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3층 복도는 조용했다.
두꺼운 카펫이 발소리를 삼켰다.
벽에 걸린 그림들도, 문마다 달린 놋쇠 장식도 모두 소리 없이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저 문입니다."
백도현이 속삭였다.
한 개인실 문을 가리켰다.
문에는 아무 표식도 없었다.
그저 매끈한 나무 문 하나뿐.
하지만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옆방으로 들어가, 벽에 붙은 얇은 관을 통해 옆방 소리를 엿들을 수 있었다.
이 역시 청화호텔의 은밀한 설비 중 하나였다.
말하자면 이곳은, 비밀을 지켜주는 동시에 그 비밀을 팔아치우는 곳이었다.
돈만 있다면 무엇이든 감출 수 있고, 돈만 있다면 무엇이든 캐낼 수 있는.
나는 그 아이러니를 지금 이용하고 있는 셈이었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오, 언제까지 이렇게 만나야 해?"
조하은의 목소리였다.
살짝 지친 듯한, 그러면서도 어딘가 달콤한 어조.
"결혼 전까지만."
태오가 웃으며 답했다.
"결혼하고 나면 더 편하게 만날 수 있어."
나는 관에 귀를 바짝 붙였다.
숨소리조차 죽였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손끝이 점점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말뿐인 증거는 나중에 얼마든지 발뺌할 수 있으니까.
그 순간,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무겁고 규칙적인, 순찰하는 듯한 걸음걸이였다.
나는 급히 몸을 낮췄다.
숨을 죽이고 벽에 바짝 붙었다.
문이 열리고, 낯선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키가 크고, 험상궂은 인상이었다.
각진 턱, 짧게 깎은 머리, 그리고 몸에 밴 듯한 위압감.
청화호텔의 경비, 그것도 뒷골목 출신처럼 보이는 자였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남자가 낮게 물었다.
낮은 목소리에도 위협이 실려 있었다.
'들켰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차, 찾는 방이 있어서요."
나는 태연한 척 말했다.
목소리는 최대한 낮고 부드럽게 유지했다.
떨림을 감추려 애썼지만, 손끝은 이미 차갑게 굳어 있었다.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심의 빛이 역력했다.
"이쪽은 개인실 전용 구역입니다. 초대장을 보여주십시오."
초대장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이곳은 그런 걸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어떡하지.'
순간 손끝이 저릿해졌다.
벽에 걸린 램프의 불빛이 흔들렸다.
지지직, 하는 미세한 소리와 함께 불빛이 두어 번 깜빡였다.
'안 돼. 여기서 힘을 쓰면 다 끝장이야.'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감정을 눌렀다.
손끝에 몰리던 힘을, 억지로라도 도로 삼켰다.
"제가 초대장을 두고 온 것 같아요."
나는 최대한 당황한 척, 하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수용인분께 확인해 주시겠어요?"
남자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위아래로 훑는 그 시선이, 마치 내 거짓말을 낱낱이 파헤치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뒤쪽에서 백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여기 계셨네요, 손님."
백하윤의 모습을 한 백도현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걸음걸이 하나, 표정 하나 흐트러짐 없이.
"제가 안내를 잘못했나 봐요. 죄송합니다."
그는 경비 남자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분은 2층 개인실 예약 손님이세요. 제가 층을 착각해서 안내드렸어요."
능청스러울 정도로 태연한 말투였다.
남자는 잠시 우리 둘을 번갈아 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부터 조심하십시오."
그가 자리를 뜨자, 나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벽을 짚었다.
"괜찮으세요?"
백도현이 작게 물었다.
걱정이 어린 눈빛이었다.
"응."
나는 짧게 답했다.
하지만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조금만 더 지체했다면, 조금만 더 힘을 참지 못했다면.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우리는 서둘러 그 층을 벗어났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1층 로비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나는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직접 잠입은 위험해. 하지만 오늘 확실히 알았어.'
조하은과 태오의 관계는 소문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태오는 결혼 이후에도 관계를 이어갈 생각이었다.
이건 단순한 젊은 날의 실수가 아니었다.
애초에 관계를 정리할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이 확인되자,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로비를 가로지르던 그때, 낯익은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강태오였다.
조하은과의 밀회를 끝내고, 이제 막 다른 개인실에서 나오는 참이었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나오는 그 모습이, 평소 저택에서 보던 얼굴과 겹쳐 보였다.
나는 급히 베일을 고쳐 썼다.
숨을 죽이고, 걸음을 늦추지 않으려 애썼다.
다행히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지나쳐 갔다.
옆을 스쳐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이, 마치 몇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다만 그 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체격이 좋고, 눈빛이 날카로운 남자였다.
걸음걸이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풍겼다.
"저 사람은 누구지?"
나는 백도현에게 조용히 물었다.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백도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평소의 여유로운 표정이 조금 사라져 있었다.
"청화호텔의 관리인입니다. 그리고……"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사교계 소문을 다루는 정보상으로도 유명한 자입니다."
나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미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등을, 눈으로 좇았다.
'저 사람이, 오늘 우리를 봤을까.'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만약 저자가 우리의 얼굴을, 아니 조금이라도 낌새를 눈치챘다면.
오늘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호텔 밖으로 나서는 발걸음이, 어쩐지 아까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