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벽 6시, 강남대로 편의점 유리문에 성에가 끼어 있었다.
바깥 온도는 영하 3도,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온풍기 바람이 뺨을 스쳤다.
나는 삼각김밥 진열대를 정리하며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참치마요, 전주비빔, 스팸마요.
유통기한이 오늘 밤 12시까지인 것들을 앞으로 빼고, 새로 들어온 것들을 뒤로 밀어 넣었다.
30년 동안 던전에서 굶기를 밥 먹듯이 하던 내가, 이제는 굶지 않으려고 밤새 이런 것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가끔은 우습고, 가끔은 서글펐다.
'이것도 나름 생존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코드를 찍었다.
찍, 찍, 찍.
단말기가 규칙적으로 소리를 냈다.
시급 9,860원, 야간수당 별도.
한 달을 채우면 168만 원쯤 손에 쥘 수 있다는 계산을 머릿속으로 굴렸다.
거기서 월세 60만 원, 관리비 5만 원, 통신비 4만 원을 빼면 남는 게 얼마인지도 벌써 계산이 끝나 있었다.
서울에서 방 한 칸 월세가 60만 원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보증금 1000만 원을 마련하느라 편의점 사장님께 선불로 세 달치 월급을 부탁했던 기억도 났다.
던전 최하층에서 오크 무리를 상대할 때보다 지금이 더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때는 검 한 자루만 있으면 살 수 있었는데, 지금은 통장 잔고와 편의점 사장님의 눈치를 봐야 살 수 있었다.
진열대 정리를 마치고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6시 12분.
교대 시간까지 아직 세 시간이 남아 있었다.
손님이 들어오는 종소리가 났다.
딸랑.
나는 습관처럼 고개를 들어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남자는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캐시미어 혼방, 어깨선이 각져 있는 걸 보니 맞춤이었다.
손목에는 금색 시계가 번쩍였고, 구두는 굽이 낮았지만 광이 심하게 나 있었다.
50대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얼굴에 살이 붙어 있었지만 뼈대의 각은 낯익었다.
그는 곧장 담배 코너로 걸어가지 않고, 계산대 앞에 멈춰 섰다.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받는 듯, 엄지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조성재.' 나는 속으로 그 이름을 되뇌었다.
30년 전, 그와 함께 던전에 들어갔던 그날의 기억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조사단의 귀족 연구원, 목소리가 크고 명령에 익숙한 남자.
나를 포함한 학생 다섯 명을 이끌고 최심부까지 데려갔던 그 사람이었다.
지금 눈앞의 저 사람은 그때보다 배는 늙었지만, 걷는 자세와 턱을 치켜드는 습관은 그대로였다.
어깨를 뒤로 젖히고 턱을 살짝 들어 상대를 내려다보는 그 자세.
3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습관이 있다는 게, 나는 조금 놀라웠다.
그는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진열대를 가리켰다.
담배 하나를 내밀듯이 손끝만 까딱였다.
"이거 얼마야."
반말이었다.
30년 전에도 그는 나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4,500원입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던지듯 올려놓았다.
카드가 계산대 위에서 미끄러져 바코드 스캐너 옆에 부딪히며 멈췄다.
"빨리 좀 해, 나 시간 없어."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의 결을 알고 있었다.
30년 전, 던전 안에서도 그는 늘 저런 어조로 우리를 몰아붙였다.
나는 카드를 단말기에 긁었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30년 전에도 나는 이 남자 앞에서 이렇게 손을 떨었던 적이 있었다.
단말기에서 승인 소리가 울렸다.
삐빅.
나는 영수증을 뽑아 내밀었다.
그가 힐끗 나를 쳐다봤다.
눈빛이 스치듯 지나갔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숨을 죽였다.
"뭘 봐." 그가 물었다.
"아... 아닙니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바닥의 얼룩진 타일 무늬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흘린 커피 자국이 아직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문을 밀고 나갔다.
종소리가 다시 울렸다.
딸랑.
나는 카운터에 두 손을 짚고 잠시 서 있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손바닥이 계산대 유리에 닿아 차가운 감각이 그대로 전해졌다.
30년 만에 마주친 얼굴이었는데, 그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하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열다섯 살이던 고등학생과, 지금 40대 중반의 남자가 같은 사람이라고 누가 짐작할까.
얼굴도 바뀌었고, 이름도 바뀌었다.
하지만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나는 편의점 유리창 밖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그의 걸음걸이가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30년 전 던전 최심부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등이 겹쳐 보였다.
그날 내가 함정 속으로 떨어질 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는 나를 두고, 그는 조사단원들과 함께 그대로 던전을 빠져나갔다.
'서연이는... 어떻게 됐을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 이름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같은 학교, 같은 반, 나를 향해 늘 웃어주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떠올랐다.
창밖으로 조성재의 차가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독일산 세단, 번호판이 서초구였다.
차 옆면에 반사된 가로등 불빛이 순식간에 골목을 가로질렀다.
나는 그 차가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가슴 속에서 뭔가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분노인지, 억울함인지, 나조차도 정확히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남은 근무 시간 동안 나는 몇 번이나 같은 진열대를 다시 정리했다.
손이 자꾸 허공을 짚었다.
머릿속에는 30년 전의 장면들이 자꾸만 재생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퇴근길에 한강 다리를 건너며 오래 참았던 기억의 문을 열었다.
다리 위로 부는 바람이 코트 속을 파고들었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30년 전, 내가 아직 고등학생이던 그 시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