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결혼으로 살아남기로 했다

1화

빗물이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흘째 그치지 않았다. 처음 하루는 그냥 장맛비인가 했고, 이틀째는 슬슬 불안해졌고, 사흘째가 되니 이건 그냥 하늘이 우리 집을 아예 지워버리려는 작정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과수원은 이제 과수원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모양새였는데, 흙탕물이 밭이랑을 통째로 삼켜버린 자리에 뿌리 뽑힌 사과나무 몇 그루가 배를 뒤집은 채 떠 있었다.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나무뿌리를 보고 있자니 왜인지 웃음이 나왔다. 저게 우리 집 전 재산이었는데,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재산이라니, 재산이라는 단어를 쓸 자격이 있긴 했나. 통장에 잔고가 있어야 재산이라 부르지, 저건 그냥 물에 잠긴 나무토막들 아닌가.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그런 자조적인 생각에 빠져 있는데, 문 너머에서 낮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창고에 남은 사과도 없어졌어요." 집사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원래도 조금 갈라진 목소리인데, 지금은 그 갈라짐이 배는 더 심했다. 남은 수확물이라는 게 애초에 몇 상자 되지도 않았지만, 그것마저 누군가 밤사이 훔쳐 갔다는 말에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게 느껴졌는데, 이게 화가 나서 뛰는 건지 무서워서 뛰는 건지 구분이 안 갔다. 둘 다겠지, 아마. 아니 어쩌면 셋일지도. 화, 두려움, 그리고 어이없음. "확실해요? 다시 찾아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이 낡은 저택 어디에도 숨겨둘 만한 여유 공간이 없다는 걸, 나는 지난 열여섯 해 살면서 뼈저리게 배웠으니까. 창고라고 해봐야 삐걱거리는 문짝 하나에 선반 두 개가 전부인 곳이었고, 거기 숨길 게 있었다면 애초에 도둑맞을 일도 없었을 거다. 하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슬리퍼를 신고 방문을 열었다. 복도로 나가니 아버지가 서재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뒷모습이 어찌나 작아 보이던지 순간 걸음을 멈췄다. 남작이라는 직함이 무색하게, 아버지는 그저 평범한 중년 사내처럼 어깨가 축 처져 있었고, 등에는 밤새 짊어진 근심의 무게가 그대로 얹혀 있는 것 같았다. 어깨선이 저렇게 처질 수도 있구나, 사람 몸이라는 게. "아버지." "서인이냐." 돌아본 아버지의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 밤새 한숨도 못 잔 얼굴이었다. 눈 밑이 시커멓게 죽어 있는 걸 보니 정말로 한숨도 못 잔 게 맞구나 싶었다. "과수원이... 전부 쓸려나갔다는구나. 남은 수확물도 도둑맞았고. 이제 도훈이 입학금은 어찌해야 할지..." 말끝이 흐려지는 걸 들으며 나는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왕립학원 입학금, 삼둥이들 끼니, 밀린 하인들 급여, 그리고 이 저택을 유지하는 데 드는 최소한의 비용까지. 손가락을 접어가며 하나씩 세어봤는데 다섯 손가락이 모자랐다.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것들뿐인데 통장에는, 아니 이 세계엔 통장이라는 게 없으니 금고에는 동전 몇 개가 굴러다니는 게 전부였다. 그것도 세어보면 손에 다 잡히는 숫자였다. "작위를 반납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중얼거린 그 한마디가 복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복도의 공기가 한 톤 더 무거워진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작위를 반납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귀족의 이름표를 떼는 순간 이 집안 전체가 평민으로 강등되고, 도훈의 학원 입학 자격도 사라지고, 삼둥이들은 물론이고 아버지까지 어디 가서 몸을 갈아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상상을 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버지가 밭에 나가 삽질을 하는 모습, 도훈이 학원 대신 시장 어딘가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모습, 다섯 살짜리 삼둥이들이 끼니를 걱정하는 모습. 그림이 너무 선명하게 그려져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아버지,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나 자신도 몰랐다. 딱히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그저 저 무너지기 직전인 어깨를 보고 있자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만 앞섰다. 시간을 달라니, 시간이 있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통장을 마법처럼 채워줄 요정이라도 부를 건가. 그런데도 입에서는 이미 그 말이 튀어나가버렸고, 아버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재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복도에 혼자 남아 창밖의 흙탕물을 내려다보았다. 빗줄기가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이, 마치 이 집안 전체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걸 지켜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결혼. 머릿속에 그 단어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이 가문을 살릴 방법이 결혼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삼십 초도 되지 않았는데, 그게 이상하게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오히려 더 무서웠다. 마치 언젠가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있는 것처럼, 결혼이 가문을 구제하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라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계산이 너무 빠르게, 너무 매끄럽게 나왔다. 시골 영애가 이런 걸 이렇게 즉각적으로 떠올릴 리가 있나. 그런데 왜 이렇게 익숙하지? 낯선 세계에서 나고 자란 시골 영애가, 결혼이 곧 가문의 구원이라는 이 냉정한 계산에 아무런 이질감도 느끼지 못한다는 게 스스로도 이상했다. 마치 다른 삶에서 이미 이런 셈을 해본 것처럼. 그 생각이 든 순간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낯선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는데, 형체가 뚜렷하지 않은 조각들이라 붙잡을 수도 없었다. 서류 뭉치, 낯선 사무실 풍경, 누군가의 목소리 같은 것들이 짧게 번쩍였다가 사라졌다. 뭐지, 방금 그건. 머리를 흔들어봤지만 잔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관자놀이만 계속 뻐근하게 아팠다. "누나!" 계단 아래에서 도훈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확 돌아왔다. 열두 살짜리 남동생이 두 손 가득 뭔가를 들고 올라오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삼둥이들이 그림을 그린 종이였다. 라온, 루온, 레온. 다섯 살짜리 삼둥이는 아직 이 집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모르는 눈치였고, 그림 속에는 삐뚤빼뚤한 사과나무와 웃는 얼굴들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저 그림 속 사과나무는 아직 뿌리가 뽑히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 "누나, 얘들이 그림 그려달래서 배고프다는데." 도훈의 목소리에서 애써 감추는 불안이 느껴졌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종이를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열두 살이 이 정도로 어른스러워야 한다는 게 마음이 아팠지만, 지금 감상에 젖을 여유는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누나가 어떻게든 해볼게." 어떻게든이라는 말이 얼마나 공허한지 나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도훈도 아는지 별다른 대꾸 없이 그림들을 내 손에 밀어 넣고는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그 작은 등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그 순간, 결혼이라는 답이 다시 한번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며 이상한 확신이 자리 잡았다. 사교계 데뷔. 결혼. 이 두 단어가 지금 내게 주어진 유일한 카운트다운의 시작이었다. 거울조차 없는 이 시골 저택에서, 딸기갈색 머리와 주근깨투성이 얼굴을 한 내가 사교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그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는 것. 살아남지 못하면 아버지도, 도훈도, 삼둥이들도 전부 길바닥에 나앉는다는 것. 창밖으로 빗줄기가 여전히 굵게 쏟아지고 있었다. 저 빗줄기가 그치면, 나는 이 저택을 떠나 처음으로 사교계라는 낯선 전장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그 전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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