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미로가 나를 키운다

1화

편의점 마감은 열한 시 반이었다. 점장은 아홉 시에 퇴근하면서 폐기 처리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 알아서 하라는 말은 결국 내가 먹으라는 뜻이었다. 나는 유통기한이 지난 순서대로 도시락을 골라 검은 봉투에 담았다. 삼각김치, 참치마요, 그리고 유통기한이 세 시간 지난 삼각김밥 하나. 원래는 폐기 목록에 도시락 다섯 개가 더 있었지만, 나머지는 아직 팔릴 가능성이 있어서 손대지 않았다. 손대면 재고 관리 앱에 기록이 남는다. 점장은 그런 걸 귀신같이 확인했다. 셔터를 내리고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철컹. 밤 열한 시 반의 골목은 조용했다. 취객 몇 명이 저 끝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나는 그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반지하로 가는 길은 늘 같았다. 편의점에서 나와 좌회전, 정육점을 지나고, 재개발 예정이라는 현수막이 걸린 골목을 지나면 계단이 나왔다. 계단은 열여섯 개였다. 나는 그걸 세면서 내려갔다. 오늘이 생일이라는 걸 세다가 다시 떠올렸다. 방 안은 좁았다. 매트리스 하나, 접이식 책상 하나, 그리고 창문 대신 뚫려 있는 환기구 하나. 겨울엔 냉기가 그 구멍으로 들어왔고 여름엔 곰팡이 냄새가 거기로 빠져나갔다. 나쁘지 않은 순환이었다. 나는 도시락 뚜껑을 열며 생각했다. 중학교 2학년 겨울,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뒤로 사 년째 이 순환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동안 익숙해졌다. 익숙해졌다는 게 좋은 뜻은 아니지만.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매년 이맘때쯤 생일이 오면 나는 늘 비슷한 방식으로 하루를 보냈다. 케이크 대신 폐기 도시락, 초 대신 편의점 전자레인지, 축하 노래 대신 옆집 벽 두드리는 소리. 처음엔 서러웠다. 지금은 그냥 일정 중 하나였다. 세금 내는 날, 방세 내는 날, 생일. 다 비슷한 무게로 취급했다. 밥을 반쯤 먹었을 때 눈앞이 갑자기 하얘졌다. 정확히 말하면 하얘진 게 아니라, 뭔가가 시야 한가운데 떠올랐다. 반투명한 판. 유리창 같기도 하고 스마트폰 화면 같기도 한 그것에 글자가 찍혀 있었다. [각성 감지 — 강일] [특수능력: 무한미로(등급 미분류)] [부가능력: 개인 보관함(용량 확장형)] 나는 숟가락을 든 채로 그대로 굳었다. 옆집에서 벽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럽다는 뜻이었다. 나는 시끄럽게 한 적이 없었는데도 벽을 두드렸다. 늘 그랬다. 나는 습관처럼 조용히 숨을 죽였다가, 다시 그 판을 쳐다봤다. 사라지지 않았다. 각성자. 뉴스에서만 보던 단어였다. 백 년 전 지구 곳곳에 미로라는 게 생겨났고, 그 미로에서 살아 돌아온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 이상한 힘을 얻었다는 그 이야기. 나는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채널을 돌렸다. 나와 상관없는 세계라고 생각했으니까. 각성자가 되면 협회에 등록해서 던전을 돌고, 몬스터를 잡고, 돈을 번다는 이야기도 다 남의 일이었다. 학교 다닐 때 각성자 시험이라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전 국민 의무 검사였다. 손목에 작은 기계를 대고 몇 초 기다리는 게 전부였는데, 나는 그때 아무 반응도 없었다. 담당 선생님은 "음성입니다, 다음"이라고 무심하게 넘겼다. 그게 열다섯 살 때였다. 그 뒤로 각성이란 건 나와 완전히 상관없는 이야기가 됐다. 통계적으로 열다섯 이후에 늦게 각성하는 경우도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그건 남의 사연이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 남의 일이 아니게 됐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손을 뻗어 그 판을 만져봤다. 손이 그대로 통과했다. 만질 수 없는 정보창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손을 다시 무릎 위에 올리고, 판에 떠 있는 글자를 하나씩 다시 읽었다. 무한미로. 등급 미분류. 처음 듣는 단어였다. 협회 홈페이지에서 몇 번 각성자 능력 목록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화염 조작, 신체 강화, 예지, 소환 같은 이름들이 있었다. 무한미로라는 이름은 없었다. 망했다. 아니, 정확히는 아직 모르겠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조차 판단이 안 섰다. 부가능력이라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개인 보관함. 용량 확장형.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는 판을 향해 손가락으로 보관함이라는 글자를 짚어봤다. 반응이 없었다. 만져지지 않는 건 똑같았다. 협회 자료에서 봤던 능력들 중에는 이런 부가능력이 딸린 경우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 하나의 능력, 하나의 등급. 나는 두 개를 한꺼번에 받은 셈이었다. 그런데 등급이 없다는 건 좋은 신호인지 나쁜 신호인지 알 수 없었다. 판 아래에 작은 글자로 안내문이 하나 더 떠올랐다. [능력을 발동하려면 '입장'을 의식하십시오.] 나는 입장이라는 단어를 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정말로 별생각 없이 그 단어를 마음속으로 떠올렸다. 방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온도가 아니라 압력이었다.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 비행기가 이륙할 때 느껴지는 그런 감각이 순식간에 방을 채웠다가 사라졌다. 나는 숨을 삼켰다. 눈앞에 문이 하나 생겨 있었다. 나무문도 아니고 철문도 아니었다. 회색 돌로 된, 오래된 성벽 같은 재질의 문이었다. 크기는 딱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 문 위에는 아무 표시도 없었다. 방 한가운데, 매트리스와 책상 사이에 갑자기 그 문이 서 있었다. 나는 도시락을 든 채로 뒷걸음질쳤다. 등이 벽에 닿았다. 좁은 방이라 두 걸음도 못 가서 막힌 거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문 손잡이는 없었다. 그냥 문틀과 문짝뿐이었다. 나는 그 문을 십 초쯤 바라봤다. 문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방 벽을 뚫고 나온 것도 아니고, 그냥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문에서는 냄새가 났다. 오래된 돌 냄새, 습기와 이끼가 섞인 것 같은 냄새. 반지하 방의 곰팡이 냄새와는 또 달랐다. 더 깊고, 더 오래된 냄새였다. 나는 코를 문지르며 다시 문을 봤다. 그 사이에도 옆집 벽 두드리는 소리는 계속됐다. 그쪽 세계는 여전히 평화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돌문이 서 있는 이쪽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층위처럼. 나는 그 자리에 다시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협회에 신고를 해야 하나. 아니면 저 문을 열어봐야 하나. 나는 휴대폰을 꺼내 협회 긴급 신고 번호를 검색했다. 화면에 번호가 떴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손가락이 멈췄다. 등록비, 검사비, 면허 발급비. 협회 관련 절차에 돈이 든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정확한 액수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최소 몇십만 원부터 시작한다는 이야기였다. 거기다 검사받으러 가는 것도 하루를 통째로 비워야 하는 일이었다. 편의점 알바를 하루 빠지면 그만큼 시급이 사라진다. 지금 내 통장에는 이십삼만 원이 있었다. 다음 달 방세를 내면 남는 돈이 없었다. 거기에 겨울 난방비도 곧 청구될 예정이었다. 나는 전화를 걸지 않고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돈이 없어서 각성 신고를 못 한다는 게 웃긴 얘기라는 건 알았다. 뉴스에서는 각성자가 되면 인생이 바뀐다고들 했다. 협회에 등록만 하면 기초 지원금이 나오고, 던전 몇 번 돌면 웬만한 직장인 연봉을 몇 달 만에 번다고. 그런데 그 등록까지 가는 길에도 돈이 든다는 건 아무도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세상 모든 시작에는 입장료가 붙는다는 걸, 나는 이미 사 년 전부터 배워서 알고 있었다. 대신 문을 봤다. 문 옆에 작은 판이 다시 떴다. [무한미로 — 1층] [예상 위험도: 산정 불가] [※ 이 공간 내에서의 죽음은 현실 신체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단, 심리적 충격은 실재합니다.] 나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죽어도 현실에서는 안 죽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저 안에 뭐가 있든, 최악의 경우에도 나는 이 반지하 방으로 돌아온다는 뜻이었다. 괜찮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냥, 시도해볼 여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심리적 충격은 실재한다는 문구가 계속 눈에 밟혔다. 그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놀라서 심장마비가 온다는 뜻인지, 아니면 트라우마가 남는다는 뜻인지. 어느 쪽이든 유쾌한 경험은 아닐 것 같았다. 그래도 죽지 않는다는 문장 하나가 나머지 불안을 눌러줬다. 죽지 않으면, 일단 해볼 수 있다. 나는 도시락 뚜껑을 다시 닫았다. 먹다 남은 참치마요는 나중에 먹기로 했다. 삼각김밥은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지 세 시간이 넘었으니 더 늦기 전에 처리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나는 봉투를 접이식 책상 위에 올려놓고, 문 앞에 섰다. 문틀은 내 방 천장보다 살짝 낮았다. 손을 뻗어 문짝을 밀었다. 돌 특유의 차갑고 거친 질감이 손끝에 닿았다. 표면이 매끈하지 않고 오돌토돌했다. 오래된 성벽을 만지는 느낌이랄까, 아니, 실제로 그런 걸 만져본 적은 없었지만 그럴 것 같았다. 무겁게 밀리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힘없이 스르륵 열렸다. 문 너머는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밝았다. 회색 돌바닥, 회색 돌벽,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 조명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벽에 붙은 등도 없었고, 천장에서 빛이 내려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전체가 균일하게 밝았다. 나는 그 부자연스러운 밝기가 오히려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복도 저 끝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스륵, 스르륵. 무언가가 바닥을 끄는 소리였다. 발소리는 아니었다. 발이라면 저렇게 끌리듯 소리가 나지 않는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마치 뭔가가 제자리를 서성이는 것처럼. 나는 문고리도 없는 그 문을 붙잡은 채로, 들어갈지 말지 고민했다. 등 뒤로는 반지하 방이 있었다. 매트리스, 접이식 책상, 환기구, 그리고 먹다 만 도시락. 사 년 동안 익숙해진 좁고 냉한 세계. 문 너머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회색 복도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 어느 쪽도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다만 한쪽은 익숙한 불안이었고, 다른 쪽은 낯선 불안이었다. 죽어도 돌아온다. 나는 그 문장을 한 번 더 속으로 되짚었다. 그리고 결국 한 발을 안으로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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