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미로가 나를 키운다

3화

복도는 길었다. 얼마나 긴지는 알 수 없었다. 회색 돌바닥이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고, 벽에는 이끼도 없고 낙서도 없었다. 그냥 매끈했다. 마치 누가 자로 재고 사포로 문지른 것처럼. 천장에서 빛이 나오는 것 같았는데 정확히 어디서 나오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형광등도 아니고 창문도 아니었다. 그냥 공간 자체가 은은하게 밝았다. 이런 데 전기세는 안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상황에 그런 생각이 드는 내가 좀 어이없었지만, 원래 사람은 위기 상황에서 뇌가 딴 데로 새는 법이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변명했다. 스륵, 스르륵. 소리가 다시 들렸다. 나는 벽에 등을 붙이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살폈다. 복도 저 끝, 십오 미터쯤 앞에서 뭔가가 바닥을 스치듯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 크기의 그림자였는데, 형태가 사람 같지는 않았다. 다리가 여러 개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나는 벽에 등을 붙인 채로 숨을 최대한 낮췄다. 숨소리가 크게 울릴까 봐, 그게 무서웠다. 나는 인벤토리, 아니 개인 보관함이라는 능력을 다시 떠올렸다. 협회에서 알려준 사용법은 간단했다. 물건을 넣고 싶은 만큼 강하게 의식하면 그게 사라지고, 다시 꺼내고 싶을 때 의식하면 손 앞에 나타난다고 했다. 설명서 한 줄로 끝난 그 기능이 지금 내 목숨을 좌우하고 있었다. 나는 어제 편의점에서 슬쩍 챙겨온 커터칼을 보관함에서 꺼냈다. 손 앞에 그게 그대로 나타났다. 칼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문구용 커터칼이었다. 손잡이는 노란색 플라스틱이었고, 날은 몇 번 썼는지 살짝 무뎌 보였다. 이걸로 몬스터를 잡으라고?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이거밖에 없었다. 협회 매뉴얼 어디에도 초심자용 무기 지급 항목은 없었다. 각자 알아서 준비해오라는 게 전부였다. 그것도 작은 글씨로. 그림자가 점점 다가왔다. 다리 여러 개로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스륵, 스르륵, 스르르륵. 소리에 리듬이 있었다. 마치 누가 젖은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것 같은, 그런 불쾌한 리듬. 가까워질수록 형태가 또렷해졌다. 몸통은 개만 한 크기였고, 다리는 여섯 개, 표면은 딱딱한 각질로 덮여 있었다. 등껍질은 짙은 갈색이었고 표면에 자잘한 홈이 파여 있었다. 그리고 얼굴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에 눈이 세 개 박혀 있었다. 눈은 까맣고 반짝였는데, 방향이 제각각이라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순간 커터칼을 쥔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 이 개체는 '갑각다각충' 입니다. 위험도: 하] 판이 그렇게 알려줬다. 위험도 하. 그 정보에 아주 조금 힘이 났다. 아주 조금. 하급이라는데 왜 이렇게 크고 다리가 여섯 개나 달렸는지, 그 기준이 도대체 뭔지 궁금했지만 지금 그걸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벽에서 등을 떼고 복도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다. 정면으로 부딪힐 자신이 없었다. 최대한 짧게 움직이라던 김도윤 주임의 말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도망치는 것도 움직임은 움직임이니까, 이것도 그 조언에 포함되는 거라고 억지로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발바닥이 돌바닥에 부딫히는 소리가 내 귀에도 크게 들렸다. 탁, 탁, 탁. 등 뒤에서 다각충이 따라붙는 소리가 났다. 스르륵, 스르륵. 속도가 나보다 빨랐다. 당연했다. 다리가 세 배는 더 많으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계산이 되는 내 머리가 신기했다. 다각충의 다리 하나가 내 발목을 스쳤다. 넘어졌다. 돌바닥에 무릎이 부딪혔다. 아팠다. 진짜로 아팠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하얘질 정도의 통증이었다. 나는 몸을 뒤집으며 커터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이 너무 떨려서 칼끝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다각충이 그대로 나를 덮쳤다. 그다음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뭔가가 내 팔을 찢었다. 뜨거운 감각이었다. 뜨겁다기보다는, 살갗이 벌어지는 느낌이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리고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반지하 방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었다. 라면 냄비가 그대로 식탁 위에 있었다. 김도 다 빠지지 않은 채였다. 시계를 보니 문에 들어가고 나서 오 분도 지나지 않았다. 오 분. 나는 그 숫자를 몇 번이나 되짚어봤다. 오 분 사이에 나는 도망치고, 넘어지고, 찢기고, 그리고 죽었다. 그런데 겨우 오 분. 나는 팔을 만져봤다. 상처가 없었다. 옷도 찢어지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했다. 소매를 걷어 팔뚝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흉터 하나 없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아팠던 곳인데. 죽었다. 나는 방금 죽었다. 협회 서류에 적혀 있던 문장이 그제야 실감났다. 심리적 충격은 실재한다. 몸은 안 죽었지만, 그 순간의 통증과 공포는 진짜였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떨림이 멈추기를 기다리며 한동안 매트리스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천장의 얼룩진 벽지를 바라보면서,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었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십 분쯤 지나서 판이 다시 떴다. [재입장 가능 — 대기 시간 종료] 대기 시간이 얼마인지도 모른 채 이미 지나가 있었다. 정확히 몇 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문제는 다시 들어갈지 말지였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만져봤다. 아까 넘어지면서 느꼈던 통증의 감각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실제 상처는 없었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아픈데 아프지 않았다. 마치 꿈에서 맞았는데 깨고 나서도 뺨이 얼얼한 것과 비슷했다. 다만 이건 꿈보다 훨씬 생생했다. 다시 들어가는 게 맞는 걸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답 대신 통장 잔고를 떠올렸다. 이십삼만 원. 방세를 빼면 남는 게 거의 없는 그 숫자. 그리고 협회 태블릿에서 봤던 매입 단가. 몬스터 코어 하나만 제대로 챙겨도 몇 달 치 알바비가 한 번에 들어온다는 그 숫자. 편의점 야간 알바로 시급 만 원 받으며 진열대를 정리하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시간에 비하면 이건, 적어도 시급으로는 훨씬 나았다. 죽는 것만 빼면. 아니, 죽는 것도 사실은 빼야 했다. 진짜로 죽는 게 아니니까. 죽어도 안 죽는다. 아프지만 실제로 아픈 게 아니다. 이건 사실 나에게 굉장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걸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다. 세상에 이런 조건으로 돈 버는 직업이 어디 있을까. 물론 그 순간의 공포와 통증이 진짜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 문제는 일단 미뤄두기로 했다. 지금 당장 급한 건 방세였다. 나는 다시 마음속으로 그 단어를 떠올렸다. 입장. 방 한가운데 문이 다시 나타났다. 나는 이번엔 도시락 대신 부엌칼을 챙겼다. 집에 있는 물건 중 유일하게 날붙이 다운 물건이었다. 손잡이가 살짝 헐거워진, 마트에서 만 원도 안 주고 산 물건이었지만 커터칼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적어도 칼날 길이가 다르니까. 그걸 보관함에 넣고, 문을 열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복도는 아까와 똑같았다. 다행히 아까 그 다각충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이번엔 좀 더 신중하게, 벽을 짚으며 천천히 걸었다. 발끝으로 걷는 것도 시도해봤는데, 몇 걸음 못 가서 종아리가 당겨서 그만뒀다. 역시 평소에 운동을 좀 해뒀어야 했다. 그렇게 오 분쯤 걸었을 때, 복도 끝에서 문이 아니라 갈림길이 나타났다. 왼쪽과 오른쪽. 둘 다 똑같은 회색 돌바닥이었다. 어느 쪽에도 표지판 하나 없었다. 협회에서 준 안내서에는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법이 한 줄도 없었다. 그저 '경로 선택은 신중히'라는 문장 하나만 던져놓은 게 전부였다. 신중히 하라는데 정보는 하나도 안 주고. 판이 다시 떴다. [분기점 감지 — 경로 선택 시 이전 경로는 재구성됩니다.] 재구성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재구성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섭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봤다. 둘 다 똑같이 생겼는데 왜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동전을 던져볼까 생각했지만 주머니에 동전이 없었다. 결국 나는 왼쪽 길을 선택하고 발을 옮겼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왼손잡이라서, 라는 이유였다면 조금 우습겠지만 실제로 그랬다. 뒤를 돌아보니 방금 지나온 복도가 사라져 있었다. 대신 벽만 남았다. 그 벽도 매끈하고 회색이었다. 마치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아무 흔적도 없이. 무한미로. 이름 그대로였다. 한번 지나간 길은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앞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구조였다. 등 뒤가 막힌다는 게 이렇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구조였다는 걸, 나는 벽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도망칠 곳도 없다는 뜻이었다. 앞으로 가거나, 그 자리에 멈춰 서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는 앞으로 걸었다. 부엌칼을 손에 꽉 쥐고, 벽에 등을 최대한 붙이고, 발소리를 죽이며. 심장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뛰었다. 왼쪽 길 끝에서, 뭔가가 다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그 다각충보다 훨씬 큰 소리였다. 그 소리는, 무겁고 낮고, 바닥을 통째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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