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최하층 슬라임 셰프

2화

다음 날 아침,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 협회 홈페이지의 던전 등급표를 삼십 분째 들여다보고 있었다. 스크롤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같은 화면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는지 모른다. B1부터 B3까지, 최하층이라 불리는 세 개 층. 몬스터는 전부 슬라임류였고, 채집물 시세는 전부 '거래 불가' 혹은 '0원 근사치'로 표기돼 있었다. 협회 마켓에 등록된 최근 일 년간 최하층 슬라임 채집물 거래 건수는 정확히 영 건이었다. 영 건. 단 한 건도 없었다. 혹시 오타가 아닐까 싶어서 새로고침을 세 번이나 했다. 결과는 똑같았다. 영, 영, 영. 그런데 나는 채취 S등급이라는 결과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뭔가 웃기지 않나. 재능은 최상급인데 그 재능을 쓸 수 있는 무대는 아무도 발 들이지 않는 폐허라는 게. 마치 세계 최고의 셰프한테 재료로 흙탕물만 던져주는 꼴이었다. ······씨발, 이거 완전 재능 낭비 아니냐. 혼자 중얼거리다가도 헛웃음이 났다. 어쨌든 이거라도 있으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F등급 헌터한테 S등급 재능이라니, 이 정도면 인생이 나를 완전히 버린 건 아니라는 증거 아닌가.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도 시작은 해봐야지." 서아가 전화기 너머에서 말했다. 목소리에 잠이 덜 깬 기색이 묻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할 말은 다 하는 사람이었다. "장비는 있어?" "없어." "그럼 사야지, 뭐 하고 있어." 그녀의 말투는 언제나처럼 무심했지만, 그 밑에 은근한 채근이 깔려 있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장비.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슬라임 하나 잡는 데 무슨 장비가 필요하겠냐 싶었는데, 검색을 해보니 채집용 나이프부터 시작해서 보관용기, 방수 장비, 안전벨트까지 리스트가 끝도 없이 나왔다. 그것도 전부 최소 등급부터 시작하는 견적이었다. 나는 그날 오후 통장을 확인했다. 열여섯 살이 모을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되겠나 싶었는데, 세뱃돈이랑 용돈을 안 쓰고 모은 게 삼십칠만 원, 방학 동안 편의점에서 알바한 돈까지 합치니 정확히 육십만 삼천 원이 나왔다. 전 재산이었다. 통장 잔액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혹시나 숫자가 바뀌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였지만, 육십만 삼천 원은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이 돈을 채집용 나이프, 냉동 보관용 밀폐용기 세트, 방수 장갑, 그리고 초보자용 안전 벨트에 몰빵하기로 결심했다. 통장 하나 들고 장비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그렇게 무거울 줄은 몰랐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처럼, 나는 내 전 재산을 손에 꼭 쥐고 버스에 올랐다. 장비점은 시내 외곽의 낡은 상가 이층에 있었다. 간판도 절반쯤 떨어져 나가 있었고, 계단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종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고, 카운터 안쪽에서 사장님이 고개를 들었다. "뭐 찾으시나요?" "채집용 장비 좀 보려고요." 장비점 사장님은 내가 고른 목록을 훑어보고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슬라임 채집하려고?" "네." "요즘 그거 채집하는 애들 진짜 없는데." 그가 계산기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뭐, 취미면 상관없지." 취미. 그 단어가 귀에 걸렸다. 취미라니. 나는 이게 내 인생을 걸 유일한 무기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남이 보기엔 그냥 심심풀이 소일거리였던 거다. 씁쓸했지만 뭐라 반박할 말도 없었다. 나는 결제창에 뜬 숫자를 보고 잠깐 숨이 막혔다. 오십구만 팔천 원. 내 전 재산이 거의 통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카드도 없고 계좌 이체도 처음이라 사장님이 옆에서 하나하나 알려줬는데, 확인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이거 누르면 진짜 끝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눌렀다. 통장 잔액이 오천원으로 바뀌는 걸 보고 나는 잠깐 현실감을 잃었다. 오천원. 이걸로 뭘 할 수 있지? 아이스크림 하나도 못 사는 돈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무거운 장비 가방을 어깨에 메고 걸으면서 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이게 맞는 선택이었을까. 열여섯 살짜리가 전 재산을 몬스터도 아니고 슬라임 채집에 쏟아붓는 게 정상적인 판단인가.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은 들떠 있었다. 처음으로 뭔가를 시작한다는 감각, 그게 나를 조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느낌이었다. 다음 날, 처음으로 B1층 게이트 앞에 섰다. 게이트는 낡은 철제 아치 모양이었고, 그 주변에는 관리인 한 명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른 헌터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게이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게 오히려 을씨년스러웠다. 관리인이 내 등록증을 스캔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F등급 신입이네. 최하층만 되니까 딴 데 가지 마." "네, 알아요." 나는 대답하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첫 던전이라는 사실이 어쨌든 실감이 났다. 안쪽은 습하고 어두운 동굴이었는데, 예상과 달리 위험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벽에는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고,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 사이로 젤리처럼 흐물흐물한 슬라임 몇 마리가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임이 너무 느려서 위협적이라는 생각조차 안 들 정도였다. 이게 몬스터인가, 아니면 그냥 살아있는 물풍선인가 헷갈릴 지경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나이프로 슬라임의 겉면을 살짝 갈라냈는데, 놀랍게도 손끝에 뭔가 미묘한 감각이 전해졌다. 이건 좋은 부위다, 이건 아니다, 라는 느낌이 마치 데이터처럼 손끝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마치 누군가 내 머릿속에 정보를 직접 입력해주는 것 같았다. 이게 채취 S등급이라는 건가. 나는 그 감각에 완전히 몰입해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슬라임 하나를 갈라내고, 좋은 부위와 나쁜 부위를 구분해서 나이프로 정교하게 도려내고, 밀폐용기에 담고, 다음 슬라임으로 넘어가고. 손이 저절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날 총 열두 개의 슬라임 젤리를 채집했고, 밀폐용기에 나눠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가방 속 밀폐용기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혹시 상했을까 봐, 혹시 새서 옆으로 흘렀을까 봐. 다행히 열두 개 모두 무사했다. 나는 뿌듯한 기분으로 집에 도착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협회 마켓에 판매 등록을 하려고 했더니, 시스템이 나를 계속 튕겨냈다. [등록 실패: 해당 등급 채집물의 기준 시세 정보 없음.] 세 번을 다시 시도해도 같은 메시지였다. 나는 화면을 노려보면서 몇 번이나 새로고침을 눌렀다. 혹시 내가 뭔가 잘못 입력한 건 아닐까 싶어서 등급, 채집 시간, 보관 상태까지 하나하나 다시 확인했다. 전부 정확했다.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이 채집물 자체가 시장에서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나는 개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헐값으로 직거래 글을 올렸다. 제목도 최대한 매력적으로 써보려고 애썼다. [B1 슬라임 젤리 직거래, 신선함 보장, 저렴하게 드림] 이라고. 조회수는 반나절 만에 삼백을 넘었지만 댓글은 딱 하나였다. [익명] 최하층 슬라임 누가 사냐 ㅋㅋㅋ 그거 그냥 물젤리인데 나는 그 댓글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물젤리. 정확한 표현이었다. 나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 밑에 대댓글이 하나 더 달렸는지 확인했지만 없었다. 조회수 삼백에 댓글 하나. 그마저도 비웃음이었다. 결국 아무도 사지 않았다. 나는 사장님한테 몰빵했던 육십만 원과, 처음으로 채집한 열두 개의 슬라임 젤리를 앞에 두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디에 보관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로 일단 냉동실 구석에 밀어 넣었다. 밀폐용기 열두 개가 냉동실 한 켠을 완전히 점령했다. 어머니가 보면 이게 다 뭐냐고 물으실 게 뻔해서, 나는 김치통 뒤쪽 구석에 최대한 안 보이게 밀어 넣었다. "불운은 성실함을 배신했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오늘 하루를 곱씹었다. 전 재산을 걸고 시작한 첫 도전이,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완벽하게 망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오십구만 팔천 원. 열두 개의 슬라임 젤리. 조회수 삼백. 댓글 하나. 숫자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냥 F등급인 게 아니라, 뭘 해도 결과가 최악으로 꼬이는 어떤 저주 같은 게 씌워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가, 나는 그 생각을 피식 웃어넘기며 눈을 감았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그냥 운이 좀 없었던 거야.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다독이며 잠을 청했다. 내일은 다시 슬라임 열 마리쯤 더 잡으러 가야겠다. 어차피 다른 할 일도 없으니까. 이 채집물이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으면서,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나는 아직 몰랐다, 그 냉동실 구석에 처박아둔 슬라임 젤리 중 하나가 며칠 뒤 내 인생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놓을 거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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