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0만 명 실종, 나만 남다

1화

새해 첫날이라고 해서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거실에서는 부모님이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가 낮게 웅웅거렸고,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라는 문자 몇 개가 쌓여 있었지만 답장할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고, 어차피 나는 명절이나 연휴 같은 날에 유난스럽게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단체로 불꽃놀이를 보러 간다며 부르는 메시지를 무음으로 넘겨버렸는데, 그런 데에 굳이 끼지 않아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혼자 있는 게 편했다. 정확히 말하면 남과 보폭을 맞추는 일에 유독 진이 빠지는 부류의 인간이었고, 그래서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도 굳이 무리를 만들지 않았다. 반 애들이 몇 번 같이 놀자고 찔러본 적도 있었지만, 나는 늘 적당한 핑계를 대며 빠져나왔고 그게 반복되니까 어느샌가 다들 나를 그런 애로 분류해줬다. 편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라는 게. 창밖에서 새해를 알리는 폭죽 소리가 간간이 터졌고,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라면 물이 끓는 걸 확인하러 부엌으로 나갈까 말까 고민하는 것 외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휴대폰 화면 밝기를 줄였다가 다시 올렸다가, 딱히 볼 것도 없는 뉴스 피드를 손가락으로 몇 번 밀어 넘기다가, 결국 다시 잠금 화면으로 돌려놓았다. 새해라고 해서 인생이 갑자기 달라질 것도 아니고, 어차피 작년의 나나 올해의 나나 크게 다를 게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확신이 얼마나 순진한 착각이었는지는, 그 직후에야 알게 됐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방 안의 불빛이 이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형광등이 나가려나 보다 싶어서 별생각 없이 스위치를 두어 번 껐다 켰는데, 문제는 형광등이 아니라 공간 자체였다. 벽지의 무늬가 물결처럼 일렁이는 걸 본 순간 나는 손끝에서부터 소름이 확 올라오는 걸 느꼈고, '이건 조명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 판단이 들었을 때는 이미 발밑의 바닥이 무너지듯 꺼지고 있었다. 균형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지만 잡을 것이 없었고, 시야 전체가 새하얀 빛으로 잠식되면서 속이 뒤집히는 듯한 부유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놀이공원 자유낙하 기구를 열 배쯤 세게 당겨놓은 느낌이랄까, 그런 실없는 비유가 뇌리를 스치는 와중에도 몸은 계속 아래로, 혹은 어딘가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설마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정신을 놓아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냉기였다. 등에 닿는 바닥이 지나치게 차가워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온몸이 부르르 떨렸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도무지 내 방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사방이 백색 대리석 같은 재질로 매끈하게 마감돼 있었고, 천장에는 붉은빛을 내는 기하학적 문양이 은은하게 새겨져 있어서 마치 거대한 신전 내부에 들어와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벽면을 따라 손끝으로 훑어보니 표면이 지나치게 매끄러워서, 인간의 손으로 다듬은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습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공기 속에서, 나는 두 발로 일어서서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 창문도 없고 문도 하나뿐인 사각형의 방이라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대리석 바닥의 이음새를 손톱으로 긁어봤는데, 이음새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러울 만큼 매끈했다. 마치 하나의 돌덩이를 통째로 깎아 만든 방 같았다. '외계인한테 잡혀온 건 아니겠지.' 그런 실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황이 비현실적이었지만, 정작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손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떨림을 억누르려고 주먹을 꽉 쥐면서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이상하게 차갑고 담백해서, 방 자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숨을 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헛생각까지 들었다. 방을 한 바퀴 더 돌면서 벽을 툭툭 두드려봤다. 소리가 이상하게 먹먹했다. 마치 벽 너머에 텅 빈 공간이 있는 것처럼, 혹은 벽 자체가 소리를 삼켜버리는 재질로 만들어진 것처럼. 나는 그 벽에 등을 붙이고 서서 문 쪽을 노려봤다. 문이라고 해봐야 특별한 장식도 없이 그냥 사각형으로 파여 있는 틈 같은 것이었는데, 그 너머에서 뭔가 다가오는 기척이라도 있을까 봐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적만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정적이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그때, 눈앞에 반투명한 사각형의 창이 스르륵 떠올랐다. 마치 게임 인터페이스처럼 생긴 그 창 안에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다가, 점차 익숙한 한글로 정렬되기 시작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한 발짝 물러났지만, 그 창은 나를 따라 시야 안으로 계속 떠 있었다. 마치 눈알에 붙어있는 것처럼. 심장이 한 번 크게 쿵 하고 뛰는 걸 느끼면서, 나는 그 창의 첫 줄을 읽어 내려갔다. [대상자 확인 중... 강태현. 대한민국. 17세.] 내 이름과 나이가 저렇게 시스템 창에 뜨는 걸 보는 순간, 온몸에 오한이 훅 끼쳤다. '이거 완전 그 클리셰 아닌가.'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삼키면서도, 나는 그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다룬 웹소설이나 만화를 몇 편 봤던 기억이 스쳤지만, 그 안에서 주인공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작 필요할 땐 쓸모없는 기억력이었다. 다음 줄이 이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등록 완료. 참가자 자격이 부여되었습니다.] 그 문장을 다 읽은 순간, 방 안쪽 벽이 소리 없이 갈라지며 새로운 문이 나타났다. 갈라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아서,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문이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그 문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 문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몰랐지만, 이 상황에서 얌전히 방구석에 앉아 기다리는 게 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시스템 창은 여전히 내 시야 한쪽에 남아서 깜빡이고 있었고, 그 아래로 작은 글씨가 하나 더 떠올랐다. [제한 시간: 00:04:59]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하는 걸 본 순간, 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참가자 자격'이라는 표현이 유독 목에 걸리는 가시처럼 남았고, 저 시간이 다 되기 전에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압박감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바람이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 바람에는 낯선 냄새가 섞여 있었다. 흙 냄새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탄내가 섞인, 도시에서는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다. 나는 그 문턱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확신도 없이, 나는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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