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숲은 생각보다 깊었다.
이도훈은 노인이 알려준 방향을 따라 반나절을 걸었다.
나무들이 점점 굵어지고, 빛이 점점 줄어드는 걸 그는 느꼈다.
발밑의 흙은 축축했고, 위로 뻗은 가지들이 하늘을 가려 대낮인데도 어둑했다.
'이 정도로 깊은 숲이라면, 확실히 왕도 기록에 없을 만하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걸음을 옮길수록 새소리마저 사라졌다.
숲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벌레 울음도, 짐승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생명이 없는 숲이라니.' 이도훈은 미간을 좁혔다. 삼 년 전, 그가 던전을 전문으로 돌던 시절에도 이런 정적을 몇 번 겪은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 정적의 끝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있었다.
'생명의 흔적이 지워진 땅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 예전 사부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그는 그 말을 곱씹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품 안의 지도는 이미 무용지물이었다. 노인이 그려준 것은 방향뿐이었고, 세세한 지형은 그의 발로 확인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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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석상을 발견한 건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석상은 사람 형태였지만, 얼굴 부분이 완전히 깎여 나가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워낸 것처럼, 정교하게 파여 있었다.
'자연적으로 마모된 흔적이 아니다.' 이도훈은 석상 표면을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날카로운 도구로 깎아낸 자국이 선명했다.
그 아래로 이끼 덮인 계단이 지하로 이어졌다.
입구엔 아무런 표지도, 경고도 없었다.
'등록된 던전이라면 최소한 경계 표식이 있어야 한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없다는 것 자체가 이상함의 증거였다.
왕도의 던전 관리국은 발견된 던전마다 등급을 매기고 표식을 세운다. 위험도가 낮으면 초록색 깃발, 중간이면 노란색, 높으면 붉은색.
이곳엔 어떤 색깔의 깃발도 없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 중 하나였다.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발견되었지만 은폐되었거나.
'후자라면 위험하다.' 이도훈은 계단을 내려서기 전,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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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내려가자 좁은 통로가 이어졌다.
벽면엔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왕립 도서관에서도 본 적 없는 형태였다.
문자는 곡선 위주였고, 마치 물이 흐르는 모양을 형상화한 것 같았다.
'한소이가 있었다면 뭔가 알아냈을 텐데.' 그는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혼자였다.
한소이라면 이 문자를 보고 눈을 빛냈을 것이다. 그녀는 고대어에 관해서라면 왕도의 어떤 학자보다 밝았다.
'그 애가 곁에 있었다면 벌써 절반은 해석했겠지.' 이도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를 이런 위험한 곳에 데려올 수는 없었다. 이건 확인되지 않은 던전이었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랐다.
통로는 예상보다 길게 이어졌다.
일반적인 던전이라면 몬스터의 기척이나 함정의 흔적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정적뿐이었다.
'이상하다.' 이도훈은 발걸음을 늦췄다. 오랜 모험가의 감각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그 감각은 삼 년 전, 그가 실제로 던전을 누비며 몸으로 익힌 것이었다.
위험이 임박했을 때 몸의 어딘가가 먼저 반응했다. 목덜미가 서늘해지거나, 손끝이 저릿해지거나.
지금은 후자였다. 손끝이 미세하게 저려왔다.
'뭔가 있다.' 그는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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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방에 도착한 건 통로를 삼십 분 정도 걸은 후였다.
방 안엔 아무런 유물도, 몬스터도 없었다. 대신 바닥 전체에 희미하게 빛나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문양은 원형이었고, 중심으로 갈수록 복잡한 기하학적 선들이 얽혀 있었다.
'마법진인가.' 이도훈이 조심스레 다가섰다.
빛은 은은한 청색이었다. 마치 오래된 유리 조각이 달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명멸했다.
'살아있는 마법진이다.' 이도훈은 그렇게 판단했다. 죽은 마법진이라면 이렇게 빛을 낼 수 없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지금도 이 마법진에 힘을 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문양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주변을 먼저 살폈다.
벽면에 새겨진 문자들이, 이 문양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있었다.
'이건 단순한 함정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뭔가 더 큰 목적을 가진 구조물이었다.
방의 천장을 올려다보니 그곳에도 같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바닥, 벽, 천장. 방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마법 구조물이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이도훈은 침을 삼켰다. 왕도의 마법사들도 쉽게 만들 수 없는 규모였다.
라이덴 마을에서 노인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기억이 이상해진다는 소리야.' 그 말이 이 문양과 관련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노인은 삼십 년 전, 마을 청년 몇이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온 뒤 이상해졌다고 말했다.
돌아온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고 했다.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된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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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방을 나와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적잖은 시간을 이미 써버린 상태였지만, 이 던전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이건 왕도에 보고할 가치가 있는 발견이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동료들이 반대했던 이유와는 상관없이, 이건 새로운 발견이었다.
한소이는 떠나기 전, 그에게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혼자 가는 건 위험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명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혼자 이곳까지 왔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위험을 마주할 때, 그는 늘 다른 이를 끌어들이지 않는 쪽을 택했다.
'이건 내 책임이다.' 그는 그렇게 되뇌며 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통로로 접어들자 벽면의 문자들이 점점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빛이 강해지고 있다.' 이도훈은 그렇게 인지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빛의 색은 처음 방에서 본 것과 같은 청색이었으나,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낮은 진동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숨을 쉬는 소리 같았다.
우웅- 우웅-
진동음은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됐다. 마치 심장 박동 같기도 했다.
'이 던전 전체가 살아 있는 건가.' 이도훈은 그런 생각이 들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무언가의 몸속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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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음이 점점 커지면서, 통로 끝에서 이상한 형체가 나타났다.
돌로 이루어진 거인형 몬스터였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빛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키는 어른 세 명을 세워놓은 것보다 컸고, 몸통 전체가 이끼와 문자로 뒤덮여 있었다.
'가디언인가.' 이도훈은 그렇게 판단했다. 이 던전이 지키는 무언가가, 바로 앞의 방에 있다는 뜻이었다.
가디언이라면 목적이 하나뿐이다. 침입자를 막는 것.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싸워야 한다.' 이도훈은 자세를 낮췄다. 물러설 통로는 이미 그의 뒤로 길게 뻗어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온 이상 후퇴는 곧 실패였다.
거인이 팔을 들어 올렸다.
쿠웅-
바닥이 흔들렸다. 이도훈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굴렸다.
거인의 팔이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내리찍었다. 돌바닥이 움푹 파이며 파편이 튀었다.
'무기가 없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검을 챙기지 않은 게 실수였다.
라이덴 마을을 떠날 때, 그는 짐을 최소화했다. 던전을 정면으로 돌파할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정찰과 조사, 그것이 이번 여정의 목적이었다.
'조사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그는 스스로의 오판을 자책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는 의미가 없었다.
그는 배낭 속에서 낡은 단검을 꺼냈다. 위협적인 무기라고는 할 수 없었다.
칼날은 여러 번 갈아 쓴 탓에 폭이 좁아져 있었고, 손잡이도 낡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삼 년 전까지 던전을 누비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을 거다.' 그는 그렇게 믿고 자세를 낮췄다.
스르릉-
단검을 뽑아 드는 소리가 통로에 낮게 울렸다.
거인의 두 번째 공격이 날아오는 순간, 그는 이미 다음 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공격의 궤적을 읽고, 회피할 방향을 정하고, 그 다음 반격의 각도까지.
삼 년의 공백이 있었지만, 몸은 여전히 그 계산을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계산은 예상보다 훨씬 위험한 국면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