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토요일. 무대 뒤편, 대기실에 앉아서 나는 손끝만 계속 만지고 있었다.
만지고, 또 만지고. 손끝에 뭐가 묻은 것도 아닌데 자꾸 문질렀다. 긁어서 없앤다고 없어질 감각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오백만 명이 넘는 관객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났다. 실감이 안 나야 오히려 다행이었다. 실감이 나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것 같았으니까.
숫자로 세어보면 더 무서워졌다. 오백만. 그냥 숫자로 놓고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은데, 그게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들 눈이 전부 나를 향한다고 생각하면.
'..그만 생각해. 그만.'
그래도 자꾸 생각났다. 야구공 하나 던질 때 관중 몇천 명한테 시선 받는 것도 다리가 후들거렸는데, 이건 그거랑 비교할 수도 없는 규모였다.
"긴장돼?"
한유나가 옆에 앉으며 물었다.
"..네. 엄청."
"당연하지. 나도 처음엔 토할 것 같았어."
"언니도요?"
믿기지가 않았다. 무대 위에서 저렇게 여유롭게, 마치 자기 방에서 걸어다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이, 처음엔 토할 것 같았다니.
"응. 지금은 안 그렇지만."
웃으라고 한 말인지 위로하려고 한 말인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조금 웃겼다.
"근데 언니는 지금도 안 떨려요? 진짜로?"
"떨려. 근데 그 떨림을 쓸 줄 알게 된 거지."
그 말은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떨림을 쓴다니. 떨리면 그냥 떨리는 거지, 그걸 어떻게 쓴다는 건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떨림이잖아. 근데 그 힘을 리듬에 태우면, 그게 무대에서 에너지처럼 보여."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안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알려준 거 기억해. 감정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리듬에 태우는 거야. 4박에 들이쉬고, 4박에 내쉬고."
"네."
"떨려도 괜찮아. 완벽하게 안 해도 돼. 그냥 흐름 안에 있어."
그 말이 이상하게 몸의 긴장을 조금 풀어줬다. 완벽하게 안 해도 된다는 말. 그 말 한마디에 어깨가 살짝 내려갔다.
투수 시절에 감독님이 자주 하던 말이 있었다. 완벽한 공은 없다. 완벽하게 던지려고 하면 그게 제일 위험한 공이 된다. 그 말이 갑자기 여기서도 통할 줄이야.
스태프가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십 분 전입니다!"
다들 일어섰다. 나도 따라 일어섰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릎이 이렇게 말을 안 들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한 걸음 떼는데 무릎이 살짝 꺾였다. 아무도 못 봤겠지, 하고 넘어가려는데 한유나가 곁눈질로 나를 봤다.
"괜찮아. 다들 그래."
다들 그렇다는 말이 이렇게 위로가 될 줄이야. 나만 이렇게 엉망진창인 게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무대 뒤 통로를 걸어가는 동안, 관객들 함성이 벽을 뚫고 넘어왔다. 그 소리가 커질수록 심장도 같이 커지는 느낌이었다.
발밑에서부터 울리는 진동. 그게 함성 때문인지, 스피커 베이스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됐다. 그냥 통로 전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떨렸다.
'..이게 진짜 오백만 명 소리구나.'
관중석에서 야구 볼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아니, 그때는 내가 관중이었으니까 모르는 거였을 수도 있다. 지금은 내가 저 함성의 대상이 될 차례였다.
통로 조명이 하나씩 지나갔다. 발걸음에 맞춰서. 하나, 둘, 셋. 세다 보니 오히려 조금 진정이 됐다. 숫자를 세면 다른 생각이 덜 들어오니까.
"이소원."
한유나가 불렀다. 통로 끝, 무대 입구 바로 앞에서.
"네?"
"오늘 무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말로 궁금했다. 큰 의미가 있다니, 그냥 데뷔 무대라는 말로는 부족한 뭔가가 있다는 건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인가.
한유나는 대답 대신 그냥 어깨를 툭 치고 앞으로 나갔다. 그 말의 의미를 되짚을 시간도 없이, 무대 조명이 확 밝아졌다.
와아아아아-!
관객석에서 터진 함성이 온몸을 때렸다. 정말로 때리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귀가 먹먹해졌다. 마운드에 처음 섰을 때 관중석 함성도 이 정도였나. 아니, 이건 다르다. 그때는 함성이 나를 향한 게 아니었지만 지금은.
지금은 나를 보고 지르는 함성일 수도 있었다.
'..아니, 아직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첫 곡 인트로가 시작됐다. 나는 정해진 위치에 섰다. 이번엔 맨 끝자리가 아니었다. 정중앙, 센터.
센터. 이 단어가 이렇게 무거울 줄 몰랐다. 예전에 대기줄 맨 끝에서 겨우 자리 하나 얻던 게 몇 주 전인데, 지금은 정중앙에 서 있었다.
숨을 쉬었다. 4박에 들이쉬고.
조명이 나를 비췄다. 오백만 개의 시선이 한꺼번에 나에게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4박에 내쉬고.
손끝이 뜨거워졌다. 그런데 이번엔, 처음으로 그 뜨거움이 무섭지 않았다.
이상했다. 평소엔 이 뜨거움이 시작되면 겁부터 났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뜨거운 게 뜨거운 거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음악이 시작됐다. 몸이 움직였다. 다리가, 팔이, 시선이 정확히 리듬에 맞아 들어갔다. 손끝에서 흘러나온 붉은 빛이 리듬을 따라 부드럽게 퍼졌다.
뜨윽-!
이게 아니었다. 방금은 완전히 다른 소리였다.
스트라이크가 아니라, 처음으로 정확히 맞아 들어가는 느낌.
투수일 때는 이 감각을 스트라이크라고 불렀다. 지금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맞아 들어갔다는 것만 알겠다. 몸과 음악이, 리듬과 손끝이.
관객석에서 함성이 한 번 더 크게 터졌다. 나를 향한 함성인지 확신은 안 갔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무대 위에 있는 게 나였다.
한 곡, 두 곡이 지나갔다. 세 번째 곡이 시작될 무렵, 나는 처음으로 이 무대가 무섭지 않았다.
두 번째 곡에서는 스텝이 한 박자 늦었다. 예전 같으면 그 실수 하나에 머릿속이 하얘졌을 텐데, 오늘은 그냥 다음 박자에 맞춰서 돌아왔다. 아무도 눈치 못 챈 것 같았다. 아니, 눈치챘어도 상관없었다. 흐름 안에 있으면 된다고 했으니까.
'..나 진짜 할 수 있는 건가.'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조명이 이상하게 흔들렸다.
한 번, 두 번.
처음엔 그냥 조명 실수인가 싶었다. 공연장 조명이야 원래도 가끔 튀는 거니까. 그런데 무대 상단, 결계 표시등이 붉게 점멸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평소엔 은은한 파란빛이었는데.
파란빛이 결계가 정상 가동 중이라는 표시라는 건 연습 때 들었다. 그런데 지금 저건 파란빛이 아니었다.
붉은빛. 그것도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이는.
음악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관객들은 여전히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나만, 정확히 나만, 그 이상한 점멸을 눈치챈 것 같았다.
주변을 살짝 둘러봤다. 다른 멤버들은 여전히 웃으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관객들도 여전히 열광하고 있었다. 저 위에 붉은 불빛이 깜빡이는 걸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건가, 아니면 나만 이상하게 예민한 건가.
무대 옆에 서 있던 한유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도 그 점멸을 본 것 같았다.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확신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음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명이 다시, 한 번 더 붉게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