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길드장의 오년공백

3화

새벽 네 시, 왕도는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다. 이도훈은 최소한의 짐만 챙겨 배낭에 넣었다. 지도, 여벌 옷, 비상식량, 그리고 낡은 단검 한 자루였다. 검을 챙길까 고민했지만, 결국 놓아두기로 했다. '이번엔 싸우러 가는 게 아니다. 걸으러 가는 거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았다. 배낭 끈을 조이는 손이 낯설게 느껴졌다. 삼 년 동안 이런 식으로 짐을 싸본 적이 없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길드 마스터가 된 이후로는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였다. 강서윤이 앞장서고, 한소이가 지도를 펼치고, 미류가 뒤를 살피는 식이었다. 혼자 짐을 싼다는 건, 그만큼 오래된 감각을 다시 꺼내는 일이었다. '괜찮다. 예전에는 이렇게만 다녔으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방문을 나섰다. 길드 건물 뒷문으로 향하는 복도는 조용했다. 조용한 만큼, 그의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다들 자고 있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복도 끝, 회의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어제 낮 그 안에서 벌어졌던 언쟁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강서윤은 위험하다고 했고, 한소이는 무모하다고 했고, 미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물만 글썽였다. '그래서 몰래 가는 거다.' 그는 그렇게 다시 되뇌었다. 설득할 자신이 없다면, 부딪치지 않는 게 나았다. 뒷문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도훈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온 건 송이슬이었다. "마스터님." 그녀가 낮게 불렀다. "이슬 씨." 이도훈이 멈춰 섰다. "역시... 몰래 가시는 거였네요." 송이슬의 목소리엔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모두를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요." 그가 조용히 답했다. 송이슬은 팔짱을 낀 채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표정은 또렷했다. "안 말릴게요." 그녀가 말했다. "안 말리는 겁니까." 이도훈이 되물었다. "말려도 가실 거잖아요. 마스터님 그런 분이시니까." 송이슬이 짧게 웃었다. 그 말에는 삼 년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처음 길드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도훈이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송이슬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작은 주머니를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비상약이에요. 챙겨 가세요." 그녀가 말했다. "고마워요." 이도훈이 짧게 웃었다. 주머니 안에는 지혈제와 해독초, 그리고 낯익은 향의 진통제가 들어 있었다. 그녀가 평소 길드원들에게 나눠주던 것과 같은 종류였다. "돌아오시면... 다들한테 미리 말씀드리세요. 이번처럼 도망치듯 가지 마시고요." 송이슬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엔 원망보다 이해가 더 많이 섞여 있었다. "약속할게요." 이도훈이 답했다. "강서윤 님한테는 뭐라고 할까요." 송이슬이 물었다. "휴가라고만 해주세요." 이도훈이 답했다.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요." 송이슬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믿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사실이니까요." 이도훈이 짧게 답했다. 송이슬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뒷문을 향해 손짓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뒷문을 나서 왕도의 새벽길을 걸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그의 발소리만이 돌바닥 위에 울렸다. 가로등 몇 개만이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고, 상점가의 간판들은 모두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낮 동안 붐비던 거리가 이렇게 텅 비어 있는 걸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이 시간의 왕도는 처음 왔을 때랑 똑같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성문 근처, 경비병이 그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마스터님이 이 시간에 어딜 가십니까?" 경비병이 물었다. "잠깐 나갔다 오는 것뿐입니다." 이도훈이 답했다. "혼자서요? 호위도 없이요?" 경비병이 다시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의아함이 반쯤 섞여 있었다. "익숙한 일입니다." 이도훈이 짧게 답했다. 경비병은 별다른 의심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그렇게 왕도를 빠져나왔다. 성문을 나서는 순간,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그 소리가 마치 어떤 경계선을 넘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이제부터는 마스터가 아니다. 그냥 이도훈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 닷새가 지났다. 이도훈은 왕도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국경 지대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이름은 라이덴이었다. 상인과 모험자들이 드나드는, 특별할 것 없는 변경 마을이었다. 좁은 골목마다 흙먼지가 쌓여 있었고, 마을 어귀의 우물가에서는 아이들이 물을 긷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흙길의 감촉이, 이상하게도 그를 안심시켰다. '이게 얼마 만이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닷새를 걸으며 발바닥에는 물집이 몇 개 잡혔다. 처음 이틀은 다리가 뻣뻣했지만, 사흘째부터는 몸이 예전 감각을 되찾았다. 길가에서 만난 상인들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밤이면 노숙을 하며 별을 봤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시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마을의 작은 주점에서 그는 우연히 늙은 모험자와 마주쳤다. "신참인가?" 노인이 물었다. 그의 얼굴은 왕도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냥 여행자입니다." 이도훈이 짧게 답했다. "여행자가 이런 데까지 온다고? 이 근처엔 아무것도 없어." 노인이 웃었다. "아무것도 없다니요." 이도훈이 물었다. "동쪽 숲에 오래된 던전이 하나 있긴 하지. 근데 아무도 안 들어가." 노인이 목소리를 낮췄다. 주점 안은 한산했다. 몇몇 손님들이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노인의 목소리를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이도훈은 자연스럽게 노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술 한 병을 시켜 놓고 잔을 채워주자, 노인의 입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 "왜 아무도 안 들어갑니까." 이도훈이 흥미를 보였다. "들어간 놈들이 다 이상해져서 나오거든. 아니면 안 나오거나." 노인이 술잔을 비웠다. "이상해진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이도훈이 되물었다. "기억이 이상해진다는 소리야. 말이 안 되지만, 다들 그렇게 말해." 노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세히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이도훈이 다시 물었다. "몇 년 전에 젊은 놈 하나가 들어갔다 나왔는데, 자기 이름도 기억을 못 하더라고. 그러다가 얼마 뒤에 갑자기 미친놈처럼 웃으면서 마을을 떠났지." 노인이 그때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후로는 아무도 안 들어갑니까." 이도훈이 물었다. "들어가려는 놈이 있어도 우리가 말리지.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왜 들어가나." 노인이 말했다. 그 이야기는 이도훈의 마음속에 작은 불씨를 일으켰다. '기억이 이상해진다니.' 그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왕도에서 들어본 적 없는 종류의 던전이었다. 길드에 등록된 던전 기록에는 없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미지의 던전이라는 뜻이었다. 모험가로서의 오랜 감각이, 오랜만에 깨어나는 걸 그는 느꼈다. 강서윤이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록에 없는 던전은 위험한 게 아니라, 위험조차 파악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게 신중했다. 하지만 이도훈은 그 말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위험이 파악되지 않았다는 건, 아직 아무도 그 답을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그가 가장 좋아하던 종류의 문제였다. "그 던전, 위치를 알 수 있습니까." 이도훈이 물었다. "가르쳐줘도 안 가는 게 나을걸." 노인이 말했다. "그래도 부탁드립니다." 이도훈은 물러서지 않았다. 노인은 잠시 그를 살피더니, 결국 낡은 지도 한 귀퉁이에 대충 표시를 해 주었다. "숲 안쪽으로 반나절이야. 표식은 부러진 오래된 석상이지." 노인이 말했다. "석상이라니, 어떤 모양입니까." 이도훈이 물었다. "사람 모양이었던 것 같은데, 너무 낡아서 얼굴도 안 보여. 그냥 부러진 돌덩이라고 생각하면 돼." 노인이 답했다. "고맙습니다." 이도훈이 지도를 조심스럽게 접었다. "고맙긴, 말리는 게 진심인데 안 들으니 하는 수 없지." 노인이 한숨을 쉬며 다시 술잔을 채웠다. 그날 밤, 이도훈은 주점 구석에 앉아 지도를 살폈다. '닷새를 이미 썼다. 남은 시간에 저길 가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동료들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 강서윤의 단호한 눈빛, 한소이의 냉정한 계산, 미류의 젖은 눈. '모두가 반대했던 이유가 이런 거였을까.' 그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곧 지도를 접었다. 미류의 얼굴이 유난히 오래 남았다. 떠나던 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도 많은 걸 전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이번엔 정말 그냥 걷기만 할 거니까.' 그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지도는, 그 약속과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미지의 던전이라는 말이, 삼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그의 호기심을 흔들어 깨웠다. 기록에도 없고,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곳. 그것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가보자.' 그는 그렇게 결심했다. 다음 날 새벽, 그는 숲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침 공기는 차가웠고, 숲 입구의 나무들은 안개에 반쯤 잠겨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마을의 소음은 점점 멀어졌고, 대신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귓가에 남았다. 그것이 그의 남은 여행 중, 가장 중요한 선택이 될 줄은 아직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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