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형님, 아직 안 죽었는데요

2화

노인이 나가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멍하니 천장만 쳐다봤다. 정확히 말하면 쳐다본 게 아니라 시선이 그쪽에 걸린 채 멈춰버린 거였다. 머릿속은 텅 빈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뭔가로 꽉 막혀 있었는데, 그 뭔가가 뭔지 스스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방 안엔 낡은 목재 냄새와 한약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고, 창호지 사이로 새어드는 빛은 어딘가 누런빛을 띠고 있어서 방 전체가 마치 오래된 사진첩 속 풍경처럼 보였다. 일 년. 노인은 일 년을 넘기지 못한다고 했다. 그것도 회복 가능성 자체가 없다는 투로, 마치 이미 죽은 사람 대하듯 담담하게 선고를 내리고 갔다. 진맥을 짚던 손가락에서 느껴지던 무심함, 그리고 방을 나서기 직전 나를 흘긋 돌아보던 그 눈빛. 동정도 아니고 안타까움도 아니었다. 그냥 확인 도장을 찍고 가는 관리의 표정이었다. 서울에서 트럭에 치여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여기서도 시한부라니, 이건 저승사자가 야근을 밀린 채무처럼 몰아서 처리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와, 진짜 억울해서 눈물도 안 나온다. 근데 원양이 뭐야, 대체. 생각해보니 이 세계 사람들은 다들 그 단어를 신줏단지 모시듯 말했다. 원양, 근기, 무도. 노의원의 입에서도, 처음 나를 발견했던 시비들의 입에서도, 그 단어들은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무협 소설에서나 보던 그런 세계, 내공이니 기공이니 하는 것들이 실재하는 세계에 떨어진 게 틀림없었다. 한국에서 야근하다 트럭에 치여 죽었더니 무협 세계 시한부 도련님으로 환생. 이걸 누구한테 말하면 믿어줄까. 아무도 안 믿어줄 거다. 나조차 안 믿기니까. 그렇다면 방법이 있을 거 아닌가.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이대로 누워서 죽음을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벽에 손을 짚고 겨우 일어선 나는 온몸의 뼈마디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폐가 반쪽만 남은 것처럼 숨이 얕게 들어왔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배꼽 아래 어딘가에 힘을 모으는 상상을 해봤다. 무협지에서 본 대로 단전이라 불리는 곳에 기를 끌어모으는 시늉이었다. 집중, 집중해라. 뭔가 잡히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냐. 머릿속으로 온갖 무협지 장면을 떠올렸다. 주인공이 눈을 감고 아랫배에 열기를 모으면 뜨거운 기운이 온몸을 휘도는, 그런 장면들. 나도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결과는 처참했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이더니 극심한 통증이 명치에서부터 폭발했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져 헐떡거렸다. 온몸의 신경이 한꺼번에 곤두서는 느낌이었고, 뱃속에서 뭔가 뒤집히는 듯한 감각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입에서 피비린내가 올라왔다. 손으로 입을 막았는데, 손바닥에 붉은 피가 흥건했다. "이런 개······" 욕이 절로 나왔다. 시도 한 번에 피를 토하는 몸이라니, 이게 사람 몸이 맞나 싶었다. 손끝이 떨렸다. 아니, 손끝만이 아니라 팔 전체가, 어깨까지, 온몸이 잔진동처럼 떨리고 있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는데 그 박동 하나하나가 명치를 두드리는 것처럼 아팠다. 헐떡이며 다시 정신을 차리려는데, 배 안쪽 깊숙한 곳에서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뜨거운 것도 아니고 차가운 것도 아닌, 마치 오래된 상처 자국을 손으로 더듬을 때 나는 그런 이질감이었다. 뭔가 남아 있었다. 단순히 원양이 텅 비어버린 게 아니라, 그 텅 빈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눌어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진흙탕에 박힌 못처럼, 뽑아내려 해도 뽑히지 않고 오히려 건드릴수록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런 이물감. 나는 눈을 감고 그 감각에 집중해봤다. 손바닥의 피를 닦을 생각도 못한 채, 바닥에 널브러진 자세 그대로 온 정신을 아랫배 쪽으로 쏟았다. 그러자 파편적인 기억이 밀려들었다. 이건 내 기억이 아니었다. 원래 이 몸의 주인, 진짜 임백이 남긴 기억의 잔재였다. 처음엔 흐릿한 색채 조각들이었다. 붉은 등, 술잔, 웃음소리. 그러다 점점 선명해졌다. 형의 웃는 얼굴. 다정한 듯 보이지만 눈매 끝이 미묘하게 처져 있던, 그 웃음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술잔에 섞인 이상한 가루. 형이 술병을 기울일 때 손목이 아주 짧게, 부자연스럽게 꺾였던 그 동작. 정혼녀의 차가운 눈빛. 잔을 건네받는 나를 보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 여자의 눈동자에는 온기가 한 톨도 없었다. 그리고 몸속을 갈퀴처럼 긁어대는 열여덟 갈래의 통증. 십팔화음모(十八花陰謀). 그 단어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열여덟 가지 독초를 조합해 만든 무언가가 몸속 깊이 퍼졌던 흔적이었다. 각각의 독초가 서로 다른 경로로 기맥을 타고 퍼지며, 마지막엔 단전 자체를 지져 태워버리는 방식이라 했다. 그 술을 권한 게 형이었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게 정혼녀였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사고가 아니었다. 계획된 살인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원래의 임백은 죽었고, 그 빈자리에 엉뚱하게 한국에서 트럭에 치인 내가 들어와 앉은 셈이었다.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헛웃음을 흘렸다. 형이라는 새끼가 동생을 독으로 죽였고, 약혼녀라는 여자가 그걸 방조했다. 그리고 나는 그 죽음의 결과물, 껍데기만 남은 몸에 얹혀사는 신세가 됐다. 노의원의 진단대로라면 이 몸도 곧 완전히 무너질 텐데, 그 전에 뭐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명치를 짓눌렀다. 가만, 잠깐만. 형 임강. 정혼녀 이서연. 이름까지 또렷하게 떠올랐다. 마치 원래 알고 있던 사람들처럼, 임백의 기억이 그 이름들을 나에게 억지로 새겨놓은 것 같았다. 그들의 얼굴, 목소리, 심지어 걸음걸이까지도 눈앞에 그려질 정도였다.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아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죽여버리고 싶다기보단— 이대로 순순히 죽어줄 순 없다는 오기가 먼저였다. 저들이 원하는 건 임백의 완전한 소멸이었을 텐데, 그 소멸된 자리에 엉뚱한 내가 들어앉아버렸으니, 이건 어떤 의미로는 저들의 계획에 아주 큰 구멍이 난 셈이었다. 그래, 어차피 죽었다 살아난 몸. 못 할 게 뭐 있나. 문제는 방법이었다. 방금 시도했던 그 미미한 기 모으기 한 번에 피를 토했다. 이 상태로는 무공 수련은커녕 걷는 것조차 위험할지도 몰랐다. 손을 짚고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데 무릎이 후들거려 다시 주저앉았다. 벽을 짚은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그런데도 뭔가 시도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자꾸 나를 다그쳤다. 살아야 했다. 죽었다가 겨우 다시 얻은 목숨을, 이번엔 제대로 지켜내야 했다.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한 채 천장을 노려보며 앞으로의 일을 정리해봤다. 첫째, 이 세계의 규칙을 최대한 빨리 파악할 것. 둘째, 형 임강과 정혼녀 이서연을 가까이하지 말 것. 셋째, 노의원의 진단이 정말 최종 판결인지 확인할 것. 그리고 넷째, 어떻게든 살아서 그 두 사람에게 되갚아줄 것. 넷을 다 되뇌고 나니 웃음이 나왔다. 계획이랍시고 세워놓은 게 죄다 막연하기 짝이 없었다. 뭘 어떻게 파악하고, 뭘 어떻게 확인하고, 뭘 어떻게 되갚아줄지 구체적인 방법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목표만 나열해놓은 셈이었는데, 그럼에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적어도 방향은 정해졌으니까. 창밖으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방 안 어딘가에서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가 묘하게 이 세계가 진짜라는 사실을 실감케 했다. 나는 손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아직 마르지 않은 피가 손금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있었다. 이 손금도 이제 내 것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헛웃음이 나왔다. 남의 몸, 남의 기억, 남의 원한까지 통째로 떠안은 채로, 나는 그렇게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아직 몰랐다. 바로 그날, 내가 선산으로 압송되는 마차에 실려 이 저택을 떠나게 될 것이며, 그 길 위에서 내 운명을 완전히 뒤바꿀 물건을 마주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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