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삼십 년 만의 귀환자

2화

17년 전, 아니, 정확히는 30년 전, 4월. 나는 열다섯 살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봄, 학교에서 단체로 견학을 갔던 폐건물에서 나는 갑자기 발밑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주변 친구들의 비명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숲 한가운데 누워 있었다. 하늘은 붉은빛이 도는 회색이었고, 공기는 이상하게 무거웠다. 나무들은 한국에서 본 적 없는 종류였다. 잎이 넓고 짙은 청록색이었으며, 줄기는 사람 허리보다 두꺼웠다. '꿈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숲은 그대로였다. 나뭇가지에 긁힌 팔에서 진짜 피가 흘렀고, 배가 고프다는 감각도 진짜였다. 손목시계를 봤지만 액정은 깨져 있었다. 스마트폰을 꺼내봤지만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일주일 후, 나는 거의 굶은 채로 숲을 헤매다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일주일 동안 나는 나무뿌리를 캐 먹었고, 물이끼가 낀 웅덩이 물을 손으로 떠 마셨다. 밤에는 나무 아래 몸을 웅크리고 잤는데, 뭔가가 근처를 지나가는 소리에 몇 번이나 깨어났다. 그들은 이 세계의 모험가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나이가 스무 살 안팎으로 보이는 여자 둘, 남자 둘이었다.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검이나 지팡이 같은 것들을 매고 있었다. "어디서 왔어?" 키가 작고 눈이 매서운 여자가 물었다. 이름은 김서연이라고 했다. 그녀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저... 한국에서요." 나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한국이 어디야?" 서연이 다시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 세계에는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저 서연이 모르는 게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일행 중 가장 온화한 인상의 여자가 나에게 물통을 건넸다. "우선 마셔. 얘기는 나중에 해도 돼." 그녀가 말했다. 이름은 박지은, 힐러라고 했다. 지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워서, 그 목소리만으로도 긴장이 조금 풀렸다. 나는 물을 받아 마시며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일주일 만에 처음 마시는 깨끗한 물이었다. 서연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팔짱을 꼈다. "쟤, 마력 있어?" 서연이 지은에게 물었다. "모르겠어. 확인해봐야지." 지은이 대답했다. 파이터로 보이는 두 남자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구경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 덩치가 큰 쪽이 웃으며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나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말은 내 귀에 한국어처럼 들렸다. 나중에서야 이 세계에 떨어진 사람은 자동으로 이 세계의 언어를 알아듣게 된다는 걸 알았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마나측정을 받았다. 측정은 수정구슬처럼 생긴 물건에 손을 얹는 방식이었다. 구슬 안에서 붉은 빛이 소용돌이치듯 돌았다. 결과는 예상보다 높았다고 했다. 신체 강화 계열에 특화된 수치라고, 파이터 중 한 명인 정민호가 설명해줬다. "너 운 좋은 편이야." 민호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세계 떨어진 이능력자들 중에 마나 아예 없는 애들도 많아." 나는 그 말이 위로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저 어깨가 아파서 인상을 찌푸렸다. 한 달 후, 나는 조사단이라는 조직에 정식으로 배속됐다. 그 한 달 동안 나는 기본적인 검술과 체력 훈련을 받았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호위대 소속, 신체 강화 담당. 서연은 위저드로, 지은은 힐러로, 민호와 오태식이라는 남자가 파이터로 함께였다. 조사단을 이끄는 사람은 조성재라는 귀족 연구원이었다. 그는 스무 살 후반쯤으로 보였고, 옷차림부터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깔끔하게 다린 셔츠에, 손에는 얇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처음 인사를 나눌 때부터 말투가 거칠었다. "신입이 이능력이 뭐라고?" 그가 물었다. "신체 강화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쓸모는 있겠네." 그가 대충 대답하고 돌아섰다. 그는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서연은 그 모습을 보며 나에게 귓속말했다. "저 사람, 원래 저래. 신경 쓰지 마." 나는 그 말에 조금 안심했다. 그래도 성재가 지나갈 때마다 나는 괜히 몸이 굳었다. 조사단의 숙소는 낡은 목조건물이었다. 지붕에는 곳곳에 물이 새는 자국이 얼룩져 있었고, 방마다 침대가 두 개씩 겨우 들어갔다. 벽에는 곰팡이가 핀 자국이 손바닥만큼 넓게 퍼져 있었다. 식사는 하루 두 끼, 딱딱한 빵과 채소죽이 전부였다. 빵은 이빨로 물어뜯어야 할 정도로 굳어 있었고, 죽은 소금 간이 거의 되지 않아 맹맹했다. 그래도 배를 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서연과 지은과 나는 어쩌다 같은 방을 쓰게 됐다. 밤마다 우리 셋은 촛불 하나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촛불은 아까워서 오래 켜두지 못했고, 심지가 다 타면 그날 대화도 끝이 났다. 서연은 원래 이 세계의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고 했다. 가문이 몰락하면서 모험가 일을 시작했다고, 서연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지은은 교회에서 자란 고아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치유 마법에 재능이 있어서 교회에서 힐러 훈련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고향에 대해서, 가족에 대해서. 서연이 몇 번 물었지만, 나는 그냥 웃으며 넘겼다. 그때는 아직, 이 사람들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언젠가는 돌아갈 거야.' 나는 매일 밤 그렇게 되뇌었다. 엄마 얼굴이, 내 방 침대가, 학교 가는 길이 자꾸 떠올랐다. 하지만 돌아갈 방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사단에 물어봐도 다들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날, 지은이 처음으로 표정이 어두워진 채 방으로 들어왔다. 평소라면 문을 열면서 인사부터 하던 지은이었는데, 그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에는 낡은 편지 한 장이 쥐여 있었다. 편지지는 누렇게 바랬고, 귀퉁이가 접힌 채였다. 지은은 그 편지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한참 동안 촛불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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