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왕종 다각충이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열두 개, 등껍질에 돌기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눈은 여섯 개였다. 몸통이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크기부터 달랐다. 아까 잡았던 변종들이 대형 개만 했다면, 이건 소형 트럭 한 대였다. 등껍질 색도 짙은 자줏빛이었다. 다른 놈들과 확실히 구분되는 색이었다. 왕종이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 굳이 설명 들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등산칼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어오르는 것 같았다.
[※ 경고: 현재 레벨로는 정면 대응 시 사망 확률 높음]
판이 경고까지 띄워줬다. 고맙지만 도움은 안 됐다. 사망 확률이 높다는 건 나도 눈으로 보고 알 수 있었다. 판이 나한테 필요한 건 확률이 아니라 도망갈 구멍이었다.
나는 벽을 다시 살폈다. 재구성된 벽에는 틈이 하나도 없었다. 매끈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더 매끈해진 것 같기도 했다. 방 안에 다른 출구도 보이지 않았다. 이 방을 지나야만 다음으로 갈 수 있는 구조였다.
던전이 나한테 친절할 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대놓고 나오니까 조금은 서운했다. 서운함 같은 걸 느낄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왕종이 먼저 움직였다. 다리 두 개를 크게 휘둘러 바닥을 찍었다.
퍽.
그 진동만으로 나는 균형을 잃고 옆으로 넘어졌다. 발밑이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바닥 전체가 한 번 튀어 올랐다가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놈이 그대로 몸을 던지듯 나를 향해 돌진했다.
나는 옆으로 굴렀다.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트럭 크기의 몸통이 내가 있던 자리를 그대로 짓눌렀다.
쿠구궁.
돌바닥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방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퍼져 나갔다. 저기 서 있었으면 균열이 아니라 내가 갈라졌을 거다.
이거 한 번 맞으면 진짜 끝이다. 아프지 않아도, 죽는 건 죽는 거였다. 통증을 못 느낀다고 해서 몸이 안 부서지는 건 아니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확인한 사실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다리 사이 틈을 살폈다. 다각충들은 다리 관절 부분이 그나마 각질이 얇았다. 아까 잡았던 변종들도 그 부위를 찔러서 잡았다. 왕종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아니라 바람이었다. 크기가 다른 만큼 각질 두께도 다를 수 있었다. 그래도 지금 붙잡을 수 있는 논리는 그거 하나뿐이었다.
왕종이 다시 돌진했다. 이번엔 방향을 예측하고 반대로 몸을 던졌다. 예측이 반쯤 맞았다. 놈의 다리 하나가 내 어깨를 스쳤다.
어깨가 그대로 돌아갔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인지 관절이 빠지는 소리인지 구분이 안 됐다. 통증이 눈앞을 하얗게 만들었다. 시야 가장자리가 잠깐 흐려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숨을 쉬면 어깨가 같이 움직였고, 어깨가 움직이면 다시 그 통증이 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깨를 붙잡고 뒤로 물러나며 생각했다. 이대로 계속 도망만 다니면 결국 잡힌다. 재구성된 방 안에는 숨을 곳도 없었다. 기둥도 없고, 가구도 없고, 몸을 숨길 구석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던전은 정말로 이 방에서 죽으라고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선택은 하나였다. 정면으로 뛰어드는 것.
머릿속에서 판이 다시 경고를 띄우려는 것 같았다. 나는 그걸 보지 않기로 했다. 지금 확률 따위를 확인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나는 성한 팔로 등산칼을 다시 고쳐 잡았다. 손잡이에 땀이 배어 있어서 미끄러웠다. 옷에 한 번 문질러 닦고 다시 잡았다. 왕종이 다시 다리를 들어 찍으려는 순간, 나는 그 다리 관절 사이로 몸을 던졌다.
놈의 몸통 아래로 파고들었다. 위에서 내려다보이던 몸통이 아래에서 보니 훨씬 거대했다. 등껍질 사이로 배 부분의 각질이 다른 곳보다 얇아 보였다. 정확한 판단인지 확신은 없었지만 지금은 그거밖에 없었다. 확신 같은 건 사치였다. 지금은 그냥 움직여야 했다.
칼을 두 손, 아니 한 손과 다친 팔로 함께 밀어 넣었다. 다친 어깨에서 다시 통증이 치솟았지만 참았다. 참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각질을 뚫는 느낌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딱딱한 껍질 아래로 무언가 물컹한 것이 있었다. 그 물컹한 걸 만졌다는 감각이 손목까지 전해졌다. 놈이 거세게 몸을 뒤틀었다. 몸통 전체가 진동하듯 흔들렸다. 그 몸통에 깔릴 뻔했지만, 나는 있는 힘껏 옆으로 굴러 빠져나왔다.
왕종이 몸을 뒤틀며 다리를 마구 휘저었다. 열두 개의 다리가 동시에 허공을 갈랐다. 그중 하나가 다시 내 다리를 스쳤다.
발목이 꺾였다.
나는 넘어지면서도 계속 굴렀다. 멈추면 그 자리에서 다음 공격을 받는다. 몸이 알아서 판단했다. 놈에게서 최대한 멀어지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몇 바퀴를 굴렀는지 세지 않았다. 벽에 등이 닿을 때까지 계속 굴렀다.
놈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졌다. 다리를 휘두르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 몸통에서 검은 체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체액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지글거리는 소리를 냈다. 산성인지 뭔지, 바닥이 살짝 부식되는 게 보였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숨이 거칠게 나왔다. 숨 한 번 들이쉴 때마다 어깨가 같이 들썩였고, 그때마다 통증이 따라왔다. 어깨도, 발목도 다 아팠다. 진짜 통증이었다. 이게 진짜라는 게 오히려 신기했다.
왕종이 마지막으로 크게 몸을 떨더니,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다리 하나가 마지막으로 바닥을 긁고 그대로 멈췄다. 방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방금까지 울리던 진동도, 소리도 다 사라졌다. 그 조용함이 오히려 이상했다.
[갑각다각충(왕종) 처치]
[경험치 획득: 120]
[레벨업! 레벨 3 → 5]
[특수 보상: 몬스터 코어(대형) x1]
두 단계가 한 번에 올랐다. 나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도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냥 몸이 아팠다. 그리고 무서웠다. 레벨이 두 개나 올랐다는 숫자보다, 방금 내가 죽을 뻔했다는 감각이 더 크게 남아 있었다.
방금 내가 한 게 뭔지 다시 생각해봤다. 살아 있는 무언가를 죽였다. 몬스터라고 부르니까 죄책감이 덜한 것 같았지만, 저건 분명히 움직였고, 저항했고, 결국 멈췄다. 그 과정을 내가 직접 만든 거였다. 손끝에 남아 있는 그 물컹한 감각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
손이 떨렸다.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흥분이 아니라, 뭔가 다른 감정이었다. 나는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붙이면 더 무서워질 것 같았다. 지금은 그냥 그 떨림을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는 걸로 넘기기로 했다.
나는 다친 어깨를 다른 손으로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깨를 짚은 손에도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발목도 절뚝거렸다. 발을 디딜 때마다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통증은 여전했지만, 움직이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레벨이 오르면서 회복력도 조금 붙은 것 같았다. 아까보다는 확실히 덜 아팠다. 덜 아프다는 게 이 정도라는 게 무서울 뿐이었다.
왕종이 있던 자리에는 대형 코어가 떨어져 있었다. 아까 주웠던 작은 코어들보다 훨씬 크고 진한 파란빛을 냈다. 손바닥 두 개를 붙인 크기였다. 나는 절뚝거리며 다가가 그걸 주워 보관함에 넣었다. 무게가 생각보다 묵직했다.
이거 하나로 오늘 협회에서 봤던 매입 단가표의 숫자가 얼마나 채워질지 계산해봤다. 대형 코어 단가는 소형의 몇 배였다. 방세, 밀린 관리비, 그리고 그동안 못 사 먹었던 제대로 된 밥 한 끼까지. 머릿속에서 숫자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그런 계산을 하는 스스로가 조금 우스웠다. 방금 목숨을 걸고 죽음의 위기를 넘겼는데, 머릿속에서는 방세 계산이 먼저 나왔다. 하지만 이게 지금의 나였다.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통장 잔고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해도 딱히 억울하지도 않았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왕종의 사체도 서서히 빛의 입자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발끝부터 시작해서 몸통까지, 검은 껍질이 파란 입자로 부서져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방금까지 저게 살아서 나를 죽이려 했다는 게 잘 안 믿겼다.
그리고 그 자리, 방 안쪽 벽에 새로운 문이 나타났다. 아까 처음 들어왔던 그 문과 똑같은 회색 돌문이었다. 문 표면에도 똑같이 이끼 같은 무늬가 있었다.
[1층 클리어]
[2층 입장 가능]
나는 그 문을 한동안 바라봤다. 1층. 이게 겨우 1층이었다는 뜻이다. 협회에서 이걸 최고 난이도로 분류한 이유가 이제야 실감이 났다. 등급표 숫자만 봤을 땐 그냥 종이 위의 표시였는데, 몸으로 겪어보니까 그 숫자 하나하나가 다 무게를 갖고 있었다. 왕종 한 마리에 이 정도로 몰렸는데, 2층에는 뭐가 있을지 짐작조차 안 갔다.
한 층에 이 정도라면, 다음 층은 최소한 이것보다는 셀 거다. 던전이 친절하게 난이도를 낮춰줄 리는 없었다. 오히려 반대일 게 뻔했다.
나는 어깨를 짚은 채 그 문 앞에 서서 잠깐 숨을 골랐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아팠다. 오늘은 여기까지, 라는 판단이 이성적으로는 맞았다.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고, 다음 층에 뭐가 있는지도 몰랐다. 여기서 무리해서 들어갔다가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봤다. 지금 상태로 협회 복귀 게이트까지 갈 수 있을지, 아니면 여기서 하루밤을 보내야 할지. 던전 안에서 밤을 보낸다는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 왕종보다 더한 게 어둠 속에서 나타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문 너머에서, 아주 낮고 무거운 진동음이 울려오고 있었다.
우웅. 우우웅.
방금 잡은 왕종보다 훨씬 크고 훨씬 무거운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벽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만으로도 그게 얼마나 큰지 짐작이 됐다. 왕종이 다리를 굴렀을 때보다 훨씬 낮은 주파수였다. 몸통이 클수록 진동도 낮아지는 거라면, 저 문 너머에 있는 건 왕종보다 최소 두 배는 큰 놈이었다.
나는 그 문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돌아갈까, 들어갈까.
몸은 돌아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어깨는 부러졌거나 빠졌고, 발목은 절뚝거렸다. 지금 상태로 저 안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였다. 그런데 다리는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방세도, 밥값도 다 나중 일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저 진동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