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파티 준비에 정신이 팔린 사이, 왕립학원에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하루 앞두고서야 깨달았다. 도훈의 입학 관련 추가 서류였는데, 이걸 놓치면 그나마 남아 있던 입학 기회마저 완전히 사라질 판이었다. 어제 저녁까지 파티 드레스 소매 길이를 재고 있다가 문득 책상 위에 놓인 학원 안내문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제출 마감이 내일 정오라니. 이걸 어제 봤어야 했는데,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집안 형편에 하녀를 더 부릴 여유는 없었고, 그렇다고 이 중요한 서류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혼자 마차를 잡아타고 왕립학원으로 향했다. 마차 안에서 서류 봉투를 몇 번이나 확인했는지 모른다. 도장이 빠진 건 아닌지, 서명이 틀린 칸은 없는지, 손으로 종이를 쓸어보며 몇 번을 되짚었다. 이게 잘못되면 도훈의 앞날이 여기서 끝나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니 손끝이 다 저릴 지경이었다.
학원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위압적이었다. 새하얀 석조 건물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정문을 지나는 순간부터 사방에서 느껴지는 냉랭한 시선들이 이곳이 얼마나 폐쇄적인 세계인지 알려줬다.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나를 위아래로 훑는 눈빛들이 어찌나 따갑던지, 옷깃을 다시 여미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시골에서 온 몰락 귀족 영애가 이 안에서 얼마나 초라해 보일지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기 걸어 다니는 학생들 옷차림만 봐도 우리 집 한 달 생활비가 저 소매 자수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었으니까.
서류 제출 창구를 찾아 헤매다가 길을 잃었다는 걸 깨달은 건 한참을 걸은 뒤였다. 복도가 미로처럼 얽혀 있어서 왔던 길을 되짚기도 어려웠고, 벽마다 걸린 초상화와 방패 문양은 다 비슷비슷해 보여서 방향감각을 완전히 잃게 만들었다.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물어봐도 다들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대답을 피할 뿐이었다. 한 명은 대놓고 "여기 학생이세요?"라며 되묻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가버렸다. 이게 뭔가, 사람이 길을 물어보는데 이렇게까지 냉대할 일인가. 시골 촌뜨기 취급을 받는 것도 익숙해질 법한데, 매번 이럴 때마다 속에서 뭔가 뜨겁게 치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참을 방황하다 결국 한적한 뒤뜰까지 흘러 들어갔는데, 인적이 드물어서 오히려 안심이 되던 참이었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가 하나 놓여 있었고, 저 멀리서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만 들렸다. 여기서 잠깐 숨이라도 돌리고 다시 찾아봐야겠다 싶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마주쳤다.
은발이었다. 흔치 않은 은빛 머리카락이 오후의 흐린 빛을 받아 서늘하게 반짝였고, 투명한 청옥색 눈동자가 나를 향해 천천히 돌아왔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청년이었는데,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 공기가 무겁게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벤치 근처에 서서 책을 읽고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다가가는 기척에 고개만 살짝 돌린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그 시선 하나에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버렸다. 이게 사람이 주는 위압감이라는 건가. 살면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길을 잃으신 것 같은데요."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감정이 거의 실려 있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그 목소리 하나에 다리가 붙잡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순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는데,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게 느껴졌다. 이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냥 저 사람이 입을 열 때마다 공기가 한 톤씩 낮아지는 것 같다는 착각만 들었다.
"네, 서류 제출 창구를 찾고 있었는데 길을 잃었어요."
최대한 침착한 척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이런 데서 당황한 티를 내면 더 우스워 보이겠지 싶어서 억지로 어깨를 펴고 서 있었는데, 속으로는 아까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청년은 잠시 나를 살펴보더니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손짓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두 번째 계단을 올라가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그가 갑자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드레스, 매듭이 이상하군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오늘은 유리가 준 드레스를 입지 않았는데, 어제 미리 입어보다가 급하게 벗어놓느라 매듭 부분을 제대로 확인 못 한 옷자락 일부가 겉옷 사이로 삐죽 나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침에 서둘러 나오면서 겉옷 안에 대충 걸쳐 입은 채로 잊고 있었던 거다. 이 사람이 그걸 알아챘다고? 그것도 이렇게 짧게 스쳐보고?
"이게 왜요?"
되도록 아무렇지 않게 되물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 매듭은 보통 뒤가 아니라 앞에서 묶는 방식입니다. 뒤로 묶으면 걸을 때 풀리도록 만들어진 구조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걸을 때 풀리도록 만들어진 구조라니. 그게 사실이라면 유리가 준 그 드레스는, 내가 파티에서 사람들 앞에서 옷이 벗겨지도록 설계된 함정이라는 뜻이었다. 하늘이 노래지는 게 딱 이런 느낌인가 보다. 만약 저 청년을 만나지 못하고 그냥 파티에 나갔더라면, 나는 지금쯤 웃음거리가 될 걱정을 하고 있었을 게 아니라, 이미 웃음거리가 된 채로 집에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울고 있었을 거다.
"확실한 건가요?"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디자인을 배운 적이 있어서 압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감정이 없었지만, 그 안에서 뭔가 미묘한 냉소가 느껴졌다. 마치 이런 유치한 함정을 꾸민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간다는 듯한, 아니면 이런 수작을 부리는 사람들을 이미 여러 번 봐왔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유리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 상냥한 웃음 뒤에 이런 걸 숨기고 있었다니, 참 대단한 사람이다 싶었다. 대단하다는 게 감탄이 아니라 순전히 욕이라는 걸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제 이름은 강서인이에요.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건네자 그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진입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왜인지 모르게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은발에 청옥색 눈동자, 학원 안에서 이런 위압감을 풍기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도대체 무슨 신분을 가진 인물인지, 나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귀족가 자제라기에는 뭔가 다른 결이 느껴졌고, 그냥 학생이라기에는 눈빛이 너무 차분했다. 다만 확실한 건 이 사람이 결코 평범한 학생은 아니라는 것. 평범한 학생이 처음 보는 사람의 드레스 매듭 방식만 보고 함정을 알아챈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럼, 서류 제출 잘 하시길."
그가 짧게 인사하고 돌아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걸음걸이마저도 소리가 나지 않을 것처럼 조용했다. 심장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는데, 이게 방금 함정을 알아챈 안도감 때문인지, 아니면 저 청년이 남긴 서늘한 인상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손바닥에는 어느샌가 땀이 배어 있었고, 나는 그걸 겉옷에 슬쩍 닦으며 겨우 정신을 추슬렀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유리가 준 그 드레스에는 정말로 함정이 숨겨져 있었고, 나는 그걸 하필 저 정체불명의 청년 덕분에 알게 됐다는 것. 그리고 저 청년이 남긴 마지막 시선이, 마치 나를 이미 다 파악하고 있다는 듯 지나치게 차분했다는 것이었다. 그 시선을 떠올릴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게, 이게 단순히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나 스스로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겨우 그가 알려준 계단을 올라가 서류 제출 창구를 찾았을 때는 이미 진땀이 등을 다 적신 뒤였다. 창구 직원은 서류를 받아 대충 훑어보고는 별 표정 없이 도장을 찍어줬다. 그 도장 소리 하나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나는 그 자리에서 다리가 풀릴 뻔했다. 도훈의 입학은 이제 지켜졌다.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하지만 서류를 무사히 제출했다는 안도감도 오래가지 못했다. 학원을 빠져나오는 내내 머릿속에는 그 매듭 이야기가 떠나지 않았다. 유리가 준 드레스, 뒤로 묶인 매듭, 걸을 때 풀리도록 만들어진 구조. 그 말들이 자꾸만 되풀이되면서 파티에서 벌어질 뻔했던 상상들이 머릿속에서 멈추지 않고 재생됐다. 사람들이 다 지켜보는 앞에서 드레스가 풀어지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얼마나 큰 웃음거리가 됐을까. 유리는 그런 내 모습을 어떤 표정으로 지켜봤을까.
파티는 이제 하루 앞으로 다가와 있었고, 나는 함정을 피했다는 안도감보다 더 큰 불안에 휩싸인 채 학원을 빠져나와야 했다. 유리가 왜 이런 짓까지 벌였는지, 그리고 그 함정을 너무나 쉽게 알아챈 그 정체불명의 청년이 대체 누구인지, 두 가지 물음이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머릿속에서 번갈아 떠올랐다. 어느 쪽도 답을 찾지 못한 채, 나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학원의 높은 첨탑을 바라보며 내일 있을 파티가 결코 순탄하게 지나가지 않을 거라는 예감에 사로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