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최하층 슬라임 셰프

3화

냉동실에 슬라임 젤리를 처박아둔 지 딱 나흘째 되던 날, 나는 그것들을 다 버릴까 잠깐 고민했다. 어차피 팔리지도 않는데 냉동실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니 어머니 눈치도 보였고, 실제로 그날 아침에도 어머니가 냉동실 문을 열었다가 밀폐용기들이 줄줄이 쌓여 있는 걸 보고 한숨을 푹 쉬었더랬다. "이게 다 뭐냐, 냉동실을 아예 창고로 쓰네." 나는 그저 헛웃음으로 넘겼지만, 속으로는 이걸 언제까지 붙잡고 있어야 하나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밀폐용기를 하나씩 꺼내 확인하던 중, 유독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다른 젤리들은 반투명한 하늘색 그대로, 열 개면 열 개 다 똑같은 색이었는데, 유독 하나만 표면에 가느다란 흰색 줄무늬가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치 대리석 무늬 같기도 하고, 서리가 낀 유리창 같기도 한 그런 결이었다. 처음에는 상한 건가 싶어서 코를 가져다 대봤는데, 냄새는 오히려 다른 것들보다 훨씬 신선했다. 상한 냄새 특유의 시큼함이나 부패한 냄새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은근한 감칠맛이 코끝에 감돌았다. 뭐지, 이건. 나는 밀폐용기 뚜껑을 다시 열어 다른 젤리들과 번갈아 냄새를 맡아봤다. 확실히 달랐다. 다른 것들은 그냥 물비린내, 밍밍한 냄새가 전부였는데, 이놈만 뭔가 발효식품 특유의 깊은 향이 났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 젤리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로 잘라봤다. 단면이 갈라지는 순간 손끝으로 전해지는 감각이 확연히 달랐다. 다른 젤리들이 물풍선을 자르는 느낌이었다면, 이건 마치 잘 숙성된 두부를 가르는 느낌에 가까웠다. 밀도가 다르고, 결이 달랐다. 칼날이 파고들 때 미묘하게 저항하는 느낌, 그리고 갈라진 단면에서 흰 줄무늬가 층층이 겹쳐 있는 모습을 보고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걸 요리해봐야겠는데." 나는 중얼거리며 냄비를 꺼냈다. 소금과 마늘, 그리고 집에 있던 육수 팩 하나를 넣고 그 흰 줄무늬 젤리를 끓여봤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서 부엌에 퍼지는 냄새부터 심상치 않았다. 평범한 물비린내가 아니라, 은근한 감칠맛이 도는 향이었고, 그 향이 점점 짙어지는 걸 느끼며 나는 냄비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몇 번이나 반복했다. 젤리가 익어가면서 색이 조금씩 뽀얗게 변하는 것도 눈에 띄었다. 한 숟갈 떠서 맛을 봤을 때, 나는 젓가락을 든 채로 잠깐 멍해졌다. 식감이 탱글탱글하면서도 씹는 맛이 살아있었고, 국물 맛은 마치 며칠 우려낸 사골처럼 깊었다. 목 넘김도 부드러웠고, 뒷맛에 은근한 단맛까지 남았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 이게 진짜 슬라임 젤리로 만든 국물인가 싶을 정도였다. 나는 남은 다른 젤리도 똑같은 방식으로, 같은 소금과 마늘, 같은 육수 팩을 넣고 끓여봤는데, 그건 그냥 물맛이 진한 밍밍한 죽이었다. 씹는 맛도 물컹거리기만 했고, 국물은 그냥 소금물에 가까웠다. 확실했다. 이 흰 줄무늬 하나만 결과물이 다르다. 손끝이 떨렸다. 이건 우연일 수도 있다. 정말 우연일까? 나는 그날 밤 냉동실을 다시 뒤졌다. 밀폐용기를 하나씩 꺼내 뚜껑을 열고, 손전등까지 비춰가며 표면을 확인했다. 남은 열한 개 중 흰 줄무늬가 있는 건 그것 하나뿐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처음 그대로, 반투명한 하늘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하나만 저런 무늬가 생긴 건지 전혀 짐작이 안 갔다. 채집한 조건도 같았고, 보관한 시간도 같았고, 심지어 같은 밀폐용기에 같은 위치로 넣어놨는데도 그랬다. 유일한 차이는 그냥 운, 이라는 말밖에 안 나왔다. 다음 날 나는 다시 B1층 게이트로 향했다. 이번엔 좀 더 신경 써서 슬라임을 골랐다. 겉면을 살짝 갈라보고,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을 하나하나 비교하면서 채집물을 선별했다. 어제 흰 줄무늬가 있던 놈을 채집했을 때 느꼈던 감각과 비슷한 게 있는지 찾으려는 시도였는데, 솔직히 그때는 뭘 근거로 그러는지 나 자신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뭔가 손끝이 미묘하게 저릿한 느낌이 드는 놈들을 우선적으로 골랐을 뿐이었다. 슬라임 하나를 집어 들 때마다 나는 손바닥으로 표면을 눌러보고, 손가락 끝으로 살살 굴려보고, 심지어 눈까지 감고 감각에만 집중해봤다. 옆에서 봤으면 미친놈 취급받을 행동이었지만, 그날은 아무도 없었다. 최하층이라는 곳이 그런 면에서는 편했다. 아무도 신경 안 쓰니까, 뭘 해도 상관없었다. 그날 채집한 여덟 개 중, 냉동 사흘째 되던 날 흰 줄무늬가 나타난 개체는 두 개였다. 두 개. 여덟 개 중 두 개. 확률이라기엔 너무 적었고, 순전한 우연이라기엔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나는 그 두 개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요리해봤다. 하나는 국물로, 하나는 볶음으로. 국물 쪽은 어제와 똑같이 깊은 감칠맛이 났고, 볶음 쪽은 마늘과 기름에 볶아내자 겉면이 살짝 바삭해지면서도 속은 여전히 탱글탱글했다. 결과는 똑같았다. 둘 다 식감과 맛이 다른 슬라임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수준이었다. "이거 뭔가 있는 거 같은데." 나는 방바닥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볼펜을 쥔 손끝이 살짝 떨렸다. 지금까지의 결과를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첫 번째, 채집 직후에는 아무 특징이 없다. 두 번째, 냉동 보관 후 사흘에서 나흘 사이 무늬가 나타난다. 세 번째, 무늬가 나타난 개체는 맛과 식감이 확실히 우수하다. 네 번째, 무늬가 나타나는 조건은 아직 모른다. 네 번째 줄에서 나는 펜을 멈췄다. 뭔가 규칙이 있는 게 분명한데, 그게 뭔지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채집할 때의 손끝 감각과 관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완전히 무작위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노트를 덮었다 다시 열었다 몇 번을 반복하며 같은 문장을 다시 읽었다. 조건, 조건이 뭐지. 온도는 동일했다. 시간도 동일했다. 그런데 왜 하나만. 나는 그날 밤 잠들기 직전까지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불 속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도 계속 흰 줄무늬가 새겨진 젤리의 단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확실한 건 딱 하나였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나는 이걸 나 혼자만 알고 있기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게 진짜라면, 그리고 재현이 가능하다면, 최하층이라는 아무도 신경 안 쓰는 폐허가 내 인생을 뒤집을 유일한 무대가 될 수도 있었다. 아무도 눈독 들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는 방법으로. 그런데 동시에, 이게 그냥 내 착각이면 어떡하지 싶은 불안감도 만만치 않았다. 혼자 흥분해서 떠들다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걸로 밝혀지면, 그 민망함은 누가 감당하나 싶었다. 결국 나는 다음 날 서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비밀을 나 혼자서만 짊어지고 있기엔, 확신이 너무 부족했다. 전화벨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서아가 받았다. "어, 웬일이야." 그녀의 목소리가 심드렁했다. "할 얘기가 있는데."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골랐다. "뭔데, 빨리 말해. 나 지금 나가야 돼." 서아의 목소리에는 특유의 무심함이 배어 있었다. "좀 이상한 건데, 진짜 이상한 건데... 직접 보여줘야 할 거 같아." 수화기 너머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뭔데, 궁금하게." 그녀의 말투에 처음으로 흥미가 묻어났다. "슬라임 젤리 있잖아, 그거 채집한 거."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이어보려 했지만 목소리가 자꾸 빨라졌다. "그중에 하나가, 냉동실에 넣고 며칠 지나면 겉에 흰 줄무늬가 생기는데, 그게 맛이 완전히 달라. 국물을 내도 다르고, 볶아도 달라." "그게 뭐가 이상해, 그냥 상한 거 아니야?" 서아가 대뜬 되물었다. "아니, 그 반대야. 오히려 더 맛있어져. 확실하다니까." 나는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어, 그래?" 서아의 대답은 여전히 심드렁했지만,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야, 그럼 그거 나한테 먹여봐.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내일 시간 돼?" "되니까 전화했겠지, 뭘 물어." 그녀가 픽 웃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나는 아직 몰랐다, 이 전화 한 통이 앞으로 내가 벌일 일들의 첫 증인을 만드는 순간이었다는 걸. 다음 날 아침, 전날 판매했던 특수 슬라임 젤리 대금 3만 7천 원이 계좌로 입금됐다. 잔액은 4만 2천 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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