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아버지의 사부가 된 아들

2화

이틀이 지나서야 도윤은 제대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어지럼증이 남아 있었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보니, 낡은 나무 서까래에 거미줄이 얇게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이 이 몸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하지만 손끝, 발끝, 갈비뼈 사이사이의 통증까지 생생했으니, 이건 꿈이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초가삼간. 좁은 방 두 개. 부엌 하나.' 벽에는 갈라진 틈을 종이로 덧댄 자국이 여러 겹 있었고, 그 종이마저 누렇게 색이 바뀌어 있었다. '덧댄 자국이 여러 겹이라는 건, 새로 바를 여유조차 없었다는 뜻이지.' 이불은 얇았고, 베갯속은 지푸라기가 삐죽삐죽 튀어나올 만큼 낡았다. 산악구조대 시절, 재난 현장에서 형편을 가늠하던 눈이 이번에도 자동으로 작동했다. '이 정도면... 형편이 넉넉지 않다는 뜻이다.' 벽 한쪽에는 이가 빠진 그릇 두어 개가 쌓여 있었고, 부엌 쪽에서는 마른 나물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그나저나 며칠이나 잠들어 있었던 건가.' 몸을 움직여보니 관절이 뻣뻣했다. 오래 앓아누운 사람 특유의 무거움이었다. "일어났구나." 문이 삐걱 열리며 어머니, 한소영이 들어왔다. 손에는 김이 오르는 죽 그릇이 들려 있었다. "조금만 더 먹어야 힘이 날 거야." "네, 엄마." 도윤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몸이 먼저 그 말을 만들어냈다. 놀랍게도 어색하지 않았다. '이 몸에 새겨진 습관이란 게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나.' 서른이 넘도록 누군가를 '엄마'라 불러본 적 없던 그였는데, 입술이 알아서 그 두 글자를 만들어냈다. 한소영이 그릇을 내려놓으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서늘한 손바닥이었다. "열은 다 내렸구나. 며칠 동안 얼마나 애가 탔는지 아느냐." 그녀의 목소리에 안도와 잔소리가 반쯤씩 섞여 있었다. "이틀 밤낮을 정신을 못 차리더니, 그저께 새벽엔 헛소리까지 하더라." '헛소리라니.' 도윤은 속으로 뜨끔했다. '설마 전생의 일을 지껄인 건 아니겠지.' 겉으로는 태연히 웃었다.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그냥... 알 수 없는 말들이었어. 됐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한소영이 손을 저었다. 더 캐묻지 않는 그 모습에 도윤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죽을 떠먹으며 그는 슬쩍 그녀를 살폈다. 손등이 거칠고 붉게 부어 있었다. 바늘에 찔린 자국이 여러 군데였다. 손가락 마디마다 굳은살이 앉아 있었고, 오른손 엄지 아래쪽은 유독 더 두꺼웠다. '수를 놓거나 베를 짜는 모양이군. 하루 종일 그 손을 쓰는 노동이겠지.' 한의학을 공부하며 보았던 손목건초염 환자들의 손과 흡사했다. '진맥이라도 봐드리고 싶은데... 지금 이 몸으로 무슨 수로.' "아버지는요?" "관에 나가셨어. 오늘은 늦으신다더구나." 한소영의 눈빛이 잠시 흐려졌다. 그녀는 애써 화제를 돌리듯 죽 그릇을 도윤 쪽으로 더 밀어주었다. "다 먹으면 좀 더 가져다줄게. 너 기운 차려야지." 도윤은 죽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 적하무관이라고 했던가.' 며칠 사이 주워들은 말들을 조합해 이 세계의 얼개를 대강 그려보고 있었다. 성현대륙이라는 곳, 그리고 무공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 화기경, 염체경이라는 말들이 들렸었다.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는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등급 체계 같은 것이라는 짐작은 갔다. 아버지 이건우는 적하무관이라는 지역 무술 단체에 속한 무사인 듯했다. "엄마, 적하무관은 큰 곳이에요?" 한소영이 잠시 손을 멈췄다. "예전엔 컸었지. 지금은... 예전만 못해." 그녀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 다 나으면 그때 얘기해줄게. 지금은 좀 더 쉬어라." 방문이 닫히고 나서야 도윤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더 물어봤자 지금은 소용없겠군.'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창호지 틈으로 새어드는 오후의 빛을 바라보았다. 빛줄기 속에 먼지가 느릿느릿 떠다니고 있었다. 그날 저녁, 이건우가 돌아왔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옷깃 사이로 붕대가 살짝 비쳤고, 걸음이 평소보다 더 무거워 보였다. 마당에 들어서는 발소리조차 힘이 없었다. 도윤은 문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저녁상이 놓이자 슬그머니 방을 나가 자리에 앉았다. 밥상은 소박했다. 보리밥에 나물 반찬 두어 가지, 된장국 한 그릇. 촛불 하나가 상 위를 흔들리며 밝히고 있었다. 이건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기침을 몇 번 삼켰다. 콜록, 콜록. 짧지만 깊은 기침이었다. 소매로 입을 가리는 순간, 도윤은 그 소매 끝에 붉은 얼룩이 살짝 스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순식간이었지만, 그의 눈은 그 짧은 순간의 색조차 놓치지 않았다. '피다. 내상이야.' 예전에 배운 한의학 지식이 즉시 반응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가 아니라 몸속 깊은 곳의 손상. 기침에 피가 섞여 나온다는 건 예사롭지 않은 신호였다. '기침의 색, 양, 소리까지... 저 정도면 단순한 타박이 아니다.' "많이 드세요, 아버지." 한소영이 국그릇을 이건우 앞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그 손끝이 살짝 떨렸다. "아버지, 어디 다치셨어요?" 도윤이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겉으로는 아이의 걱정이었지만, 속으로는 진맥이라도 하고픈 손이 근질거렸다. '맥을 짚어보면 대략은 알 수 있을 텐데.' "아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야." 이건우가 애써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얇았다. 얇다 못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억지로 붙여놓은 웃음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지.' 도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침에 핏기가 비칠 정도면 최소 몇 달, 아니 몇 년은 방치된 내상이다. 그것도 제대로 다스리지 않고 계속 몸을 굴린 흔적이야.' 그는 밥그릇을 내려다보며 숟가락을 뒤적였다. '무공을 쓰는 세계라면... 저 내상도 무공으로 얻은 것일 텐가. 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하지만 지금 그가 물어볼 처지가 아니었다. 이 몸은 열네 살 소년,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야 했다. 그는 대신 밥을 한 술 크게 떠먹으며 화제를 돌렸다. "오늘 반찬 맛있어요, 엄마." 한소영이 옅게 웃었다. 이건우도 그제야 어깨를 조금 풀었다. 상 위의 무거운 공기가 잠시 옅어졌지만, 도윤의 눈은 여전히 이건우의 소매 끝에서 떠나지 않았다. 밥상이 치워진 뒤, 도윤은 뒷마당 우물가에서 몸을 씻었다. 밤바람이 선득했다. 우물 두레박을 끌어올릴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마당에 울렸다. 찬물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을 몸에 끼얹을 때마다 자잘한 물방울이 별빛을 받아 잠깐씩 반짝였다. 씻으며 팔다리를 살피던 그는, 우측 손목 안쪽에서 낯선 무늬를 발견했다. 손톱보다 조금 큰 크기의, 옅은 청갈색의 문양이었다. 마치 나뭇가지가 얽힌 것처럼 복잡한 선들이 손목 안쪽 살갗에 은은하게 새겨져 있었다. 문신이라기엔 너무 자연스러웠고, 상처라기엔 통증이 없었다. 그는 두레박 물을 손목에 부어 문질러보았지만, 색은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이건 뭐지.' 도윤은 손끝으로 그 문양을 문질러보았다.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손끝이 닿는 순간, 그 자리에서 미약한 열감이 다시 피어올랐다. 처음 정신이 돌아오던 그 밤에 느꼈던 그 감각이었다. '그때도 이 느낌이었어. 우연이 아니야.' 그는 문양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졌다 나타났다 하며 손목 위의 선을 비췄다. 선은 볼 때마다 미묘하게 각도가 달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착시인가, 아니면...' 호기심에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예전에 배운 단전 호흡법과 비슷한 방식으로 기운을 아래로 내려보려 시도했다. 산악구조 훈련 중 배운 복식호흡과, 한의학 수업에서 익힌 경락의 흐름을 떠올리며. 숨을 코로 천천히 들이마시고, 배꼽 아래 단전이라 불리던 자리까지 밀어 넣듯 상상했다. 처음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역시 그냥 흉터 같은 건가.' 그렇게 반쯤 포기하고 숨을 내쉬려던 참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손목의 문양이 순식간에 밝게 빛났다. 화악! 짧고 강렬한 빛이 어둠 속에서 번쩍였다. 우물가 전체가 한순간 청갈색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어둠으로 돌아갔다. 손목을 타고 뜨거운 것이 팔을 관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도윤은 숨이 턱 막혔다. 통증은 아니었다. 오히려 뭔가가 몸속 깊은 곳에서 깨어나는 듯한, 낯설고도 거대한 감각이었다. 심장이 아니라 몸 전체가 하나의 심장이 되어 뛰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그는 반사적으로 손목을 움켜쥐었다. 뜨거운 기운이 손끝에서 어깨까지, 어깨에서 다시 가슴 한복판까지 뻗어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하얗게 흔들렸다. '멈춰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판단이 서기도 전에 감각이 먼저 밀려들었다. 빛은 몇 초 만에 사라졌지만, 그 여파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도윤은 우물가에 주저앉은 채, 자신의 손목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젖은 옷자락이 밤바람에 서늘하게 감겨왔지만, 그 한기조차 지금 느껴지는 뜨거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양은 다시 옅어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마치 잉크가 살갗 아래로 스며든 것처럼, 은은한 흔적이 남아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도윤은 그 자리를 몇 번이나 다시 눌러보았다. 열감은 이제 잦아들었지만, 방금 전의 그 거대한 감각은 여전히 몸 안 어딘가에 눌러앉아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는 분명히 느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이 안에서 잠들어 있다는 것을. '설마, 이게 이 세계에서 말하는 무공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는 건가.'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우물가 어둠 속에서, 열네 살 소년의 눈이 서서히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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