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잔월에 잠든 백 년의 검

3화

어둠뿐이었다. 강도진의 의식은 끝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발밑도, 손끝도 느껴지지 않는 캄캄한 심연이었다. 마치 세상 전체가 물속에 잠긴 듯, 소리도 빛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다 문득, 발밑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느껴졌다.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었다. 눈을 뜨자 그가 서 있는 곳은 옥사도, 대전도 아니었다. 온통 검푸른 안개가 자욱한 공간이었다. 발밑을 내려다보아도 바닥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고, 사방은 그저 흐릿한 회색과 청록의 경계뿐이었다. 숨을 들이쉬면 폐 속까지 안개가 스며드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그 한가운데, 사슬에 묶인 채 웅크려 있는 노인이 있었다. 백발이 산발한 머리, 뼈만 남은 듯 야윈 몸. 손목과 발목을 파고든 사슬은 살갗을 뚫고 뼈에까지 닿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광포하게 들끓고 있었다. 마치 화산 아래 잠든 용암처럼, 억눌린 채로도 언제든 터져 나올 듯한 압박감이었다. "…누구요." 강도진이 묻자 노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목뼈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느린 움직임이었다. 눈동자에 핏발이 서 있었다. 《강씨의 피… 강씨의 피가 왔구나.》 노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사람의 말을 하지 않은 자의 것처럼, 목구멍 깊은 곳에서 억지로 끌어올린 듯한 음성이었다. "당신은…" 《나는 강태산이다. 네 선조. 백 년을 이곳에서 썩어가던 자다.》 강도진의 눈이 커졌다. 가문의 족보에서 이름조차 흐릿하게 남아있던, 백 년 전 은거했다던 그 선조가 여기, 이 정신 깊은 곳에 있었단 말인가. 그는 어릴 적 조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강태산이라는 이름은 늘 조심스럽게 발음되었고, 그 뒤에는 언제나 침묵이 따라붙었다. "어째서 이곳에…" 《잔월옥. 그것이 나를 이곳에 묶어두었다.》 강태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사슬이 철컹, 소리를 내며 울렸다. 그 소리는 안개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고, 강도진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내가 백 년 전 왕릉의 수호자였음을, 너는 알지 못하겠지.》 "왕릉의… 수호자?" 《잔월옥은 그저 보물이 아니다. 왕릉으로 통하는 문의 열쇠다. 그리고 그 문 안에는, 이 나라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것이 잠들어 있다.》 강도진은 숨을 삼켰다. 이제껏 자신이 알던 잔월옥의 정체가 얼마나 얕은 것이었는지, 그 무게가 새삼스레 목을 조여왔다. 강태산의 눈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오랜 세월 억눌린 분노와, 그보다 더 깊은 회한이 뒤섞여 있었다. 《네가 지금 옥사에서 죽어가고 있음을 안다. 그 계집이 잔월옥을 빼앗아갔다는 것도 안다.》 "…그럼, 이대로 나는…" 《아니다. 네게 줄 것이 있다. 내가 백 년을 버텨온 유일한 이유다.》 강태산이 손을 뻗었다. 그 손끝에서 검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오래 묵힌 술처럼 진하고 걸쭉한 기운이, 허공에 실선을 그리며 강도진을 향해 흘러왔다. 《내 순양진기, 백이십 년의 세월. 이것을 네게 전한다.》 "안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강도진이 손을 들어 막으려 했으나, 그 손은 검붉은 기운을 뚫고 지나가지 못했다. 마치 안개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허무하게 미끄러졌다. 《이미 나는 오래전에 죽어야 했을 몸이다. 광란에 잠식되어 사람도 짐승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강태산의 목소리가 갑자기 다급해졌다. 그의 시선이 안개 저편으로 향했다. 《서둘러야 한다. 저것이 오고 있다.》 안개 저편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모여들고 있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러나 명백한 위협이 느껴지는 흑기였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것은 서서히 뭉치며 안개를 잡아먹듯 번져오고 있었다. 《저 흑기는 나를 완전히 소멸시키려는 것. 그전에 서둘러라!》 강태산이 강도진의 가슴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열기는 인간의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웠다. 순간, 뜨거운 것이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화악― 온몸의 혈맥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강도진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백이십 년의 순양진기가 그의 몸 안으로 밀려들며, 기존의 육중 진기와 뒤섞였다. 두 개의 다른 기운이 서로를 밀어내려 몸부림치는 것이, 마치 몸속에서 두 개의 강물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과 같았다. 뼈마디마디가 비틀리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잔월옥을 되찾아라. 왕릉의 문을 지켜라. 그것이 강씨 가문에 남은 마지막 사명이다.》 강태산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그의 형체 또한, 흑기에 잡아먹히듯 가장자리부터 흐려지고 있었다. "할아버님! 잠깐, 아직 다 듣지 못했습니다!" 강도진이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손끝에 닿는 것은 차가운 안개뿐이었다. 《…내 이름을, 가문의 족보에서 지워라. 나는 이미 사람이 아니었으니.》 흑기가 강태산을 완전히 감쌌다. 그 형체가 서서히 흐려지며 안개 속으로 스러졌다. 마지막 순간, 그의 눈빛만은 강도진을 향해 있었다. 원망도, 애원도 아닌, 그저 오래 짊어졌던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한 눈빛이었다. 스르륵― 마지막 잔영조차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안개마저 서서히 걷히며, 강도진의 시야가 하얗게 물들어갔다. *** 강도진이 눈을 뜬 곳은 낯선 방이었다. 천장의 나뭇결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옹이가 박힌 자리, 세월에 갈라진 틈까지 또렷하게 보일 만큼 시야가 맑았다. 몸을 움직이려 하자,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 마치 몸속에 거대한 강물이 흐르는 듯한, 낯설고도 묵직한 기운이었다. 손끝을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그 기운이 혈맥을 따라 요동치며 반응했다. "…도진아." 윤소혜가 침상 곁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붉게 부어 있었고, 손끝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옷깃은 며칠째 갈아입지 못한 듯 구겨져 있었고, 머리카락 몇 올이 이마에 흐트러진 채 붙어 있었다. 큰아들을 전장에서 잃고, 둘째 아들의 사지가 잘리는 것을 지켜본 그녀에게 막내아들의 이 위기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어머니…"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성대처럼, 첫 음절을 내뱉는 것조차 힘겨웠다. "살았구나. 살았어." 윤소혜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손톱 끝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을 주어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아버지께서… 폐하를 강압해 일곱째 공주와의 혼인을 성사시키셨다. 이제 네 죄는 없는 것이 되었어." 강도진은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혼인. 자신의 신분을 되돌리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것을, 그는 씁쓸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목구멍 안쪽에서 무언가 쓴 것이 올라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채림이는…" 그 이름을 묻는 순간, 윤소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손이 순간 굳어지듯 멈췄다. "그 아이는 이미 너와의 인연을 끊었다. 더는 입에 담지 마라." 그 말끝은 단호했지만, 그 안에 감춰진 떨림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강도진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몸속에서 낯선 기운이 여전히 요동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갇힌 짐승처럼 혈맥 속을 헤집고 다니는 그 기운은, 언제 터져 나올지 알 수 없는 위험을 품고 있는 듯했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지금의 자신은, 함정에 빠지기 전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낯선 기운의 근원이, 방금 안개 속에서 스러진 그 선조의 마지막 숨결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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