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거인의 주먹이 다시 바닥을 내리쳤다.
쿠웅-
이도훈은 몸을 굴려 간격을 벌렸다. 돌가루가 그의 어깨를 덮었다. 흩어진 먼지가 목덜미로 스며들며 기침을 유발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정면으로 부딪히면 승산이 없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삼 년간 무뎌진 몸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저 정도 궤도는 눈에 담기도 전에 몸이 먼저 피했을 것이다. 지금은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그제야 몸이 반응했다. 그 반박자의 차이가 삼 년의 공백이었다.
통로 뒤쪽을 살폈다. 후퇴할 공간은 남아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 오면 저쪽으로 몸을 던지면 된다고, 그는 그렇게 안전판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등 뒤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와르르-
돌아보니, 그가 지나온 통로의 천장이 붕괴되어 있었다. 거인의 진동이 만들어낸 여파였다. 방금까지 존재했던 안전판이 순식간에 돌무더기로 뒤바뀌어 있었다.
'퇴로가 막혔다.' 이도훈은 그렇게 인지하며 낮게 숨을 삼켰다.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감각이 흘렀다. 이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거인은 다시 팔을 들어 올렸다. 이번엔 궤도가 더 넓었다. 회피할 공간을 아예 지워버리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이도훈은 낮게 몸을 숙이며 거인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거인의 육중한 발이 바닥을 짓누르는 순간, 그 틈새로 몸을 밀어넣는 것이 유일한 승부수였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 단검으로 거인의 발목 관절부를 노렸다.
쉭-
단검이 돌 틈새의 균열을 찾아 들어갔다.
퍽!
거인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균열이 약점이었던 것이다. 돌로 이루어진 몸이라도 완벽한 결정체는 아니었다. 어딘가 이어붙인 흔적, 균열, 약한 지점이 반드시 존재했다.
'다행이다. 완전히 실전 감각을 잃은 건 아니었어.' 이도훈은 그렇게 안도했다. 하지만 안도는 짧았다.
거인이 쓰러지며 반대편 팔을 크게 휘둘렀다. 무릎을 꿇는 그 반동을 이용해, 팔 전체를 채찍처럼 내던진 것이었다.
이도훈은 반응이 늦었다. 팔이 그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퍽-
그는 벽에 부딪혀 나가떨어졌다. 숨이 턱 막혔다. 폐 안의 공기가 한순간에 빠져나간 듯한 감각이었다. 시야가 하얗게 번지고, 이명이 귓속을 가득 채웠다.
'이대로는 죽는다.' 그런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쳤다.
강서윤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당신이 검을 잡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나 나요?' 그 말이 지금 이 순간, 뒤늦은 경고처럼 들렸다. 그때는 흘려들었던 물음이었다. 지금은 그 물음 하나하나가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한소이의 계산도 떠올랐다. '삼십 배의 위험이라는 뜻이에요.' 그녀의 냉정한 목소리가 옳았다는 걸, 그는 이제야 절감했다. 숫자로만 존재하던 위험이, 지금은 옆구리를 타고 흐르는 뜨거운 통증으로 실감되고 있었다.
'그들 말이 맞았어.' 그는 그렇게 인정했다. 하지만 인정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진 않았다. 이미 발을 들여놓은 이상, 후회는 나중의 몫이었다.
그는 다시 일어섰다. 옆구리에서 뜨거운 통증이 퍼졌다. 손을 짚어 벽에 기대며 몸을 세우는 동안, 다리가 두 번쯤 힘없이 꺾였다.
거인은 무릎을 꿇은 채로도 팔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 했다. 손가락 하나의 크기가 이도훈의 몸통만 했다. 저 손에 붙잡히면 그대로 끝이라는 걸,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도훈은 남은 힘을 모아 거인의 균열이 생긴 발목을 다시 찔렀다.
쉭- 퍽!
돌 파편이 튀며 거인의 다리가 완전히 무너졌다. 균열을 따라 발목 전체가 갈라지듯 부서져 내렸다.
거대한 몸체가 옆으로 쓰러지며 통로 전체가 흔들렸다.
콰르릉-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이도훈은 벽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듯 뛰고 있었고, 그 진동이 옆구리의 통증과 겹쳐져 온몸을 울렸다.
'살았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단검을 쥔 손아귀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먼지가 가라앉자, 거인이 쓰러진 자리 너머로 새로운 통로가 드러났다. 무너진 거인의 몸체 옆으로, 좁지만 분명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원래는 거인이 지키고 있던 길이었던 모양이었다. 이 정도 크기의 수호자를 세워둘 정도라면, 그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이도훈은 옆구리를 짓누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통증이 걸음마다 옆구리를 찌르듯 파고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견뎠다.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순 없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았다. 퇴로는 이미 무너졌다. 남은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이 던전의 끝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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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로 끝에는 커다란 원형의 방이 있었다. 천장이 높고, 벽면 전체가 은은한 빛을 내는 문자들로 뒤덮여 있었다.
방 중앙, 바닥 전체를 채운 거대한 마법진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원과 선, 낯선 기호들이 겹겹이 얽혀 하나의 거대한 도형을 이루고 있었다.
첫 번째 방에서 본 것보다 몇 배는 복잡하고 정교한 형태였다. 처음 마주했던 마법진이 습작이었다면, 이것은 완성작이라 불러야 할 정도의 밀도였다.
그 위로, 허공에 반투명한 결정체 하나가 떠 있었다. 사람 머리만 한 크기였고,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일정한 박동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이도훈은 방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섰다. 발을 옮길 때마다 바닥의 문양이 옅게 반응하듯 색을 바꾸었다.
벽면의 문자들이 이 방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듯 배열되어 있었다. 마치 이 결정체 하나를 지키기 위해 던전 전체가 설계된 것처럼 보였다.
'이게 던전의 핵심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첫 번째 방의 마법진, 거인 수호자, 그리고 이 결정체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 짜여 있었다.
결정체 주변으로 다가갈수록,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피부를 스치는 게 느껴졌다. 마치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혹은 무언가가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감각이었다.
노인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기억이 이상해진다는 소리야.' 낡고 마른 목소리로, 몇 번이나 강조하던 경고였다.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된다.' 그는 이전의 경고를 스스로에게 다시 되풀이했다. 하지만 결정체는 마치 그를 부르는 듯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박동이 조금씩 빨라지는 듯도 했다.
호기심과 경계심이 동시에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한 걸음은 다가가고 싶었고, 다른 한 걸음은 물러서고 싶었다. 그 둘 사이에서 그는 잠시 숨을 죽였다.
이도훈은 결정체 앞에 멈춰 섰다. 옆구리의 통증이 여전히 뜨겁게 남아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것조차 잊혀 있었다.
마법진의 문양이 그의 발밑에서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희미했던 빛이, 그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선명해졌다.
'왕도에 보고할 시간이 걸려도, 이 정체는 확인해야 한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이 정도 규모의 던전을 발견하고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은 채 물러난다면, 그것대로 무책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뻗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동료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다.
강서윤의 단호한 눈, 윤채아의 부드러운 미소, 한소이의 냉정한 목소리, 미류의 젖은 눈, 장하영의 사무적인 태도, 그리고 송이슬의 작은 배려.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를 붙잡으려 했던 이들이었다.
'금방 돌아가서 다 설명하면 된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끝을 결정체를 향해 뻗었다. 이 정도의 확인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손끝이 결정체의 표면에 닿기 직전, 마법진 전체가 눈부신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방 전체가 순식간에 새하얗게 물들었다. 벽면의 문자들이 일제히 타오르듯 밝아지고, 바닥의 문양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발밑을 휘감았다.
그 빛이 방 전체를 삼키는 순간, 이도훈은 자신이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몸이 붕 뜨는 듯한 감각과 동시에, 시야가 완전히 새하얗게 지워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건... 예상 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