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 이후, 서은채는 눈에 띄게 더 자주 나를 찾아왔다.
학원 끝나고, 학교 끝나고, 심지어 주말에도 문자를 보냈다.
[내일 몇 시에 끝나]
무뚝뚝한 한 줄이었지만, 나는 매번 답장을 했다.
[6시요]
[알겠어]
그게 전부였다.
용건도 없고, 이유도 없었다.
그냥 시간을 물어보고, 나타났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했던 그림자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순간들이 늘어갔다.
준서는 그런 나를 볼 때마다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요즘 그 여자애랑 뭐 있냐?"
"없어."
"근데 왜 자꾸 만나?"
"···몰라."
솔직한 대답이었다.
나조차도 왜 그러고 있는지 잘 몰랐다.
***
그날은 유난히 쌀쌀했다.
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어서, 걸을 때마다 목이 움츠러들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서은채가 카디건을 벗었다.
부스럭ㅡ
얇은 카디건이었는데도, 벗는 손짓이 유난히 느리게 보였다.
"이거."
"···네?"
"넣어봐, 이 안에."
나는 그 애의 카디건을 받아 들었다.
아직 그 애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게 손끝으로 느껴졌다.
미묘하게 따뜻했다.
"이런 것도 돼요? 옷 같은 거."
"넣어보라니까."
서은채가 팔짱을 끼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이 재촉하듯 느껴져서, 나는 더 물을 수가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림자를 열었다.
촤아ㅡ
카디건이 검은 물결 속으로 사라졌다.
그림자 안쪽에서, 뭔가가 자리를 잡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와 다른 감각이었다.
사물이 아니라, 온기 자체가 들어간 것 같았다.
서은채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처음으로 옅게 웃었다.
아주 살짝, 입꼬리만 올라가는 웃음이었다.
"됐다."
"···뭐가 됐다는 거예요."
"그냥, 확인."
그 애는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왜인지 그 웃음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뭔가 다른 계산이 숨어 있는 웃음 같았다.
단순한 흥미나 호기심이라기엔, 눈빛이 너무 차분했다.
"저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왜 자꾸 부르는 거예요?"
"궁금해서."
"그냥 능력 자체가요?"
서은채가 잠시 침묵했다.
비스듬히 저녁 햇살을 받으며, 그 애의 진홍색 눈동자가 유난히 붉게 빛났다.
그 색이 노을과 겹쳐서, 순간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그것도 있고."
"그럼 다른 것도 있어요?"
"···너, 여자친구 있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바람 소리마저 잠깐 멈춘 것 같았다.
"없어요."
"전에는?"
"···있었어요."
"어떻게 됐는데."
나는 대답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 애의 눈빛이, 대답을 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가만히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캐묻는 것도 아니고, 다그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기다렸다.
"헤어졌어요. 작년에."
"왜."
"···그냥, 다른 사람이 생겼대요."
말을 뱉고 나니 스스로도 신기했다.
이 얘기를 누구한테 이렇게 순순히 말한 게 처음이었다.
준서한테도 대충 얼버무렸던 얘기였다.
"그냥 안 맞아서 헤어졌어."
그 정도로만 넘겼던 이야기를, 서은채 앞에서는 왜인지 술술 나왔다.
서은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봤다.
동정하지도, 위로하지도 않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눈빛이었다.
그게 오히려 편했다.
누군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면, 오히려 더 불편했을 것 같았다.
"괜찮아, 다 그런 거야" 같은 말들.
그런 말들이 오히려 상처를 되짚게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뭐, 이제 사람 안 믿어?"
"그런 건 아니고요···"
"믿는 거 아니고 뭔데."
"그냥, 기대를 안 해요."
"기대 없이 어떻게 살아."
"그냥 사는 거죠, 뭐."
서은채가 짧게 코웃음을 쳤다.
"재미없게 사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들을 만하네."
그 애가 툭 던지듯 말했다.
비꼬는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서은채의 짧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카디건이 없어서 그런지, 팔뚝에 소름이 올라온 게 눈에 보였다.
그 애는 벤치에서 일어나며 옷깃을 여몄다.
카디건이 없어서 조금 추워 보였다.
나는 도로 카디건을 꺼내주려 손을 그림자로 가져갔다.
"됐어."
그 애가 손을 저으며 막았다.
"거기 계속 넣어놔."
"···왜요? 추운데."
"그냥. 신경 쓰지 마."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추운 걸 참으면서도, 카디건을 꺼내지 말라니.
차라리 처음부터 안 벗었으면 될 일이었다.
"근데 그럼 뭐 하러 벗었어요?"
"실험."
"실험이요?"
"그림자 안에서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
말이 안 되는 대답이었다.
카디건이 버티는 게 무슨 상관인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옷이 뭘 버텨요."
"온도."
서은채가 짧게 대답했다.
"거긴 시간이 멈춰 있잖아. 그러니까 온도도 그대로 있을 거 아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림자 속 시간이 멈춘다는 걸, 그 애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내가 굳이 설명한 적도 없는데.
"그거···"
"말했잖아. 궁금해서 자꾸 부르는 거라고."
그 애가 눈을 마주치며 옅게 웃었다.
그 웃음에서, 나는 처음으로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뭔가를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애가 등을 돌린 채 덧붙였다.
"내일도 넣을 거 갖고 올 거야."
"뭘요."
"보면 알아."
그 말을 끝으로, 그 애는 저벅저벅 걸어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람이 다시 불어와 옷깃을 흔들었다.
서은채가 사라진 골목 끝을 바라보다가, 나는 천천히 그림자를 내려다봤다.
나는 그림자 속, 아직 그 애의 온기가 남아 있을 카디건을 생각했다.
시간이 멈춘 공간 안에서, 그 온기는 영원히 식지 않을 것이다.
그게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지, 나는 아직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몇 번이나 그림자를 내려다봤다.
카디건이 그 안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자꾸 확인하고 싶어졌다.
꺼내지 말라고 했으니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시간이 멈춘 채 남아 있는 그 온기가, 계속 신경 쓰였다.
'실험이라고 했는데.'
정말 온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걸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서은채가 남긴 말들을 곱씹을수록, 답보다 의문이 더 많이 쌓였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서은채는 뭔가를, 아주 천천히, 아주 확실하게 내 그림자 속에 쌓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물건만이 아닐지도 몰랐다.
다음 날, 나는 약속한 시간보다 십 분이나 일찍 그 자리에 나가 있었다.
스스로도 왜 그렇게 서둘렀는지 몰랐다.
그리고 서은채는, 손에 뭔가를 든 채 나타났다.
그게 뭔지, 나는 그 순간까지도 짐작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