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숨을 죽인 채 모퉁이 쪽으로 시선을 조심스레 돌리자, 그곳에 웅크리고 있던 생물체의 형체가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인간의 것과 비슷한 몸통에 유난히 긴 팔다리를 가진 초록빛 피부의 존재였는데, 얼굴 부위에 이렇다 할 눈이나 코가 없이 오직 세로로 벌어진 입 같은 것만 있는 모습이 어딘가 기괴했다. '고블린인가, 뭔가.' 게임에서 백 번은 봤을 법한 형체였지만 실물로 마주하니 속이 뒤틀리는 이질감이 확 밀려들었다. 화면 속 몬스터야 죽으면 폴리곤처럼 흩어지고 끝이었지만, 지금 눈앞의 저건 냄새가 났다. 축축하고 비릿한, 살아 있는 것의 냄새였다.
나는 숨을 최대한 낮추며 그 존재의 움직임을 관찰했는데, 놈은 아직 나를 알아채지 못한 듯 벽에 등을 대고 뭔가를 뜯어먹는 데 열중해 있었다. 대체 뭘 먹고 있는 건지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세로로 벌어진 입 사이로 뭔가 질척한 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위장이 조여드는 기분이었으니까. '식사 시간에 미안하지만.'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세를 낮췄다.
[예리한 감각]이 다시 관자놀이를 지끈거리게 하면서, 그 존재의 등 뒤 사각지대가 유독 취약해 보인다는 감각적 신호를 보내왔다. 신기하게도 그 신호는 마치 화살표라도 그려주는 것처럼 명확했다. 등판의 어느 지점, 목덜미 바로 아래. 게임으로 치면 크리티컬 포인트를 표시해주는 셈이었다. '고맙긴 한데, 이 정도면 반칙 아닌가.' 나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주변에 떨어진 철제 파이프 같은 것을 발견하고 조심스레 집어 들었는데, 손에 닿는 감촉이 차갑고 묵직해서 그나마 무기가 될 만하다는 판단이 섰다. 표면에는 녹이 슬어 있었고, 한쪽 끝은 누군가 억지로 뜯어낸 듯 날카롭게 휘어 있었다. '이걸로 되겠나.'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나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서, 놈의 등 뒤로 조용히 다가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나는 그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이를 악물며 거리를 좁혔다. 한 걸음, 두 걸음. 발바닥에 닿는 바닥의 냉기가 신발 밑창을 뚫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세 걸음째에 들어서자 놈의 등에 난 거친 돌기 같은 것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 옆으로 흘러나오는 거친 숨소리까지 들려왔다. '조금만 더.'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배어 파이프를 쥔 손아귀가 미끄러질 것 같았지만, 나는 그럴수록 더 세게 움켜쥐었다.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놈이 예상보다 빠르게 몸을 틀며 세로로 벌어진 입을 쫙 벌리고 달려들었다. 감각이 경고했던 것보다도 반응이 빨랐다. 아무래도 저 예리한 감각이라는 것도 완벽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파이프를 휘둘렀고, 쇳덩이가 놈의 어깨를 강타하며 둔탁한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는데, 그 반작용으로 팔목까지 얼얼한 통증이 치솟아 올랐다. 손목이 부러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충격이었지만, 다행히 뼈는 멀쩡했다.
놈은 비명 같은 괴성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달려들었고, 나는 몸을 낮추며 놈의 다리를 걷어차 균형을 무너뜨린 다음, 쓰러지는 틈을 놓치지 않고 파이프 끝을 놈의 목덜미에 내리찍었다. 뾰족하게 휘어 있던 파이프 끝이 살가죽을 뚫고 들어가는 감각이 손끝을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놈이 완전히 축 늘어지는 걸 확인한 순간, 시야 한구석에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하급 미궁종 처치. 경험치 획득.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그 짤막한 축하 문구를 보면서도 나는 웃을 여유가 없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방금 전까지 살아 움직이던 것을 내 손으로 쓰러뜨렸다는 감각이 뒤늦게 위장을 뒤흔들었다. 게임에서는 그냥 클릭 한 번이면 끝나는 일이었는데, 실제로 해보니 손끝부터 어깨까지 저리는 느낌이 한참을 갔다. 파이프 끝에 묻은 검붉은 액체를 바닥에 대충 문질러 닦아내면서, '적응해야 한다.'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런 감각에도 무뎌져야 할 테니까. 나는 놈의 사체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살폈지만 딱히 쓸 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게임이라면 아이템이라도 하나 떨어졌을 텐데, 여기는 그런 서비스 정신은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파이프를 다시 고쳐 쥐고 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여전히 어두웠고, 벽을 타고 흐르는 습기 때문인지 발소리가 이상하게 울려 퍼졌다. 두 번째 갈림길에서는 오른쪽 길을 택했는데, [예리한 감각]이 그쪽에서는 별다른 위협 신호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름의 나침반이 있다는 게 이렇게 든든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안심할 틈은 오래가지 않았다. 복도 두 개를 지나 넓은 공간으로 들어선 순간, [예리한 감각]이 관자놀이를 격렬하게 두들기며 사방에서 위협 신호를 쏟아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도였다. 마치 누군가 관자놀이 안쪽에서 북을 두드리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나는 그 신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채 파악하기도 전에, 천장과 벽면 여기저기서 방금 마주쳤던 것과 비슷한 초록빛 형체들이 우르르 쏟아지듯 나타나는 걸 목격했다. 대략 여섯, 일곱 마리는 되어 보였고, 하나는 몰라도 이 정도 숫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이건 매복이었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이 삽시간에 전신을 뒤덮었다.
넓은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사실 사방이 막힌 반원형 방이었다. 천장은 예상보다 높았고, 그 높이 곳곳에 크랙처럼 갈라진 틈이 있었는데, 그 틈에서 저것들이 벌레처럼 기어 나오고 있었다. 조명이라고는 벽 틈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초록빛뿐이었는데, 그게 놈들의 피부색과 뒤섞여서 방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아까 그 한 마리는 파수병이었나, 나머지는 본대였나.' 그런 쓸데없는 분석을 할 여유가 있는 걸 보면 아직 정신은 붙어 있는 모양이었지만, 몸은 이미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뛰기 시작했지만, 뒤에서 쏟아지는 발소리와 괴성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발소리 하나하나가 갈라진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렸고, 그 위로 겹쳐지는 여러 마리의 숨소리가 뒤통수를 훑고 지나갔다. 다리에 온 힘을 실어 달리면서도 [예리한 감각]이 좌측 벽 너머에서 또 다른 무리가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했고, 나는 이를 악물고 방향을 꺾으려다 발밑에서 뭔가에 걸려 크게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하필이면 아무것도 아닌 돌부리 같은 것에 걸려서.
넘어지는 순간 무릎이 대리석 바닥에 강하게 부딪히며 뼈까지 저리는 통증이 치솟았고, 뒤이어 등 뒤로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옷깃을 스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빗나간 느낌이었다. 온몸의 감각이 곤두선 채로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시야가 붉게 물들며 경고 문구가 떠올랐다.
[경고: 생명력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습니다.]
'빗나간 게 아니었나.' 그 뒤늦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가는 것과 동시에, 나는 등 전체를 관통하는 둔한 충격을 느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부딪힌 턱에서 뜨거운 통증이 번졌고, 시야 가장자리부터 빨갛게 물든 경고창이 점점 흐릿해져 갔다. 등 뒤에서 놈들의 발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왔고, 나는 손끝 하나 움직일 힘도 남지 않은 채로, 눈앞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