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최하층 슬라임 셰프

4화

서아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이나 일찍 우리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그냥 편한 운동복 차림으로 문 앞에 서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눈빛에 이상한 기대감이 스쳤다. 뭔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기다리는 얼굴, 딱 그거였다. "그래서, 뭔데." 그녀가 신발을 벗으며 물었다. 목소리에는 벌써부터 반쯤 흥미와 반쯤 의심이 섞여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냉동실을 열어 밀폐용기 두 개를 꺼내 도마 위에 나란히 놓았다. 손끝이 살짝 시렸다. 하나는 흰 줄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진 슬라임 젤리였고, 다른 하나는 그냥 평범한 하늘색이었다. "이 둘이 겉보기엔 그냥 다 슬라임 젤리인데." 나는 칼을 들며 설명을 시작했다.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살짝 떨렸다. "한쪽에만 이 무늬가 생겨. 그리고 이게 있는 쪽만 맛이랑 식감이 완전히 달라." 서아는 무늬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팔짱을 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마치 이게 무슨 사기극이 아닐까 재는 듯한 표정으로. "그게 왜 다른데?" "그걸 몰라서 너한테 보여주는 거야." 나는 그 자리에서 두 개를 각각 냄비에 넣고 끓였다. 부엌에 두 개의 냄비가 나란히 올려지고, 가스불 소리가 치익 하고 낮게 울리는 동안, 김이 올라오면서 향이 서로 다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흰 줄무늬 쪽에서는 은근한 감칠맛의 향이, 마치 어디선가 맡아본 적 있는 육수 냄새 같은 게 올라왔고, 반대쪽에서는 그냥 밍밍한 물비린내가 났다. 서아는 코를 킁킁거리다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어, 이거 냄새부터 다른데." "그렇지." 나는 짧게 대답했다.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기 시작했다. 국자로 각각 조금씩 떠서 그녀에게 건넸다. 서아는 먼저 평범한 쪽을 맛보고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흰 줄무늬 쪽을 입에 넣는 순간 눈썹이 확 올라갔다. "뭐야 이거." 그녀가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완전 다른 음식이잖아. 이거 무슨 조미료 넣은 거 아니야?" "아무것도 안 넣었어. 진짜 그냥 그거야." "그럼 이게 우연이 아니라는 거네." 서아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봤다.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확실해?" "그걸 확인하려고 너 부른 거야." 나는 그동안 적어둔 노트를 펼쳐 보여줬다. 채집 날짜, 보관 기간, 무늬 발생 여부, 맛 평가까지 표로 정리해둔 것이었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만든 자료였는데, 막상 서아 앞에 내놓으니 손바닥에 땀이 났다. 서아는 그걸 한 줄 한 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읽었다. 침묵이 부엌을 채웠다.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만 웅웅 울렸다. 한참 뒤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거 하나로는 확신 못 해. 표본이 너무 적어."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 "더 많이 채집해서, 더 많이 비교해봐야지." 그녀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조건도 통제해야 되고. 채집 시간, 보관 온도, 다 똑같이 맞춰서. 안 그러면 나중에 딴 사람들이 우연이라고 딴지 걸어." 서아의 이런 냉정한 태도가 오히려 든든했다. 감정적으로 흥분해서 맞다 아니다 떠드는 것보다는, 이렇게 하나씩 조건을 잡아가며 확인하는 게 맞는 방향이었다. 나 혼자였으면 그냥 신났다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을 텐데, 서아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검증 실험을 시작했다. 매일 같은 시간, 오전 열 시 정각에 B1층에 들어가 슬라임을 채집했다. 채집할 때 손끝에 저릿한 감각이 느껴지는 개체와 아무 느낌 없는 개체를 각각 표시해서 따로 보관했다. 밀폐용기마다 매직으로 번호를 써넣었고, 채집 시간과 냉동 시작 시간을 노트에 정확히 기록했다. 손목이 아플 정도로 매일 같은 동작을 반복했지만 이상하게 지겹지 않았다. 첫째 날. 저릿한 감각이 있던 개체 다섯 개 중 나흘 뒤 무늬가 나타난 건 네 개였다. 둘째 날. 저릿한 감각이 있던 개체 여섯 개 중 나흘 뒤 무늬가 나타난 건 다섯 개였다. 셋째 날, 넷째 날. 비율은 계속 비슷하게 유지됐다. 반면 아무 느낌 없이 채집한 개체들은 이십여 개 중 무늬가 나타난 게 딱 하나뿐이었다. 그 하나조차 자세히 보면 무늬가 흐릿하고 불완전했다. 숫자가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완전한 우연이 아니라, 내 감각이 어떤 기준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증거였다. 채취 S등급이라는 판정이 그냥 종이 위의 숫자가 아니라, 진짜로 내 손끝에 살아 있는 능력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쭉 올라왔다. "이 정도면 확실하네." 서아가 내 노트를 다시 훑어보며 말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이 점점 빨라졌다. 그녀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순수한 놀라움이 보였다. "너 이거 진짜 대단한 거 발견한 거야, 도윤아." "근데 이걸로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어."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이 부분이 제일 답답했다. "팔아도 아무도 안 사고, 협회 마켓도 등록이 안 돼. 그냥 냉동실만 계속 채워지고 있어." "그럼 팔지 말고 보여줘." 서아가 말했다. 뭔가 당연한 걸 왜 이제 생각하냐는 투였다. "영상으로. 먹는 거 보여주면서, 이게 왜 다른지 설명하는 거야. 요즘 그런 거 잘 되잖아. 신기한 거 먹방, 실험 브이로그, 그런 거." 영상이라니. 나는 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살아오면서 카메라 앞에 서본 적도 거의 없는 내가 뭘 찍는다는 게 상상이 잘 안 됐다. 그런데 듬듬이 생각해보니 나쁜 방법은 아니었다. 어차피 마켓에서 팔 수 없다면, 사람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관심을 끄는 게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었다. "근데 나 카메라 앞에서 말 잘 못하는데." 내가 우물쭈물 말하자 서아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냥 하는 거야. 말 잘하고 못하고가 뭐가 중요해. 신기하면 사람들이 봐." 그날 밤, 나는 낡은 스마트폰 삼각대를 인터넷 최저가로 주문했다. 배송비까지 더해 육천 원짜리였는데, 결제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남은 통장 잔고는 이제 사만 이천 원. 이 돈으로 뭔가를 시작한다는 게 무모하게 느껴졌지만, 동시에 처음으로 뭔가 될 것 같다는 이상한 확신이 가슴 안쪽에서 꿈틀거렸다. 마치 오랫동안 꺼져 있던 불씨가 다시 붙는 느낌이었다. 어머니는 그날 밤 냉동실을 열어보다가 밀폐용기가 잔뜩 쌓여 있는 걸 발견하고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냉동실 문을 붙잡은 채로 한동안 말없이 안을 들여다보시던 어머니는, 내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게 다 뭐니?" "실험 재료요." 나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정확히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두루뭉술하게 넘겼다. 어머니는 더 캐묻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 눈빛 속에 옛날 아버지가 뭔가에 몰두하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아서 나는 얼른 눈길을 돌렸다. 뭔가 말을 더 할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결국 냉동실 문을 조용히 닫으시고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 뒷모습에서 걱정과 안도가 반씩 섞인 무언가가 느껴졌다. 나는 아직 몰랐다, 이 삼각대 하나가 며칠 뒤 나를 커뮤니티 전체의 화제로 밀어 올릴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화제가 얼마나 감당하기 힘든 방향으로 굴러갈지도, 이때의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