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네 그림자, 내가 찜했어

2화

학원 3층 강의실은 언제나 조용했다. 형광등 소리만 웅웅거리는, 딱 그런 공간이었다. 칠판 앞에서 강사가 문법 설명을 하고 있었지만, 절반은 이미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게 뒤에서도 보였다. 누군가는 휴대폰을 무릎 위에 숨긴 채 만지고 있었고, 누군가는 아예 엎드려 있었다.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서 프린트를 넘겼다.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손이 습관적으로 종이를 넘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서은채는 대각선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등을 곧게 펴고, 필기를 하는 손끝이 유난히 단정했다.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선에서 딱 떨어지듯 잘려 있었고, 옆에서 보이는 옆얼굴은 표정이 거의 없었다. 그 애가 나를 보던 눈빛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아까, 수업 시작 전에. 분명히 몇 초쯤 나를 쳐다보다가, 내가 시선을 느끼자마자 바로 고개를 돌렸었다. 딱히 특별한 의미는 없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냥 착각이었을 거라고. 원래 좀 특이한 애니까. 말도 거의 안 섞고, 쉬는 시간에도 늘 혼자였으니까.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 나는 밖으로 나가 자판기 앞에 섰다. 복도는 학생들로 시끌시끌했다. 누군가는 자습실로 들어가고, 누군가는 계단 쪽에서 담배 냄새를 풍기며 돌아왔다. 동전을 넣고 커피를 뽑는데, 옆에서 준서가 문자를 보냈다. [야, 오늘 저녁에 나리랑 셋이 떡볶이 어때] 준서는 옆 반이었는데도 항상 쉬는 시간마다 여기까지 와서 말을 걸었다. 나리는 준서랑 사귀는 사이였고, 셋이 붙어 다니는 게 이제는 자연스러웠다. 나는 답장을 미루고 커피를 홀짝였다. 달다. 그냥 달다는 느낌뿐이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서은채의 눈빛이 재생되고 있었다. 캔에서 올라오는 미미한 열기도, 자판기 앞을 지나가는 발소리도 그냥 배경처럼 스쳐 지나갔다. '별거 아니야.' 몇 번이나 그렇게 되뇌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개운치가 않았다. 준서가 다시 문자를 보냈다. [뭐야 씹냐] 나는 그제야 웃으면서 답을 눌렀다. [좋아, 저녁에 보자] 그러고 나서 커피를 다 마시고 캔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텅ㅡ 소리가 나면서 캔이 다른 캔들 위로 굴러떨어졌다. 수업 종이 다시 울렸다. *** 그날 오후,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예보에도 없던 비였다. 아침에는 하늘이 그냥 흐리기만 했었다. 습기가 조금 무겁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학원 옥상 테라스, 흡연 구역 옆 벤치에 나는 잠깐 앉아 있었다. 바람도 없이 조용하던 날씨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하늘이 잠깐 사이에 회색빛으로 짙어지더니, 먼 곳에서부터 낮은 소리가 밀려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냥 잠깐 바람 쐬러 나온 거였다. 수업 시간표를 다시 확인하려고 폰을 꺼내는데, 갑자기 공기가 확 달라졌다. 촤아아ㅡ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벤치 지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몇 초 만에 어깨가 축축해졌다. 계단 쪽 문으로 뛰어가려다가, 순간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그때, 옥상 반대쪽에서 서은채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손에 종이 뭉치를 한가득 들고, 바람에 휘날리는 걸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었다. 옥상 반대쪽은 원래 잘 쓰이지 않는 공간이었다. 거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종이 뭉치가 상당히 두꺼워 보였다. 아마 학원 자료실에서 뭔가 정리하다 옥상까지 들고 나온 모양이었다. "어어어ㅡ!" 그 애가 짧게 소리를 냈다. 평소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 나온 목소리라 조금 낯설었다. 나는 그 순간 걸음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비를 피할 생각도 잊고,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바람이 한 번 더 세게 불었다. 종이 뭉치가 그 애의 손을 벗어나 허공으로 흩어졌다. 순식간이었다. 종이 몇 장이 먼저 위로 솟구쳤고, 나머지는 그 애의 팔 사이로 빠져나가며 사방으로 퍼졌다. 그 종이들은 옥상 난간을 넘어 밖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서은채가 몸을 던지듯 팔을 뻗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비에 흠뻑 젖은 종이 몇 장은 벌써 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을 움직였다. 손을 뻗었다. 닿을 리가 없는 거리였다. 서은채가 서 있는 곳까지도 최소 십 미터는 됐고, 종이는 이미 난간 너머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리였다. 하지만 내 그림자가 먼저 반응했다. 발밑에서 순식간에 검은 형체가 늘어나면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허공을 향해 뻗어나갔다. 비에 씻겨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그림자만큼은 또렷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촤악ㅡ 종이들이 허공에서 그대로, 검은 물결 속으로 삼켜지듯 사라졌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미쳤다, 이 타이밍에.' 반사적이었다. 생각보다 몸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움직였다. 비 맞을까봐, 젖을까봐, 그런 걸 걱정하는 것과 비슷한 반사작용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후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서 이 힘을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림자를 늘리고, 뭔가를 감싸고,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 그건 늘 혼자 있을 때,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하던 일이었다. 그런데. 서은채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있었다. 비를 다 맞으면서도, 눈은 정확히 내 발밑, 내 그림자가 있던 자리에 꽂혀 있었다. 빗줄기가 그 애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그저 그 자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얼른 눈을 돌리고 그림자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평소 발밑에 붙어 있는, 아주 평범한 그림자의 형태로. 종이 뭉치는 물기 하나 없이 그대로,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비를 맞았는데도 젖지 않은 종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빗속에서 종이 뭉치를 들고 서 있는 내 모습도, 그걸 바라보는 서은채의 표정도, 전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저, 여기."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종이를 내밀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 그 애는 받지 않았다. 그저 나를, 정확히는 내 발밑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몇 초가 그렇게 흘렀다. 빗소리만 계속 옥상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고, 그 사이로 멀리서 뇌우가 낮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가 그 애의 검은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젖은 옷이 살에 달라붙었지만 그 애는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어색해서 종이를 다시 그 애 쪽으로 살짝 밀어봤다. 그런데도 반응이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방금 그 힘을 본 게 확실한지, 아니면 그냥 놀라서 멍해진 건지 구분이 안 됐다. 만약 본 거라면. 이제 이 모든 게 어떻게 되는 건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너." 마침내 그 애가 입을 열었다. "방금 뭐 했어?" 낮고, 조용하고, 그러나 분명히 흔들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비가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서은채는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진홍색 눈동자가, 나를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 속에는 두려움이나 경계심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를 확인하려는 것 같은, 집요할 정도로 또렷한 시선이었다. 나는 그 순간 알았다. 이 애는 방금 아무것도 못 본 게 아니었다. 전부 본 거였다. 빗속에서, 그 애와 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어떻게든 대답을 해야 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거짓말을 해도, 그 눈빛이 그걸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때, 옥상 문 쪽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서은채의 눈동자가 잠깐 그쪽으로 움직였다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대답해." 그 애가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더 낮고, 더 단호하게. 빗줄기 속에서,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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