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 불륜, 증거로 갚아줄게

2화

촛불이 꺼진 방 안, 나는 어둠 속에서 기억석을 손에 쥔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방 안은 고요했다. 창밖에서 스며드는 달빛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그마저도 구름에 가려 흐릿했다. "불을 밝힐까요?" 백도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나는 짧게 답했다. 그의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손안의 기억석이 서서히 빛을 내기 시작했다.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 그 안에서부터 온기 하나 없는 빛이 새어 나왔다. 푸른빛이 허공에 상을 그려냈다. 방 안, 침대 위. 강태오가 웃고 있었다. 그 옆에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조하은이었다. 금발을 늘어뜨린 채, 태오의 팔에 기대어 있었다. 익숙한 웃음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언젠가 무도회에서 들었던 그 웃음소리였다. "태오, 정말 서윤 아가씨랑 결혼할 거야?" 조하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태오가 웃으며 답했다. "결혼하고 나서도 자주 볼 수 있잖아." 조하은이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다시 웃었다. 태오의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익숙한 손짓이었다.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라는 걸, 그 손짓 하나로 알 수 있었다.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짧았다. 하지만 충분했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 안의 창문이 흔들렸다. 달칵, 달칵. 바람 한 점 없는데도 유리창이 진동했다. '화가 안 나.' 나는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놀랍지도 않아. 소문은 벌써 반년째였잖아.' 그런데도 손끝이 떨렸다. 심장이 이상하게 조용히, 그리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분노라기보단 허탈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런데 몸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찻잔이 아니라 이번엔 책상 위 유리 문진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아가씨." 백도현이 다급히 다가왔다. "진정하세요. 방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재의 창문 하나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다. 밤바람이 훅 밀려들었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쉬었다. 감정을 억누르는 법은 열 살 때부터 배운 것이었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며 호흡을 골랐다. 넷, 다섯. 방 안의 진동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갈라졌던 문진의 균열이 더 이상 번지지 않았다. "죄송해요." 나는 백도현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그가 조용히 유리 조각을 치우기 시작했다.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낮게 울렸다. 나는 기억석을 다시 손안에 쥐었다. 차가운 감촉이 조금 전보다 더 낯설게 느껴졌다. '이걸 아버지께 보여드려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럼에도 나는 그 생각을 애써 밀어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서재 대신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평소보다 걸음이 느렸던 걸까, 아니면 마음이 무거워 그렇게 느껴졌을 뿐일까. 이광호 백작은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였다. "아버지." 나는 문을 닫고 들어갔다. "드릴 게 있어요." 그제야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서류 위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언제나처럼 무심했다. 나는 기억석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버지의 눈이 그것을 향했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는 기억석을 손에 들지도 않았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이게 뭔지 알고 있다." 아버지가 낮게 말했다. ……뭐?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알고 계셨다고요?" "강태오와 조하은 남작 영애 사이의 일은, 이미 반년 전부터 소문으로 돌던 것이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확인도 이미 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 안쪽이 바짝 말라붙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저한테 말씀 안 하셨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왜 지금까지 침묵하셨냐고요." 아버지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펜을 내려놓는 손짓이 지나치게 침착했다. "강씨 후작가와의 혼약은, 우리 가문에 중요한 사안이다. 이런 일로 혼약이 깨지면 곤란해." 방 안의 창문이 다시 흔들렸다. 이번엔 달칵거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유리 전체가 미세하게 웅웅거리며 떨렸다. "곤란하다는 게, 제 인생보다 중요하다는 뜻이신가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책상 위 잉크병이 살짝 흔들리다 멈췄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분한 눈으로. 나는 기억석을 다시 손에 쥐고 집무실을 나왔다. 문을 닫는 손이 평소보다 세게 힘이 들어갔다. 복도를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도, 강씨 가문도, 아무도 나를 위해 움직이지 않아.' 당연한 걸 이제야 확인한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그럼 내가 움직여야지.' 그 생각이 들자,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았다. 누군가 대신 해주길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나은 기분이었다. 저녁, 나는 백도현을 다시 불렀다. 그는 언제나처럼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백도현." "예, 아가씨." "강태오의 부정을 사교계 전체가 알게 만들 거야." 백도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침묵이 흘렀다. "그건 위험한 일입니다. 강씨 후작가는……" "알아."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러니까 조용히, 완벽하게 준비해야 해." 그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리려는 듯도 했고, 이미 말릴 수 없다는 걸 아는 듯도 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방법은 이제부터 생각할 거야." 나는 담담히 답했다. "하지만 반드시 할 거야." 창밖으로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방 안의 공기가 조금 전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결심했다. 혼자서라도, 이 일을 끝내겠다고.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 몰래 무언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내 인생을 얼마나 뒤흔들지, 그때의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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