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0등급 판정, 무속성 최강

3화

그림자가 완전히 시야에 들어왔을 때, 나는 슬라임이라는 단어를 다시는 함부로 쓰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몸통은 사람 세 명을 합친 크기였고, 표면은 진득한 검은색이었다. 흡사 타르를 녹여서 그대로 굳혀놓은 것 같았는데, 그 표면 위로 뭔가가 계속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마치 몸속에서 뭔가가 헤엄치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눈에 해당할 만한 부위가 없었는데도 그것이 우리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선이라는 게 원래 눈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나. 저건 몸 전체가 눈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블랙 젤라틴." 서준혁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게 뭔데요?" "슬라임 상위종. C급 던전에서나 나오는 놈이야. 여기서 왜 이게..." C급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접수원의 말을 되짚었다. 이곳은 E급 의뢰였다. 게시판에 붙어 있던 그 종이 한 장, 슬라임 세 마리, 최하급 난이도, 초보자도 가능. E급 던전에 C급 마물이 있다는 건 정보가 틀렸다는 뜻이고, 정보가 틀렸다는 건 누군가 실수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우리에게 진짜 위험도를 안 알려줬다는 뜻이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나한테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놈, 속도가 느려. 갱도 밖까지만 나가면 승산 있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은 덩어리가 벽을 타고 튀어 올랐다. 느리다던 말이 무색하게 빠른 움직임이었다. 벽을 타는데 미끄러지지도 않고, 마치 벽이 원래 바닥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거짓말쟁이!" 소리를 지를 여유는 있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으니까. 머리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다리가 이미 반대 방향으로 꺾이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인간의 생존 본능이라는 게 나름 쓸모가 있긴 있구나 싶었다. 나는 옆으로 몸을 굴렸다. 흙바닥에 팔꿈치가 긁혀 얇게 피가 배어 나왔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콰앙, 하는 소리가 났다. 젤라틴이 방금 내가 있던 자리를 후려친 소리였다. 바닥이 움푹 꺼져 있었다. 저게 사람 몸이었으면 지금쯤 형체도 안 남았을 거였다. 서준혁이 도끼를 휘둘렀지만 표면에 튕겨 나갔다. 쨍, 하는 금속성 소리와 함께 도끼날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빗겨나갔다. 물리 공격이 잘 안 먹히는 종류인 모양이었다. "핵! 핵이 어디 있어요?" "모르지! 저건 몸속 어디든 핵이 옮겨 다니는 놈이야!" 정보가 이 지경이면 아예 안 알려준 것보다 나쁜 거였다. 알려는 줬는데 쓸모가 없는 정보. 최악의 조합.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뛰어드는 게 더 나았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기대는 안 했을 테니까. 나는 벽에 등을 붙이고 숨을 골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목구멍 안쪽이 바짝 말라 있었다. 손끝이 시렸다. 어제 그 마물을 튕겨낼 때와 같은 감각이 몸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감각이 반갑다기보다는 불길했다. 대체 내 몸에 무슨 짓을 해놓은 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젤라틴이 다시 덤벼왔다. 이번엔 서준혁이 아니라 나를 향해서. 피할 틈이 없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고, 놈의 몸통이 이미 내 시야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딴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그냥 몸이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것 같았다. 쩌엉. 충격이 팔을 타고 어깨까지 울렸다. 뒤로 몇 미터 밀려났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발바닥이 흙을 파고들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팔뚝의 피부가 벌겋게 부어올랐지만 부러지지는 않았다. 뼈가 시큰거리는 정도였지 부서지는 소리는 없었다. 멀쩡하다는 게 이상했다. 사람 팔뚝으로 저 정도 충격을 받아내고 이 정도로 끝난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젤라틴이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마치 이게 뭐지,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 마음, 나도 똑같이 들고 있었다. 서준혁의 눈이 나를 향했다. 그 눈빛에서 나는 뭔가 읽었다. 놀람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마치 뭔가를 기대했다가 확인한 사람의 눈빛. 처음 보는 표정은 아니었다. 어제도 비슷한 눈으로 나를 본 적이 있었다. "너... 판정 불가 아니었어?" "저도 처음 알았어요, 이거!"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완전히 처음은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지금 그걸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어제 있었던 일을 이 남자한테 아직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느껴졌다. "핵 위치가 잡혔어! 지금 오른쪽 아래!" 서준혁이 소리쳤다. 그 순간 그의 시선이 젤라틴의 몸통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점을 정확히 짚었다. 나는 그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확실히 있었다, 검은 표면 아래로 은은하게 어른거리는 빛 하나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설명은 나중에! 지금 쳐!" 따질 틈이 없었다. 나는 다리에 힘을 모아 앞으로 튀어 나갔다. 몸이 평소보다 몇 배는 가볍게 느껴졌다. 마치 누가 등을 밀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팔을 뻗어 그 빛나는 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갔다. 퍼억. 손이 뭔가를 뭉개는 감각과 동시에 젤라틴 전체가 부풀어 올랐다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검은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옷에도, 얼굴에도 튀었는데 냄새는 생각보다 역하지 않았다. 오히려 흙냄새 같은 비릿한 냄새였다.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손끝이 아직도 저릿거렸고, 팔뚝에 남은 붉은 자국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서준혁이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살았네." "살았네요, 라니. 방금 그 정보는 뭐였어요? 핵 위치를 어떻게 안 거예요?" 서준혁은 잠깐 침묵했다. 그 짧은 침묵이 아까보다 더 신경 쓰였다. 도끼가 튕겨나가고 코어 위치를 모른다고 소리치던 사람이, 갑자기 정확한 좌표를 짚어낸다는 게 말이 되나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감이야, 감. 오래 하면 보여." 감이라는 단어가 벌써 두 번째로 나오고 있었다. 첫 번째는 신체강화를 배우는 방법이었고, 두 번째는 상위종 마물의 핵 위치였다. 이 남자의 감이라는 게 너무 편리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세상에 그렇게 만능인 감이 어디 있나. 있으면 나도 하나 사고 싶었다. "준혁 씨, 이 의뢰 정보 접수처에서 세 마리라고 했잖아요. 근데 실제로는 이 상위종까지 있었어요. 이거 원래 알고 있었어요?" 서준혁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아주 짧게, 그러나 분명히. 눈꺼풀이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도 나는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몰랐어." 대답이 한 박자 느리게 나왔다. 나는 그 한 박자를 놓치지 않았다. 대답이 늦게 나온다는 건, 대답을 고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진짜로 몰랐다면 즉답이 나왔어야 정상이었다. "진짜 몰랐어요?" "몰랐다니까. 왜 이렇게 캐물어." "방금 코어 위치를 정확하게 맞췄잖아요. 그것도 감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 감이 좀 의심스러운데요." "의심스러우면 어쩔 건데. 지금 살아 나온 게 중요한 거 아니야?" 그 말도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맞는 말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사람 특유의 말투였으니까. 갱도 밖으로 걸어 나오는 동안 나는 말없이 서준혁의 뒤통수를 봤다. 그의 걸음걸이는 여전히 태연했지만, 그 태연함이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어제까지는 그냥 여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여유가 뭔가를 감추고 있는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이 남자, 뭔가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상한 게 많았다. 초보자용 던전에 상위종 마물이 있었고, 그걸 상대로 코어 위치를 감으로 맞추는 사람이 있었고, 판정 불가라던 내 몸이 알아서 방어를 해냈다. 우연이 세 번이나 겹치면 그건 우연이 아니라 그냥 누군가가 설계한 판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성문 앞에서 낯선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화려한 로브. 저 멀리서도 눈에 띄는 자수가 소매 끝까지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어제 감별식에서 봤던 그 마도사가, 이번엔 성문 앞에 직접 나와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서준혁도 멈춰 섰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방금 갱도 안에서 느꼈던 위기감보다 더 서늘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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