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웃으며 유산만 챙기겠습니다

2화

도현이 나를 사랑채로 부른 건 장례가 끝난 지 사흘 만이었다. 아직 상복도 벗지 못한 채였는데, 그는 이미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서랍장에 서류 몇 장을 펼쳐 놓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서류까지 준비했다니, 성실함 하나는 알아줘야겠다.' 삼일장을 치르는 내내 곡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않던 사람이 이렇게 발이 빠를 줄은 몰랐다. 나는 방석에 앉으며 그 서류들의 정체를 짐작해보려 했지만, 그가 먼저 입을 열었으므로 굳이 추측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매정한 사람은 아닌데 말이야, 서인이 너도 이제 알 건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저런 서두를 붙일 때는 항상 정반대의 말이 뒤따른다는 걸 나는 결혼 오 년 차가 되어서야 완전히 학습했다. 매정하지 않다는 사람이 매정한 짓을 하기 전에 꼭 저 말을 먼저 뱉는다는 것도. 도현은 서류를 내 쪽으로 밀어 보내지도 않고, 그저 손끝으로 종이 끝을 톡톡 두드리며 뜸을 들였다. 저 버릇도 여전했다. 중요한 말을 할 때마다 손끝으로 뭔가를 두드리는 버릇. 처음엔 긴장했나 싶어서 안쓰럽게 봤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냥 상대가 얼마나 기다리는지 즐기는 취미였던 것 같다. 그가 꺼낸 이야기는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우리의 결혼은 처음부터 청암 강씨 가문과 내 친정 윤씨 가문의 이권을 엮기 위한 정략이었고, 도현에게는 오래전부터 마음을 준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 또한 이 집안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한유나. 한상단의 외동딸이자 도현이 어머니의 반대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는 그 이름을, 그는 이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니 더는 숨길 이유가 없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렸다. "어머니만 아니었으면 진작 유나랑 혼인했을 거야." 그 이름을 발음하는 도현의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부드러웠다. 나에게 말을 걸 때는 늘 사무적이고 딱딱했던 사람이, 한유나라는 세 글자를 말할 때만큼은 목소리 끝이 살짝 풀어지는 걸 나는 오 년 동안 여러 번 목격했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었는데, 착각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이건 화가 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속으로 그 한마디를 되씹으며, 나는 서류 위에 적힌 이혼 조건을 눈으로 훑어 내려갔다. 조건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초라한 내용이었다. 친정으로 돌아갈 때 챙길 수 있는 건 몸에 걸친 옷가지와 개인 소지품 몇 가지, 그리고 위로금이라 부르기도 우스운 액수의 돈뿐이었다. 액수를 두 번 확인했다. 세 번째로 확인했을 때는 그냥 웃음이 나왔다. 오 년을 이 집에서 살았는데, 정말로 딱 그 정도가 내 몫이라니. 어느 회사 퇴직금 정산표를 봐도 이보다는 셌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야박한 숫자였다. "가문 재산에는 손댈 게 없을 텐데." 도현은 그렇게 덧붙이며 마치 선심 쓰듯 웃었는데, 그 웃음이 얼마나 무지에서 나온 여유인지 그는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저 웃음의 정체를 굳이 설명해주자면, 자기가 뭘 잃는지도 모르면서 이겼다고 확신하는 사람 특유의 표정이었다. 나는 그 서류를 손끝으로 밀어내지 않고 조용히 접어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종이 접히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살짝 갈랐다. "이대로 서명하면 되는 겁니까." 짧게 되물었을 뿐인데, 도현은 예상보다 순순한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얼굴을 잠깐 비쳤다가 이내 안도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 얼굴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당황, 그리고 안도. 그 사이의 짧은 간극에서 나는 이 사람이 나를 얼마나 쉽게 봤는지,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쉽게 무너질지를 동시에 가늠할 수 있었다. 사람이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가장 방심한다는 걸, 이 집에서 오 년을 버티며 나는 아주 잘 알게 되었다.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이네." 도현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 상처받을까 봐 걱정했는데." "걱정을 사흘이나 붙들고 있다가 서류를 만드셨나 봅니다." 나는 담담하게 받아쳤다. 그 말에 도현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가, 이내 별거 아니라는 듯 넘어갔다. 이런 식의 되받음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는 늘 조용히 받아치는 편이었고, 그는 늘 자기 할 말만 마치면 상대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으니까. "유나한테는 언제부터 그렇게 마음을 두셨습니까."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니었다. 그냥 이 자리에서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물었을 뿐이었다. 도현은 그 질문에 오히려 신이 난 듯 대답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반대하시기 전부터니까, 뭐, 십 년은 됐지." 그는 마치 옛 추억을 이야기하듯 말했고, 나는 그 옛 추억 속 어딘가에 내 존재가 끼어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십 년 전부터 좋아한 사람이 있는데도 나와 오 년을 함께 산 사람이 이 사람이었다. 그 계산이 맞아떨어지는 걸 보면서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그럼 나랑 결혼한 오 년은 그냥 대기 시간이었던 거네.' 대기 시간치고는 참 길었다. 방을 나서면서 나는 시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병상에서 나지막이 건넸던 한마디를 떠올렸다. "서인아, 내가 너한테 하나 남겨둔 게 있다." 그때는 유언처럼 흘러가는 헛소리로만 여기고 넘겼는데, 지금 이 순간 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서 되풀이되는 걸 보면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서기 시작했다. 최정숙 여사는 살아 있을 때도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며느리인 나에게는 늘 무뚝뚝했고, 아들인 도현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엄격했으며, 이 집안의 모든 계산과 셈은 결국 그 사람의 손끝에서 시작되고 끝났다는 걸 이 집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나에게 남길 말이 그저 위로였을 리는 없었다. '무언가를 남겼다면, 저 사람들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곳에 있겠지.' 나는 사랑채 마루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머릿속으로 병상에서의 그 장면을 다시 되짚어 보았다. 여사는 그 말을 하면서 유난히 내 손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손등을 몇 번인가 두드렸는데, 그 두드림이 단순한 위로의 몸짓이 아니라 뭔가를 짚어주려는 신호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때는 그저 죽음을 앞둔 노인의 습관적인 손짓으로만 여겼는데, 지금 와서 되짚어보니 그 손끝이 향했던 방향이 있었다. 창밖. 별채가 있는 방향이었다. 사랑채 마루를 내려서는 발걸음이 저절로 최정숙 여사의 별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상복 자락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스산하게 스쳤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동안 마주친 하인들 몇몇이 나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이미 다들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 집 안에서 소문이 도는 속도는 늘 내가 상황을 파악하는 속도보다 빨랐으니까. 그 시선들을 무시하며 별채로 향하는 좁은 돌길을 걸었다. 발밑에서 자갈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별채는 여사가 살아 있을 때부터 아무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했던 곳이었다. 서고 겸 개인 처소로 쓰였다는데, 정작 나조차도 그 안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문 앞에 서서 잠긴 자물쇠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이혼 서류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무언가가 이 집 안에 조용히 숨어 있다는 걸 직감했다. 자물쇠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고, 그 순간 나는 이 문 뒤에 있는 것이 내 남은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잠시 숨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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