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밤새 잠을 설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감았는데, 눈을 감자마자 낯선 장면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형광등이 켜진 좁은 방, 스마트폰 액정에서 흘러나오는 알림음,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이름. 서인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었다.
헤메이짓. 잠에서 깨어나며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게 뭐지.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하고, 기억이라고 하기엔 너무 낯설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게 마치 누군가 머릿속에 서랍을 하나씩 억지로 열어놓는 느낌이었는데, 그 서랍 안에서 튀어나오는 것들이 하나같이 이 세계에는 없는 물건들이었다. 버스, 지하철, 편의점 삼각김밥. 이런 것들이 대체 왜 내 머릿속에 있는 걸까.
하지만 그 조각들이 하나둘 이어지면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사실 하나를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원래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다.
전생이라 불러야 할지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 다른 곳에서 살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형광등이 켜진 사무실, 야근, 상사의 잔소리, 그리고 갑자기 끊겨버린 기억. 아마 죽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리 더듬어도 나오지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헷갈렸다. 어쨌든 그 죽음의 끝에서 나는 강서인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눈을 떴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흔한 이야기라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는데, 다만 그게 내게 실제로 벌어졌다는 사실이 낯설 뿐이었다. 전생에서 이런 소재의 소설을 몇 편이나 읽었더라. 회귀했다는 주인공도 있었고, 환생했다는 주인공도 있었지만, 나는 그중 어디에도 정확히 속하지 않는 애매한 존재였다. 회귀도 아니고 환생도 아닌, 뭐라 정의하기 애매한 형태로 나는 이 몰락한 남작가의 딸로 다시 태어나 열여섯 해를 살아왔다.
열여섯 해나 살고서 이제 와서 전생을 기억한다는 게 말이 되나? 개연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따지고 보면 애초에 전생의 기억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개연성을 논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기로 했다. 세상일이 다 논리로 설명되면 그게 세상이겠나.
그리고 지금, 그 기억이 왜 하필 지금 선명해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이 세계에서 결혼이 가문을 구원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걸 내가 이미 어디선가 배운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생에서 읽었던 소설이었는지, 드라마였는지, 아니면 그냥 상식이었는지 헷갈렸지만, 신분제 사회에서 몰락한 가문의 딸이 살아남는 방법은 결국 좋은 혼처를 구하는 것뿐이라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하녀 아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불을 걷어내며 몸을 일으키니 관자놀이가 아직도 지끈거렸다. 어제부터 계속 이런 두통이 반복되고 있었는데, 아마 전생의 기억이 완전히 자리를 잡느라 그런 모양이었다. 하녀 아이가 세숫물을 들여오며 내 얼굴을 살피는 걸 보니 티가 많이 나는가 싶어서,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웃음이 부자연스러웠는지 하녀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세숫물에 얼굴을 담그니 차가운 감각이 머릿속을 조금 맑게 해주었다. 거울이 없어서 내 얼굴이 지금 어떤 표정인지도 알 수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 방에는 거울이라는 물건 자체가 없었다. 몰락한 남작가의 살림살이가 어느 정도인지 이보다 더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실도 없을 것이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는 여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며칠 전 있었던 빚 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습관적으로 그런 표정을 짓고 계신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삼둥이들은 그나마 배가 덜 고픈 얼굴로 죽을 떠먹고 있었지만, 도훈은 젓가락질을 하다 말고 계속 내 눈치를 살폈다. 이 상황에서 밥이 넘어가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지만, 그렇다고 굶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니 나는 억지로 숟가락을 들었다.
죽 한 숟가락을 삼키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계속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 집안에 남은 돈이 얼마인지, 빚이 얼마인지, 그리고 이 상태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 전생의 기억이 준 게 있다면 바로 이런 셈이었다. 숫자로 상황을 정리하는 버릇. 그리고 그 숫자들이 도출하는 결론은 하나같이 절망적이었다.
"아버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아버지가 힘없이 나를 쳐다봤다.
"제가 사교계에 데뷔하겠습니다."
식탁에 정적이 흘렀다. 아버지의 눈이 커졌고, 도훈은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삼둥이들조차 죽 떠먹던 손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는 걸 보니, 이 집안에서 내가 얼마나 조용한 애로 살아왔는지 새삼 실감이 났다. 열여섯 해 동안 강서인이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이렇게 먼저 나서서 말을 꺼낸 적이 있었나 싶었는데,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다들 놀라는 게 당연했다.
"서인아, 그게 무슨..."
"결혼이요. 좋은 혼처를 구해서 이 집안을 살릴 방법을 찾겠다는 뜻입니다."
말을 하면서도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차분하다는 걸 느꼈다.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대사를 읊는 것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는데, 이게 다 허세라는 걸 아버지가 알아챌까 봐 조마조마했다. 실은 사교계라는 게 정확히 뭘 하는 곳인지, 거기 가면 뭘 해야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였다. 그냥 전생의 기억 속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지식으로 무작정 내던진 말이었으니까.
"안 된다. 사교계가 어떤 곳인지 네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구나."
아버지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하지만 그 단호함 속에 감춰진 게 두려움이라는 걸 나는 눈치챘다. 목소리는 단호한데 손은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도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집안에 남은 카드가 이것 하나뿐이라는 걸.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손을 떨면서도 끝까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거울조차 없이 자란 애가 무슨 사교계 데뷔를 한다는 게냐."
"거울이 없다고 사람이 못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농담처럼 던졌지만 아버지는 웃지 않았다. 사실 나도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딸기갈색 머리에 주근깨투성이 얼굴, 화려하게 꾸미는 법도 모르고 사교계 예법도 모르는 시골 영애가 대체 무슨 수로 냉정한 귀족 사회에서 좋은 혼처를 구한다는 건지, 나 자신도 확신이 없었다. 예법 선생님을 부를 돈도 없고, 드레스 한 벌 새로 지을 돈도 없는 마당에 데뷔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말을 다시 주워 담지 않았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 어딘가에서, 이런 이야기의 시작이 항상 이렇게 초라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소박한 시골 영애가 우연한 만남을 통해 운명이 바뀌는 이야기. 낡은 드레스를 입고 나갔다가 뜻밖의 인연을 만나고, 그 인연이 인생을 통째로 뒤집어놓는 그런 이야기. 그게 정말 나에게도 벌어질 확률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얄궂은 희망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붙잡을 게 그거 하나뿐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도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나, 정말 괜찮겠어?"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 이대로 손 놓고 있으면 다 같이 굶는 거잖아."
내 대답에 도훈이 입을 다물었다. 삼둥이들도 눈치를 보다가 다시 죽을 떠먹기 시작했는데, 그 조용한 숟가락 소리가 오히려 더 크게 들렸다. 이 방 안에 흐르는 침묵의 무게가 온전히 내 어깨 위에 얹히는 것 같았다.
"작위를 반납하실 생각이시라면, 그전에 제게 딱 한 번의 기회를 주세요."
아버지는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결국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 하나에 이 가문의 명운이 걸려 있다는 게 실감 나자 손끝이 떨렸다. 아버지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이 안도인지 자책인지 구분이 안 됐는데,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 아버지도 이 집안을 지키고 싶었을 테니까. 다만 지킬 방법이 없어서 넋을 놓고 있었을 뿐.
이제부터 나는 정말로 사교계라는 전장에 발을 들여야 했다. 예법도 모르고, 화려한 옷 한 벌도 없고, 그렇다고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닌 몰락한 남작가의 딸이 그 전장에서 뭘 할 수 있을지 나조차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가만히 앉아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그 전장에서 첫 번째로 마주칠 얼굴이, 하필이면 가장 반갑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이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