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문이 열린 자리에서 서늘한 바람이 흘러나왔다. 실내에 있던 공기와는 확실히 다른, 어딘가 깊은 지하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나는 그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는데, 발을 들여놓는 순간 뭔가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마치 게임에서 튜토리얼을 끝내고 본 게임으로 넘어가는 로딩 화면을 보는 기분이었다면 그나마 낫겠지만, 이건 세이브 파일도 없고 리트라이 버튼도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방 안에 계속 머물러 있는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질 리는 없다는 판단이 서자, 나는 결국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발바닥에 닿는 바닥의 촉감이 방 안의 그것과 미묘하게 달랐다. 좀 더 차갑고, 좀 더 단단했다. 문지방을 넘는 순간 눈앞의 시스템 창이 다시 크게 펼쳐지면서, 이번엔 훨씬 더 자세한 정보들이 줄줄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창이 눈앞을 완전히 가리는 것도 아닌데, 정보량 자체가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상태창]
이름: 강태현
레벨: 1
칭호: 없음
스킬: [예리한 감각] (Lv.1)
스킬 항목 아래에는 짧은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위협을 사전에 감지하는 능력이 소폭 강화됩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문장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 왼쪽 관자놀이 부근이 지끈거리는 걸 느꼈고, 마치 뇌 한구석에 새로운 감각 회로가 강제로 이어붙는 듯한 낯선 감촉이 밀려들었다. 두통약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이 시설 어딘가에 편의점 같은 게 있을 리는 없겠지. '이게 각성이라는 건가.' 쓴웃음이 나면서도 손끝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떨림을 다잡으려고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면서, 마치 운동 전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처럼 손목을 몇 번 돌려보기도 했다. 실없는 행동이라는 건 알았지만, 뭐라도 몸을 움직여야 정신이 붙잡히는 느낌이었다.
다음 문장을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속으로 이 상황을 게임 설명서처럼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조금이라도 덜 무섭게 느껴졌으니까.
[안내: 참가자는 무한 미궁의 각 층을 순차적으로 통과해야 합니다. 통과 조건이 충족되기 전까지 상위 층으로의 강제 귀환은 불가합니다.]
'무한 미궁'이라는 단어가 눈에 딱 박혔다. 무한이라니, 참 성의 없는 작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 짓는 놈이 상상력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정말로 끝이 없다는 뜻이거나. 둘 다 마음에 안 드는 답이었다. 나는 속으로 되물었다. '그럼 여기서 나가는 방법은 대체 뭔데.' 마치 내 질문을 들은 것처럼 창은 곧바로 다음 문장을 띄웠다. 반응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서, 이게 정말 어떤 시스템이 내 생각을 읽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순서대로 나오는 정보를 내가 우연히 딱 맞춰 궁금해한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탈출 조건: 최상위 층 도달, 혹은 자격 포기 신청, 혹은 생명 활동 정지. 셋 중 하나가 충족될 시 참가 자격이 해제됩니다.]
생명 활동 정지라는 표현이 그냥 죽음을 돌려 말한 것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실소를 흘렸다. '결국 죽거나, 다 깨거나, 아니면 포기하거나. 셋 다 마음에 안 드는데.' 포기 신청이라는 항목이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됐지만, 그걸 누른다고 순순히 집으로 돌려보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런 걸 만든 놈들이 그렇게 인심이 좋을 리 없다는 게 내 경험적 결론이었다. 세상에 공짜 탈출구를 만들어주는 시스템 따위는 없다는 걸, 나는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만약 포기 버튼을 눌렀을 때 상냥한 안내 음성이 나오면서 '수고하셨습니다, 안전하게 귀가하세요' 같은 문구가 뜬다면, 그거야말로 이 시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무서운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창을 몇 번 더 넘겨보니 이 시설 전체에 대한 개요 같은 항목이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청소년들이 무작위로 선발되어 이곳으로 이송됐다는 문구, 그리고 이송된 인원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전체 참가자 수: 100,000명 이상'이라는 숫자를 보는 순간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십만 명이라는 숫자가 손끝을 타고 실감으로 옮겨오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학교 운동장에 다 모아놓고 세어도 절대 셀 수 없는 규모였다. '나 혼자 겪는 일이 아니었구나.' 안도인지 불안인지 애매한 감정이 가슴 한복판에서 뒤섞였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위로가 되는 동시에, 그 많은 사람 중에 대체 몇 명이나 살아서 이 미궁을 걸어 나갈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오히려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딘가에 다른 한국 애들도 끌려와 있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살아있는지조차 확인할 방법이 지금은 전혀 없었다. 같은 학교 애들일 수도 있고, 전혀 모르는 지역의 낯선 얼굴일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든 지금 당장은 아무 의미도 없는 상상이었다.
복도는 생각보다 길었다. 백색 대리석 바닥은 방과 똑같이 이어져 있었고, 벽면을 따라 붉은 문양이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었는데, 그 문양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은은하게 명멸하는 걸 보면서 나는 이곳의 규모가 결코 작지 않다는 걸 짐작했다. 문양 하나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글자나 그림 같기도 했는데, 내가 아는 어떤 문자 체계와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이 시설을 만든 존재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치자, 나는 애써 그 생각을 접어두었다. 지금 당장 확인할 수도 없는 걸 붙잡고 있어봐야 걸음이 느려질 뿐이었다.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천장 쪽에서 미세한 진동음이 들려왔다. 마치 거대한 기계가 어딘가에서 돌아가고 있는 듯한 낮은 울림이었는데, 그 소리가 계속되는지 사라졌는지도 헷갈릴 만큼 희미했다.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걸음을 옮겼다. 얼마쯤 걸었을까, 복도 끝에서 습기와는 다른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축축하고 비릿한, 뭔가 살아 있는 것의 냄새였다. 도축장 근처를 지나갈 때 나던 냄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여기에 도축장이 있을 리는 없으니 결국 저 냄새의 근원은 살아 있는 무언가일 확률이 높았다.
나는 걸음을 늦추면서 [예리한 감각]이 알려주는 낯선 신호에 집중했다. 관자놀이 부근이 다시 지끈거리며, 시야 한 귀퉁이에 붉은 점이 하나 떠올랐다. 그 점은 정확히 복도 모퉁이 너머를 가리키고 있었다. 스킬이란 게 이렇게 곧바로 실감 나게 작동할 줄은 몰랐다. 방금까지는 상태창에 적힌 텍스트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내 시야를 직접 침범하며 뭔가를 경고하고 있었다. '뭔가 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벽에 등을 붙였고,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모퉁이 너머에서 낮은 숨소리 같은 것이 규칙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람의 숨소리라기엔 너무 굵고, 짐승의 숨소리라기엔 너무 규칙적인, 어느 쪽으로도 확신할 수 없는 그 소리에 나는 숨을 죽인 채 다음 순간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