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방금 뭐 했냐고."
서은채가 다시 물었다.
이번엔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무슨 소리예요, 그냥 종이 주워준 건데요."
목소리가 떨리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빗물이 옥상 바닥을 타고 흘러 내 운동화 밑창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차가웠다.
그런데 그 차가움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건, 등 뒤에서 나를 보고 있는 저 시선이었다.
"주웠다고?"
그 애가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헛웃음이었다.
입꼬리만 살짝 올라갔다가 곧바로 다시 굳어지는, 그런 웃음.
"난간 밖으로 날아간 종이를, 손도 안 뻗고 주워?"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나는 시선을 피했다.
비는 어느새 조금 잦아들어 있었다.
빗방울이 옥상 난간을 두드리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타닥, 타닥.
그 소리에 맞춰 심장도 뛰었다.
아니, 심장이 먼저 뛰고 있었고 빗소리가 거기에 얹혀지는 느낌이었다.
'봤을 리가 없어.'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이 능력을 들킨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족한테도, 친한 친구한테도 말하지 않은 걸, 이 학원에서 몇 달 같은 시간표를 쓴 게 전부인 애한테 들켰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저기 봤어."
그 애가 내 발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검은 게, 물처럼 움직이는 거. 그 안으로 종이가 사라지는 거."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정확했다.
너무 정확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착각이었다면 저렇게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착각하신 거예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스스로도 설득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착각."
그 애가 한 걸음 다가왔다.
165센티미터의 작은 키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다.
어깨를 펴고 서 있는 자세, 눈을 피하지 않는 시선, 그런 것들이 실제 신장보다 더 큰 위압감을 만들어냈다.
"난 착각 같은 거 안 해."
딱 잘라 말하는 투였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옥상 문까지는 열 걸음도 안 되는 거리였는데, 그 열 걸음이 백 미터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 애가 내 그림자를 다시 봤다.
형광등 불빛에 길게 늘어진, 평범한 그림자였다.
지금은 아무 이상도 없어 보였다.
표면은 그냥 검은색이었고, 물결도 일지 않았고,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도 없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지루할 정도로 정상적인 그림자.
"다시 해봐."
"뭘요."
"아까 그거. 그림자에 뭐 넣는 거."
"그런 거 없어요."
이번에도 목소리가 갈라졌다.
스스로 듣기에도 형편없는 거짓말이었다.
"이도훈."
그 애가 내 이름을 불렀다.
처음이었다.
같은 학원을 몇 달째 다니고 있었는데도, 그 애가 내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 서로 눈도 잘 안 마주쳤다.
같은 반이지만 대화를 나눈 적도 거의 없었고, 쉬는 시간에도 각자 다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애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는 순간, 뭔가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
이름을 안다는 건, 나를 어느 정도는 신경 쓰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거짓말할 시간 아깝게 하지 말고."
나는 침을 삼켰다.
목이 바짝 말라 있었다.
계속 아니라고 우겨봤자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눈빛은, 확신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저런 걸 봤을 때 무섭거나 당황해서 눈을 피하기 마련인데, 서은채는 오히려 더 똑바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나는 손끝을 그림자에 갖다 댔다.
촤아ㅡ
표면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검은 표면이 마치 잉크를 풀어놓은 물처럼 소리 없이 흔들렸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도로 그 안에 밀어넣었다.
손끝이 닿는 순간, 익숙한 서늘함이 퍼졌다.
차갑지만 아프지 않은, 물속에 손을 담근 것과는 다른 감촉이었다.
그리고 다시 꺼냈다.
종이 뭉치는 조금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여전히 젖어 있는 채로 손에 잡혔다.
서은채가 그 모습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지켜봤다.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사람처럼, 그 짧은 순간 완전히 정지해 있었다.
"···진짜였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처음으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놀람이라기보다는, 뭔가 발견한 사람의 흥분 같은 것.
과학 실험에서 예상했던 결과가 그대로 나왔을 때 짓는 표정, 그런 표정이었다.
"이거, 다른 것도 넣을 수 있어?"
"···그런 거 왜 물어보세요."
"물어보면 안 돼?"
그 애가 처음으로 눈을 가늘게 좁혔다.
표정이 조금 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풀림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경계가 풀린 게 아니라, 뭔가를 확신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사람의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지."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안 하는 것 자체가 대답이라는 걸 알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 안 한 거 맞네."
그 애가 팔짱을 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훑어보는 시선이 마치 물건을 감정하는 사람의 눈빛 같았다.
가격을 매기는, 아니면 쓸모를 가늠하는.
"좋아."
"뭐가요."
목소리가 떨렸다.
좋다는 말이 이렇게 무섭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이제부터 이거, 나만 알고 있는 거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되짚어봐야 했다.
나만 알고 있는 거야.
그 말은, 이제 이 비밀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됐다는 뜻이었다.
"···네?"
"딴 데 말하면."
그 애가 몸을 기울여 내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 애의 이마에 붙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눈빛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내가 먼저 다 말하고 다닐 거니까."
협박이었다.
분명한 협박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소문이 퍼지는 순간의 모습이 자동으로 그려졌다.
학원 애들, 선생님들, 그리고 결국 집까지.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으로도 손끝이 저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에는 협박치고는 다른 게 섞여 있었다.
호기심, 흥분, 그리고 뭔가 절박한 무언가.
그게 뭔지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었지만, 단순히 나를 괴롭히려는 의도만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오랫동안 찾던 뭔가를 방금 발견한 사람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대체 왜.'
속으로 물었지만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서은채는 그저 학원에서 가끔 얼굴만 보던 애였다.
성적이 좋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 외에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비가 완전히 그쳤다.
빗소리가 사라지자 옥상은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멀리서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서은채는 그제야 젖은 종이 뭉치를 도로 받아 들었다.
손끝으로 종이를 살짝 펼쳐보더니, 다시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 손짓이 태연했다.
마치 방금 벌어진 일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내일부터."
그 애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학원 끝나고 나 좀 봐."
명령이었다.
부탁이나 제안이 아니라, 명확한 명령형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이 벌어졌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 애는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억지로 버티고 서 있었다.
젖은 옥상 바닥에, 내 그림자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다시 그림자를 만져봤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평소처럼, 그저 검고 평범한 그림자일 뿐이었다.
아까 그 물결 같은 일렁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왜 하필 저 애한테.'
수백 번을 넘게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을, 다시 물었다.
왜 하필 저렇게 눈치 빠르고, 물러설 줄 모르는 애한테 들켰을까.
차라리 아무 관심 없는 애였다면, 못 본 척 넘어갔을 텐데.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학원 다음 수업까지 십 분도 남지 않아 있었다.
평소라면 서둘러 뛰어 내려갔을 텐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종이 뭉치처럼, 나 역시 무언가에 붙잡힌 채로 그 자리에 한참을 더 서 있었다.
비에 젖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는 감촉이 그제야 느껴졌다.
추웠다.
그런데 그 추위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건, 내일 학원이 끝나고 그 애를 다시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저 이 능력을 구경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만 머릿속에 쌓여갔다.
그리고 그 질문들 사이로, 서은채의 마지막 눈빛이 계속 떠올랐다.
호기심과 절박함이 뒤섞인, 그 눈빛.
옥상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나는 계속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일이,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