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형님, 아직 안 죽었는데요

4화

선산은 이름 그대로 조상묘가 늘어선 산등성이였고, 내가 배정받은 거처는 그 초입에 있는 다 쓰러져가는 초옥 한 채였다. 가는 길에 이미 예감했다. 대충 봐도 사람 살 곳이 아니었으니까. 잡초가 허리까지 자란 오솔길을 지나 도착한 초옥은, 지붕도 아니고 벽도 아닌 뭔가 애매한 형태의 잔해였다. 문짝은 삐뚜름하게 걸려 있어서 열고 닫는 것조차 도박에 가까웠고, 마당이라 부를 만한 공간에는 잡초와 돌무더기가 반쯤 뒤섞여 있었다. 방 안에는 낡은 침상 하나와 이 빠진 소반이 전부였다. 벽 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고, 지붕 한쪽은 이미 주저앉아 하늘이 훤히 보였다. 비가 오면 그대로 물벼락을 맞을 구조였다. 시비들도 여기까지는 따라오지 않았다. 아마 이 근처에 발 들이는 것 자체가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곽복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짧고 명료했다. "삼 년이다. 그동안 여기서 죽든 살든 알아서 해." 그러고는 절뚝거리며 사라졌다. 죽든 살든 알아서 하라니, 참 다정한 유배지 브리핑 감사합니다. 이게 무슨 인턴 오리엔테이션도 아니고. 나는 그 뒷모습을 향해 속으로 육두문자를 몇 개 날리고, 곧 침상에 걸터앉았다.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행히 부서지진 않았다.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그 회백색 석물, 청운봉과 똑같이 생긴 그 진혼석에 대한 기억이 자꾸만 되살아났다. 원양이 회복되는 느낌, 등줄기의 소름, 그리고 저건 대체 뭔가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뱅뱅 돌았다.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뭔가 특별한 물건이었을까. 손끝에 남아있던 그 미묘한 온기의 잔상이 자꾸만 아른거려서, 나는 몇 번이나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했다. 확인이 필요했다. 그것도 지금 당장. 하지만 당장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고, 낯선 산속을 홀로 돌아다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결국 나는 그날 밤을 꼬박 뒤척이며 보냈다. 지붕 틈으로 별빛이 새어들었고, 벌레 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침 다음 날 오후, 예상 밖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 유천이었다. 나는 그가 문 앞에 서 있는 걸 보고 순간 몸이 굳었다. 이 산속까지 누가 찾아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까. 그의 손에는 작은 약침통이 들려 있었는데, 얼핏 봐도 손질이 오래된 물건이었다. "마지막 진맥이다." 그는 담담하게 말하며 내 손목을 잡았다. 느린 걸음걸이와 대조적으로 날카로운 눈빛이 내 얼굴을 훑었다. "족장님 명이다. 유배지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정도는 기록해야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라니. 참 따뜻한 배려 감사합니다. 나는 속으로 욕을 삼키며 겉으로는 얌전히 손목을 내밀었다. 그의 손가락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했지만, 맥문을 짚는 손끝은 놀랄 만큼 정확하고 섬세했다. 오랜 세월 수많은 환자를 봐온 손이라는 게 느껴졌다. 침묵이 흘렀다. 유천은 눈을 감고 뭔가에 집중하는 듯했고, 나는 그 옆에서 숨소리를 최대한 낮추며 기회를 엿봤다. 지금 아니면 다시 물어볼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손가락이 맥문을 짚는 동안,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르신, 여쭐 게 있습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지만 애써 억눌렀다. "이 산 조상묘 구역에 있는 석물 중에, 산봉우리 모양으로 조각된 게 있던데. 그게 뭔지 아십니까?" 유천의 손가락이 순간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느꼈다. 그 정지의 무게를. 마치 시간이 통째로 얼어붙은 것 같은 그 짧은 틈, 그의 표정에서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뭔가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어디서 봤느냐."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낮아진 목소리 톤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건 그냥 넘어갈 질문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오는 길에 넘어지면서 손이 닿았습니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답했다. 심장이 쿵쿵 뛰는 걸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통증이 아니라 뭔가 따뜻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유천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고, 짧은 탄식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 탄식은 마치 오래된 기억을 마주한 사람의 것 같았다. "그건... 아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뭔가 알고 있다는 얘기잖아, 지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몸속 어딘가에서 흥분과 불안이 동시에 치솟았지만, 나는 표정을 관리하며 다시 물었다. "단순한 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정적이 흘렀다. 유천의 시선이 잠깐 방 밖을 향했다가, 다시 나를 향했다. "진혼석이다." 유천이 결국 짧게 답했다. "오래전, 이 족의 선조 중 하나가 만들었다는 물건이다. 그 이상은 나도 모른다. 다만..." 그가 말을 끌었다. "함부로 손댈 물건이 아니라는 것만은 안다." 진혼석. 이름부터 뭔가 묘하게 무게감이 있었다. 죽은 이의 영혼을 진정시키는 돌이라는 뜻일까. 그렇다면 왜 그게 나한테 이런 반응을 일으키는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의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맥을 마쳤다는 말도, 결과가 어떻다는 말도 없었다. 그저 손목을 놔주고 몸을 일으키는 동작 하나로 대화가 끝났다는 걸 알렸다. 방문을 나서기 직전, 그가 문득 뒤돌아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뭔가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는데, 나는 그게 동정인지, 경계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네가 살아남는다면, 그건 저 돌 때문일지도 모르겠구나."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조심해라. 무엇이든 대가 없이 얻는 법은 없다." 그 말을 남기고 유천은 절뚝거림 없는 걸음으로 사라졌다. 절뚝거림 없는 걸음. 나는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가 올 때는 분명 다리를 절었었는데, 갈 때는 그렇지 않았다는 걸. 착각인가, 아니면 그저 내가 놓친 세부사항인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었다. 대가 없이 얻는 법은 없다. 그 문장이 머릿속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그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밥을 먹으면서도, 침상에 누워서도, 심지어 벽 틈으로 새어드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문장이 계속 반복 재생됐다. 대가라니. 대체 무슨 대가를 말하는 걸까. 지금까지 나한테서 뭘 더 빼앗을 수 있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양도 텅 비었고, 몸은 이미 반쯤 망가진 상태인데, 여기서 더 잃을 게 남아 있나? 그날 밤, 나는 초옥을 빠져나와 다시 조상묘 구역으로 향했다. 낡은 문짝을 조심스레 밀고 나서니, 서늘한 밤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달빛이 희미했지만 어제 낮에 봤던 그 석물의 위치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청운봉의 능선, 정상부가 왼쪽으로 기울어진 그 형상.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른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조상묘 구역 특유의 서늘한 정적이 사방을 감쌌고, 이따금 부엉이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솔직히 무섭지 않았다고는 말 못 하겠다. 이런 밤중에 산속을 혼자 돌아다니는 건 어느 시대, 어느 세계에서든 미친 짓이니까. 그 석물 앞에 도착했을 때,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낮에 봤던 그 형상 그대로였다. 정상부가 살짝 기울어진 봉우리 모양, 표면의 결마저 청운봉과 똑같았다. 손을 뻗었다. 손바닥이 다시 그 차가운 표면에 닿았다. 이번엔 확실하게 느껴졌다. 텅 비어 있던 단전 안쪽, 아주 작은 씨앗 같은 온기가 다시 피어올랐다. 눈을 감고 그 감각에 집중하자, 온기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처음엔 촛불 심지만 하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미친다. 이거 진짜네.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며칠 전 기 모으기를 시도했다가 피를 토했던 그 참혹한 실패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그때는 몸이 나를 배신했지만, 지금은 몸이 조금씩 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가 마치 실낱같은 물줄기처럼 단전으로 흘러들었고, 그 감각이 반복될수록 점점 뚜렷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거 뭐지. 진짜 뭐지 이거.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며 그 감각에 몰두했다. 온기가 단전 안쪽에서 작은 원을 그리듯 맴돌았고, 나는 그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정신을 집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그저 이 낯설고도 반가운 감각에 흠뻑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등 뒤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숨이 막혔다. 나는 재빨리 손을 떼고 몸을 낮췄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바닥은 여전히 그 온기의 잔상을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누군가 이 산속을, 이 시간에, 나처럼 배회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돋았다. 이 야밤에, 조상묘 구역 한복판에서, 나 말고 또 누가 여기를 어슬렁거린단 말인가. 유배당한 죄인이 산속을 배회하는 것도 이상한데, 다른 누군가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면 그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달빛 아래 흐릿하게 보이는 그림자는 사람의 형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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