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 나는 창고 밖으로 나가 성 외곽의 시장통을 걸었다. 밤새 딱딱한 나무 바닥에서 자느라 허리가 뻐근했다. 판정 불가에게 왕실이 챙겨주는 건 딱 하나, 이 도시에서 나가지 못하게 막는 감시병 몇 명뿐이었다. 밥은 알아서 먹으라는 뜻이었다. 참 친절한 나라다.
시장통은 아침부터 활기가 넘쳤다. 빵 굽는 냄새, 말린 약초 냄새, 어디선가 풍기는 짐승 가죽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배가 고팠지만 지갑 사정을 생각하면 그냥 냄새로 배를 채우는 게 맞았다. 은화 한 닢도 없는 판정 불가에게 이 냄새는 사치였다.
모험가 길드는 시장 한복판에 있었다. 낡은 목조 건물이었지만 안은 사람으로 붐볐다. 갑옷을 걸친 사람, 지팡이를 든 사람, 짐꾼처럼 보이는 사람까지 온갖 부류가 섞여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나는 문을 열자마자 벽에 붙은 게시판을 봤다. 의뢰서가 색깔별로 나뉘어 있었다. 흰색은 잡초 제거, 초록은 저랭크 마물 사냥, 파란색은 그 위. 붉은색은 아예 근처에 붙어 있지도 않았다. 붉은색 의뢰는 아마 이런 목조 건물 게시판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물건일 거였다.
접수대에는 젊은 여자 접수원이 앉아 있었다. 친절한 인상이었지만 나는 이미 이 세계 사람들의 친절이 공짜가 아니라는 걸 배운 뒤였다. 웃는 얼굴 뒤에 계산기가 있다는 것쯤은 눈치로 알 수 있었다.
"등록하시려고요? 신분 확인부터 할게요."
"판정 불가인데, 그래도 등록 되나요?"
접수원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가 다시 평온해졌다. 익숙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이 도시에 판정 불가가 나 하나만은 아닐 테니까.
"판정과 등록은 별개예요. 다만 지원금은 없고, 등급 배정은 실전 심사로 대신하게 될 거예요."
"실전 심사요?"
"간단한 초록 등급 의뢰 하나 따라가서 얼마나 버티는지 보는 거죠. 안 죽으면 F급, 죽으면 없는 거고요."
웃으라고 한 말인지 진심인지 구분이 안 됐다. 표정은 웃고 있는데 말투는 서류 낭독하듯 무미건조했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항의해봤자 바뀌는 건 없을 테니까.
"마물 랭크는 어떻게 나뉘는데요?"
"E부터 S까지요. E는 슬라임류, D는 고블린류, C부터는 파티 단위로 움직여야 하고요. B 이상은 국가에서 관리해요."
"S급은요?"
"S급은... 마주치면 그냥 도망치세요. 저희도 본 적 없어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되는 대답이 또 나왔다. 이 세계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습관인 모양이었다.
"저는 뭐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E급 사냥이나 D급 던전 잡초 뽑기 정도요. 오늘 마침 파트너가 필요한 의뢰가 있는데, 혼자 가시는 것보단 안전하니까요."
"혼자 가면 위험해요?"
"판정 불가는 자기 마력 속성도 모르잖아요. 무슨 일이 생겨도 대처법이 없다는 뜻이죠."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그 파트너라는 게 서준혁이었다.
덩치가 크고 팔뚝이 내 허리만 한 남자였다. 나이는 나보다 몇 살 위로 보였는데, 접수원 말로는 노동 출신 모험가라고 했다. 마법은 못 쓰지만 근력만으로 D급까지 올라온 케이스라나. 얼굴은 볕에 그을려 까맸고, 손등에는 오래된 흉터가 몇 개나 있었다. 저 손으로 도끼를 몇 번이나 휘둘렀을지 짐작도 안 갔다.
"판정 불가라고? 흠, 재밌네."
그가 나를 훑어보며 씩 웃었다. 비웃는 건지 반가운 건지 구분이 안 되는 웃음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훑는 시선이 딱히 기분 좋지는 않았지만, 여기서 눈싸움할 처지도 아니었다.
"오늘 의뢰는 폐광에 낀 슬라임 청소야. E급이니까 걱정 마. 슬라임은 그냥 젤리 덩어리라 보면 돼."
"위험하진 않은 거죠?"
"위험하면 E급이겠냐. 심심할까 봐 걱정해야 할 정도지."
"보상은요?"
"은화 다섯 개. 반씩 나누면 두 개 반이지."
"칠 대 삼으로 하죠. 제가 초짜니까."
"어이, 그럴 거면 왜 육 대 사가 아니고 칠 대 삼이야?"
"제가 초짜인 값 치고는 후한 거예요."
"이게 뭔 논리야. 초짜니까 덜 받아야지, 왜 더 받으려고 해."
"초짜라 뭘 할지 몰라서 위험을 더 감수하는 거잖아요. 위험수당이죠."
서준혁이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결국 육 대 사에서 합의를 봤다. 나쁘지 않은 흥정이었다. 판정 불가라고 밥도 못 얻어먹는 처지에, 이 정도 흥정력이라도 있는 게 다행이었다.
폐광은 성 밖으로 걸어서 한 시간 거리였다. 걷는 동안 서준혁은 이런저런 걸 알려줬다. 마물은 핵을 부수면 죽는다는 것, 슬라임 핵은 몸통 중앙에 있다는 것, 무기가 없으면 신체 강화라도 배워야 한다는 것.
"신체강화요? 그거 어떻게 배워요?"
"속성 있는 애들은 마력을 밀어내는 식으로 몸을 강화해. 판정 불가는 좀 다르지만... 뭐, 감으로 하는 애들도 있어."
"감으로 하는 애들은 성공률이 어느 정도예요?"
"글쎄, 열에 하나? 나머지 아홉은 그냥 다치거나 죽지."
기분 좋은 확률은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아홉 죽고 하나 산다면, 그 하나가 나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런 계산이 무의미하다는 건 알면서도 자꾸 손가락이 접혔다.
"판정 불가는 원래 이렇게 많아요?"
"많진 않지. 근데 왕국 크니까 몇 명은 꼭 나와. 다들 너처럼 창고 신세지 뭐."
"창고 신세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요?"
"운 좋으면 나처럼 모험가 하고, 운 없으면 노예 시장 가고."
노예 시장이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왔는데 서준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감으로. 나는 어제 밤 그 마물을 튕겨낸 순간을 떠올렸다. 그건 배운 게 아니라 그냥 튀어나온 것이었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그 다행이 언제까지 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폐광 입구는 어두웠고 습기가 찼다. 습한 공기가 옷 속으로 스며들어 목덜미가 서늘했다. 서준혁이 램프에 불을 붙이며 앞장섰다. 불빛이 벽을 핥으며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소문으로는 여기 슬라임이 몇 마리 정도밖에 안 된대. 접수처 말로는 세 마리 확인됐다더라."
"그럼 우리 둘로도 충분하겠네요."
"당연하지. E급이잖아."
그 말에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접수원이 건넨 정보가 세 마리라는 숫자까지 정확하다고 믿었다.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게 바로 그런 순진한 믿음이라는 걸, 나는 그때까진 몰랐다.
갱도 안쪽으로 삼십 분쯤 걸었을 때, 첫 번째 슬라임을 만났다. 서준혁 말대로 그냥 젤리 덩어리였다. 흐물흐물하게 바닥에 붙어 있다가 우리 발소리에 반응해 꿈틀거렸다. 그가 도끼로 한 번 내리치자 핵이 터지며 그대로 녹아버렸다. 퍽, 소리와 함께 바닥에 끈적한 자국만 남았다.
"봤지? 별거 없다니까."
두 번째, 세 번째도 비슷했다. 나는 아직 손도 안 댔는데 서준혁이 혼자 처리했다. 도끼질 세 번, 슬라임 세 마리. 계산이 딱 맞아떨어져서 오히려 김이 빠졌다.
"이럴 거면 저는 왜 데려왔어요?"
"혼자 오면 심심하잖냐."
"진짜 이유는요?"
"진짜 이유는... 접수처에서 등급 심사 대상이면 무조건 파트너 붙이라고 규칙이 있어서야. 나도 은화 두 개 벌자고 나온 거지."
그 말이 사실이라면 세상에서 제일 여유로운 모험가일 거고, 사실이 아니라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였다. 어느 쪽이든 지금 당장은 상관없는 문제였다.
갱도 끝, 막다른 방에 도착했을 때였다. 서준혁의 램프 불빛이 벽에 비친 뭔가에 걸렸다.
거대한 그림자였다. 슬라임 크기가 아니었다.
내 눈이 먼저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그림자가 그렇게 크게 늘어질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서준혁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고 처음으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이거... 접수처에서 말한 세 마리가 아닌데."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벽을 긁는 소리가 갱도 전체를 울렸다. 쩌억, 쩌억. 돌바닥에 뭔가가 끌리는 소리가 뒤이었다.
"준혁 씨, 저거 슬라임 맞아요?"
서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끼를 고쳐 쥐는 손에서 이미 답이 나오고 있었다. 손등에 핏줄이 툭 불거지는 걸 보면서, 나는 이 흥정이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