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아버지의 사부가 된 아들

1화

빗줄기가 옆으로 날아들 정도로 바람이 거셌다. 하늘이 통째로 뒤집힌 것 같은 밤이었다. 강민준은 로프 하나에 매달린 채 절벽 중턱에서 조난자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헬멧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총알처럼 따가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텨라.' 손끝이 얼어붙어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장갑 안쪽까지 스며든 물기가 살갗을 파고들어 뼛속까지 시렸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악물고 카라비너를 하나씩 옮겨 걸었다. 위잉— 바람이 로프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몸이 그물처럼 흔들렸다. '무너지면 안 된다. 여기서 놓치면 저 사람은 끝이다.' 조난자의 얼굴이 새파랬다. 입술이 갈라지고 눈동자엔 초점이 흐릿했다. 강민준은 소리쳤다. "조금만요! 조금만 더 버티세요!" 대답은 없었다. 신음뿐이었다. 조난자의 팔을 붙잡은 순간, 발밑의 바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지끈! 로프가 함께 흔들렸다. 순간적으로 몸의 중심이 무너졌고, 강민준의 머릿속은 이미 계산을 끝내고 있었다. '내가 저 턱으로 밀지 않으면 둘 다 떨어진다.' 생각과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그는 몸을 던져 조난자를 반대편 턱으로 밀어냈다. 그 대가로 그의 몸은 허공에 남았다. '아, 이번엔 안 되겠구나.' 이상하게도 마지막 순간에 드는 생각은 두려움이 아니라 옅은 안도였다. 적어도 저 사람은 살렸으니까. 산악구조대로 십 년 넘게 뛰어온 세월이, 마지막 순간마다 늘 그런 식으로 그를 정리해주었다. 추락하는 몸이 회전하며 시야에 구름과 절벽과 로프가 뒤섞여 스쳐 지나갔다. 세상이 슬로모션처럼 늘어졌다가 순식간에 압축되었다. 콰앙. 세상이 새하얗게 부서지고, 소리도 통증도 없는 암전이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감각이 돌아왔을 때, 그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몸이 너무 작았다. 팔다리가 낯설었고, 뼈마디가 뻐근하다 못해 갈라지는 듯한 통증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이건... 내 몸이 아니다.' 눈을 뜨려 해도 눈꺼풀이 무겁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이려 해도 명령이 전달되지 않는 듯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팔다리의 길이며 무게가 전부 어긋나 있었다. 대신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거친 숨소리, 그리고 다급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도윤아! 도윤아, 정신 차려라!" 누군가 그를 업고 산길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등에 닿는 넓은 어깨와 축축한 옷감의 냄새, 흙과 땀이 섞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소리가 거칠게 울렸고, 나뭇가지가 스치는 소리와 숨소리가 뒤섞였다. '도윤... 이라고?' 낯선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지금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 왜인지 몸이 그렇게 반응했다. 심장이 그 이름에 먼저 놀란 듯 뛰었다. "여보! 애 숨은 붙어 있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울음을 참는 듯 갈라진 음성이었다. 발걸음 소리가 남자보다 조금 뒤처져 따라붙었다. "붙어 있소. 붙어 있으니 서두르시오!" 남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다급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등에 업힌 그는 그 진동을 온몸으로 느꼈다. 등에 업힌 그는 다시 정신을 놓았다가, 얼마쯤인가 다시 눈을 뜨는 걸 반복했다. 의식이 물속에 잠겼다가 떠올랐다가를 반복하는 느낌이었다. 그 사이사이로 흐릿한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 흔들리는 등불, 진흙 냄새. 방 안 천장이 낮았다.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초가의 천장이었고, 매캐한 약초 냄새와 희미한 등잔불 냄새가 났다. '여기가... 어디지.' 몸을 움직이려 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었다. 산악구조대 훈련으로 다져진 몸이 아니었다. 뼈가 다 부서질 것 같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이었다. 근육이라 부를 것도 별로 없는, 가느다란 팔다리였다. '몸이... 이렇게 작을 수가.' 강민준의 감각으로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크기였다. 자신의 몸이었던 백팔십 센티의 근육질 육체가, 지금은 이 아이의 조그마한 뼈대 안에 갇혀 있었다. "도윤아, 들리니? 엄마 목소리 들리니?" 여인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야윈 얼굴, 거칠어진 손, 눈물로 젖은 눈. 그 눈이 낯선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저려왔다. '왜... 이렇게 익숙한 걸까.' 몸이 먼저 반응하는 감정이었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이 남긴 무언가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듯했다. 마치 몸 안에 두 개의 마음이 겹쳐 있는 것처럼, 낯선 감정이 자연스럽게 솟아났다. "도윤아." 남자의 목소리도 떨렸다. 다부진 체격에 마른 얼굴, 손등에 굳은살이 두껍게 박인 남자였다. 그가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손이 크고 거칠었다. "살았으니 됐다. 살았으니 그거면 됐어." 그는 대답하려 했지만 목이 움직이지 않았다. 입술이 벌어지지 않았고, 성대가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되뇌었다. '살았다... 그래. 일단 살아야 한다.' 산에서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훈련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지탱해 주었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도, 살아있다면 방법은 있는 법이었다. '패닉에 빠지는 순간 끝이다.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하나씩, 차분하게.' 그날 밤, 부부는 아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젖은 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었고, 그 손길이 지나갈 때마다 이마가 서늘해졌다가 다시 열이 올랐다. 아버지는 밖에서 무언가를 알아보러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싸리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약방에선 값을 더 올렸소. 설한초 값이 저번보다 두 배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 말에 어머니의 손이 잠시 멈췄다. 수건을 쥔 손가락이 하얗게 굳었다. '설한초... 그게 뭐지.' 정신이 반쯤 흐릿한 채로도 그 단어가 귀에 박혔다. 뭔가 중요한 것 같았다. 이 가족에게, 아니 이 몸의 원래 주인에게도. "그럼... 어떻게 해요." 어머니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방법을 찾아봐야지. 어떻게든." 아버지가 대답했지만, 그 말투에는 확신이 없었다. 오히려 스스로를 다잡으려는 안간힘 같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등잔불이 타는 소리와 아이의 얕은 숨소리만이 채워졌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빗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한밤중, 통증이 잦아들고서야 그는 겨우 눈을 온전히 뜰 수 있었다. 낮은 초가의 방, 갈라진 흙벽, 종이가 덧대진 창문 틀. 어렴풋이 상황이 정리되었다. '나는 강민준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도윤이라는 아이인 모양이다.'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죽음 이후에 다른 몸으로 옮겨왔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이었지만, 부정할 방법이 없었다. 통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 낡은 방의 냄새와 온도, 부모라 부르는 두 사람의 존재가 전부 새로운 현실이었다. '환생이라니. 이런 것이 실제로 존재할지고.' 산악구조대 시절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며 목숨을 걸었던 그 모든 순간이, 지금 돌이켜보면 다른 세계로 넘어오기 위한 서곡이었던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우측 손목 안쪽에서 미약한 열감이 스쳤다. 마치 누군가 손끝으로 살갗을 긋고 지나간 듯한, 낯선 감촉이었다. '뭐지, 이건.' 그는 놀란 채로 손목을 들어보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팔이 이불 위에서 조금 움직였을 뿐, 그 이상은 무리였다. 열감은 이내 사라졌다. 하지만 분명히 느꼈다. 그 자리에 무언가가 있었다. '이게... 뭐지.' 어둠 속에서, 그는 잠들지 못한 채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등잔불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가 벽 위에서 일렁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살갗에는 흉터도, 무늬도, 어떤 표식도 없었다. 하지만 확신했다. 저 안에, 뭔가가 있다. 그 열감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 있는 무언가가 살갗 아래에서 조용히 숨을 쉬는 것 같은, 미묘하고도 낯선 존재감이었다. '설한초, 그리고 이 손목의 열감. 이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걸까.' 강민준은—아니, 이제 이도윤이 되어버린 그는—어둠 속에서 오래도록 눈을 감지 못했다. 창밖의 빗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오히려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직은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이 몸에는, 뭔가가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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