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소리의 근원을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그 규칙적인 긁힘음은 마치 손톱으로 철판을 긁어내리는 듯한 소리였는데, 정확히 무엇이 내는 소리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몸을 최대한 낮추고 통로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밑에서 대리석 바닥이 미세하게 갈라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지만, 그걸 신경 쓸 정신적 여유 같은 건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다. '이 미궁이란 곳은 어째서 벽마다 함정을 숨겨놓는 취미가 있는 건지.' 방금 전 전투의 여파인지, 원래부터 부실했던 구조였는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나는 그 갈라진 자리를 밟는 순간 발밑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감각을 느끼며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이건 또 뭐야.' 어이없는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삼키면서도, 나는 떨어지는 와중에 벽면을 스치듯 붙잡아 낙하 속도를 조금이나마 줄이려 애썼다. 손끝에서 살갗이 벗겨지는 듯한 화끈함이 스쳤지만, 지금 그 정도 고통을 따질 처지는 아니었다. 결국 등을 크게 부딪히며 아래층으로 굴러떨어졌고, 잠깐이지만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마치 누가 뒤통수를 스매싱으로 후려친 것 같은 감각이었다.
등판에서 다시 둔탁한 통증이 치솟았지만, 방금 시스템이 응급 처치라도 해준 덕분인지 예전만큼 치명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확실히 죽다 살아나는 경험을 반복하다 보니 몸이 알아서 대처법을 익히는 건지, 아니면 시스템이란 놈이 생각보다 자비로운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나는 신음을 삼키며 몸을 일으켜 세웠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눈앞의 광경에 잠시 말을 잃었다.
이곳은 지금까지 지나온 백색 복도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벽면 전체가 검붉은 금속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 금속 표면은 마치 오래 방치된 녹처럼 거칠고 축축한 질감을 띠고 있었다. 바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푸른빛으로 은은하게 새겨져 있었고, 그 빛이 마치 심장처럼 미약하게 명멸하고 있는 게 눈에 걸렸다. 공간 곳곳에는 부서진 석상 같은 조형물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팔이 잘려 나가거나 얼굴이 뭉개진 형태들이라 정확히 무엇을 형상화한 건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누가 여기다 이런 걸 세워둔 거야. 취향이 참 독특하시네.'
시스템 창을 확인해봐도 이 구역에 대한 정보는 뜨지 않았다. 그저 [미등록 구역]이라는 짤막한 문구만 나타날 뿐이었다. 나는 그 문구를 몇 번이나 눌러보며 추가 설명이 나오길 기다렸지만, 시스템은 그 이상의 친절을 베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역시 이놈도 필요할 때만 말이 없어지는 타입인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나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구역 안쪽 깊숙한 곳에 낡은 나무 상자와 그 주변에 흩어진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경계하며 다가갔는데, 상자 표면은 오랜 시간 방치된 듯 나뭇결이 갈라지고 곳곳에 거미줄 같은 실선이 얽혀 있었다. 발로 살짝 건드려봤지만 딱히 함정 반응은 없었다. 그제야 나는 손을 뻗어 상자 뚜껑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상자 안에는 반짝이는 금빛 동전 여러 개가 쌓여 있었고, 그 표면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손으로 하나 집어 들자 손끝에 미세한 온기와 함께 나지막한 진동이 느껴졌는데,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의 심박처럼 느껴져서 순간 손을 놓아버릴까 고민했다. 그 순간 시스템 창이 떠오르며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마정금화. 미궁 내 거래 시설에서 사용 가능한 화폐입니다.]
'거래 시설이 있다는 건, 여기서 뭔가를 사고파는 놈들이 있다는 소리인데.' 나는 동전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생각했다. 미궁이라는 곳이 단순히 몬스터와 함정만 있는 살육의 무대가 아니라, 그 안에서도 누군가는 장사를 하고, 누군가는 그 물건을 사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이 지옥 같은 공간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달라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폐허 속에서 편의점 간판을 발견한 것 같은, 뭐라 설명하기 애매한 안도감이랄까.
그 생각과 동시에 상자 옆 벽면에 눈에 익은 글자가 새겨져 있는 걸 발견했다. 처음엔 그저 벽의 얼룩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칠 뻔했는데, 시선이 우연히 그 위를 스치는 순간 나는 가슴이 조여 오는 걸 느끼며 그 앞으로 다가섰다. 벽에는 누군가가 날카로운 도구로 급하게 긁어놓은 듯한 한글 낙서가 남아 있었다.
'3층 거래소, 안전. 한국인 여기 있음.'
그 짧은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눈으로 읽는 걸로는 부족해서 손끝으로 글자를 하나씩 짚어가며 다시 확인했다. 손끝이 떨리는 걸 느끼며, 나는 낙서 아래에 덧붙여진 작은 표식—숫자와 화살표 같은 것이 뒤섞인 낙서를 뜯어보았다. 마치 다음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정작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이곳의 구조를 모르는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화살표 옆에는 작은 동그라미 두 개와 사선 하나가 그어져 있었는데, 그게 어떤 암호 체계인지, 아니면 그저 급하게 긋다가 손이 미끄러진 흔적인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 말고 진짜로, 살아 있는 한국 애들이 있다는 거잖아.' 안도감과 초조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이 미궁을 홀로 헤쳐 나가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시스템도, 몬스터도, 함정도 전부 나 하나만을 시험하는 무대라고 여겼던 셈이었는데, 이 낙서 하나가 그 전제를 완전히 흔들어버렸다. 이 거대한 미궁 어딘가에 나와 같은 처지의 생존자들이 존재하고, 그들끼리 거래를 하며 정보를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홀로 부딪혀온 이 상황에 처음으로 실낱같은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 낙서를 남긴 사람이 지금은 어디에 있을지, 살아 있기는 한 건지 하는 불안도 함께 스며들었다. '급하게 긁은 글씨체를 보면, 여유롭게 남긴 메모는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그 낙서를 몇 번이나 눈에 새기듯 바라본 뒤, 마정금화 몇 개를 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이 미등록 구역을 좀 더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상자 주변에 흩어진 다른 물건들도 확인해볼 요량이었다. 부서진 조형물 파편 사이에 뭔가 반짝이는 게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녹슨 단검 한 자루와,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뒤덮인 낡은 종이 뭉치가 있었다. 종이는 손을 대는 순간 바스러질 것처럼 삭아 있어서 함부로 만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상자 뒤편으로 걸음을 옮기던 순간, 등 뒤에서 다시 그 낮고 규칙적인 긁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위층에서 들었던 것과 똑같은 소리였는데, 이번엔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서, 그것도 두 방향에서 동시에 울리고 있었다. 마치 좌우에서 각각 다른 손톱이 벽을 긁어내리는 것 같은, 소름 돋는 대칭적인 리듬이었다. 나는 숨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지만, 몸을 움직이는 손끝만큼은 최대한 태연하게 유지하려 애썼다.
그리고 그 순간, 시야 한구석에 붉게 물든 경고 문구가 다시 떠올랐다. [예리한 감각(강화)]가 알려주는 위협의 규모는, 이전에 마주쳤던 그 어떤 무리보다도 훨씬 크고 낯설었다. 맥박이 빨라졌다. '이건 도망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닌데.'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두 방향에서 다가오는 그 소리의 근원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