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사교계 데뷔를 위한 준비는 생각보다 훨씬 초라하게 시작됐다. 저택에 남은 낡은 드레스 몇 벌을 뒤지며 하녀와 함께 소매를 늘이고 허리를 줄이는 작업을 사흘 내내 했는데, 바늘에 손가락을 몇 번이나 찔렸는지 셀 수도 없었다. 손끝에 맺힌 핏방울을 보면서도 계속 바느질을 이어가야 했으니, 이게 무슨 귀족 영애의 준비 과정인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거울이 없어서 물그릇에 얼굴을 비춰보며 화장법을 익히는 꼴이 스스로도 처량했다. 물그릇 속에서 흔들리는 얼굴을 들여다보며 눈매를 그려보는데, 물결이 조금만 일렁여도 화장이 어디로 튀는지도 모르게 뭉개졌다. 이런 식으로 사교계에 나갈 준비가 되는 게 맞나. 아마 안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냥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이쪽 눈썹은 조금 더 진하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하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나는 물그릇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사실 그 말이 맞는지 틀린지 판단할 근거조차 없었다. 이런 걸 배울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후회였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의 오랜 지인이라는 남작 부인이 보내온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이번 겨울 왕립학원 정기 사교 모임에 초청하겠다는 내용이었는데, 편지지의 질감마저 고급스러워서 내가 쓰는 종이와는 비교도 안 됐다. 이런 종이에 편지를 쓰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건가. 편지 끝에 적힌 한 문장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차 백작부인께서도 참석하신다니, 오랜만에 두 분이 재회하시겠군요."
차 백작부인. 그 이름을 읽는 순간 손끝이 저릿해졌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느낌이었다. 차유리였다. 학창 시절 나와 가장 가까웠던 친구, 아니, 가까웠다고 믿었던 친구.
기억을 더듬어보니 유리는 원래 차 남작가의 딸이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그러니까 그렇게 부유하지도 않은 시골 귀족 집안 출신이었는데, 열여덟 살 무렵 열린 사교 파티에서 어느 백작의 눈에 들어 초스피드로 결혼에 성공했다는 소문을 들었던 게 마지막이었다. 그게 벌써 이 년 전 일이었다. 이 년이면 사람이 얼마나 변할 수 있는 시간인가. 나는 그 시간 동안 시골 저택에서 물그릇에 얼굴을 비춰보고 있었는데, 유리는 그 시간 동안 백작부인이 되어 있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편지에 뭐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세요?"
하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편지를 접으며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줄줄이 떠오르고 있었다. 유리가 백작부인이 됐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어떤 사람으로 변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몰랐다는 말도 정확하지는 않다. 소문으로는 들었으니까.
"아니야, 그냥... 옛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게 될 것 같아서."
말하면서도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걸 느끼는데, 하녀가 그걸 눈치챘는지 안 챘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 순간 내 머릿속엔 소문에서 들었던 유리의 이야기들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차유리는 이제 사교계에서 꽤나 유명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초록빛 눈동자와 와인색 곱슬머리를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며, 온몸에 귀금속을 두르고 다닌다는 이야기, 짙은 화장과 호화로운 옷차림으로 파티마다 시선을 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대놓고 무시한다는 이야기까지. 심지어 어느 하급 귀족 영애를 파티에서 대놓고 조롱해서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게 진짜 유리가 한 짓이라고?
예전의 유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함께 시골길을 뛰어다니며 사과를 훔쳐 먹고, 서로 미래를 상상하며 웃던 그 아이가 정말 그렇게 변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나중에 크면 꼭 도시로 갈 거야, 서인아." 유리가 그렇게 말하며 눈을 반짝이던 게 아직도 생생한데, 지금 소문 속의 유리는 그때의 눈빛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하지만 신분이 사람을 바꾼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고, 지금 상황을 보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스쳤다.
"아버지, 이 편지에 대해 아세요?"
서재로 편지를 들고 가자 아버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읽었다. 아버지의 손끝이 편지지를 넘기는 속도가 평소보다 느렸다. 그것도 불안한 징조 같았다.
"차 백작부인이라... 유리를 말하는 거냐?"
"네, 학창 시절 친구였어요."
"조심해라. 신분이 오른 사람들이 옛 친구를 대하는 방식은 잔인할 때가 많다."
아버지의 그 말이 어째서인지 뼈에 박히듯 무겁게 다가왔다. 아버지가 사교계에 대해 뭘 안다고 저런 말을 하는지 의아했지만, 어쩌면 남작으로 살아오며 그런 광경을 몇 번 목격한 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데요?"
내가 묻자 아버지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침묵했다. "예전에 내가 알던 귀족이 있었는데, 신분이 낮았던 시절의 친구를 파티에서 만나자 그 자리에서 하인을 시켜 내쫓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유리가 그럴 거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조심하는 게 좋다는 말이야."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등골이 더 서늘해졌다. 유리가 그 정도로 변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알 수 없는 거니까.
"괜찮아요. 저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잖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벌써부터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사교계라는 곳이 이미 무서운 전장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거기에 하필 예측할 수 없는 옛 친구가 강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건 뭐 시작부터 최종보스급 난이도 아닌가. 튜토리얼도 안 끝났는데 최종 보스가 등장하는 게임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사교계 데뷔 전략을 세웠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데뷔한 뒤 적당한 혼처를 조심스럽게 물색하는 것. 유리와는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고, 화려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림자처럼 스며들어 있다가 목표만 조용히 이루는 것. 그게 내가 세운 최선의 전략이었다. 벽에 붙은 낡은 벽지를 바라보며 몇 번이나 그 계획을 되새겼는데, 그럴수록 계획이 그럴싸해 보였다. 스스로 대단한 전략가라도 된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전략이 얼마나 순진한 계산이었는지, 나는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됐다.
"강서인 영애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번 파티에 꼭 특별한 자리를 마련해드리라고 하셨답니다."
초청장을 전달하러 온 시녀의 말에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이 미끄러질 뻔했는데, 겨우 붙잡고 태연한 얼굴을 꾸며냈다. 특별한 자리라니. 그런 자리를 마련해줄 사람이 이 세계에 나 말고 몇이나 있겠나. 답은 하나뿐이었다.
"혹시... 누가 그런 부탁을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목소리가 최대한 담담하게 나가도록 애썼지만,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묻는 질문이라는 게 스스로도 우스웠다.
"차 백작부인께서 직접 말씀하셨어요. 오랜 친구분이 오신다며, 아주 반가워하시던걸요."
반가워하셨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반가운 게 진심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조용한 데뷔라는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