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웃으며 유산만 챙기겠습니다

3화

최정숙 여사의 별채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로도 손댄 사람이 거의 없었는지, 문을 열자 익숙한 백단향 냄새가 먼저 코끝을 스쳤다. '이 냄새마저 그대로라니, 시간이 여기서만 멈춘 것 같다.' 문살에 낀 먼지가 오후 햇살을 받아 뽀얗게 떠다니는 걸 보면서, 나는 이 방이 마지막으로 열렸던 게 정확히 언제였는지 가늠해보려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어차피 답이 나올 리 없는 계산이었다. 방 안은 시어머니가 살아계셨을 적 그대로였다. 붓과 벼루가 나란히 놓인 서안, 벽에 걸린 낡은 서화 몇 폭, 그리고 그 아래 가지런히 정리된 서랍장까지. 마치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정갈함이 오히려 서글프게 다가왔다. '평생을 이렇게 흐트러짐 없이 사셨던 분이니, 마지막 순간까지도 뭔가를 정리해두셨겠지.' 나는 방 안으로 들어서며 잠시 숨을 고르다가, 시어머니가 마지막까지 앉아 계셨던 서안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손끝이 서안의 나뭇결에 닿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근호 아저씨는 유품 정리를 도와도 되겠느냐는 내 부탁에 두말없이 따라와 옆에서 상자들을 하나씩 열어보는 중이었는데, 그 손길이 평소보다 유난히 조심스러운 걸 보면 그도 이 방에서 뭔가를 예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상자 하나를 열어 낡은 서첩을 들춰보고, 또 다른 상자에서는 빛바랜 편지 뭉치를 꺼내 조심스레 넘겨보았는데, 그때마다 잠깐씩 멈추어 서서 나를 힐끔 쳐다보는 걸 보면 내심 뭔가를 찾고 있는 눈치였다. '아저씨도 알고 계신 게 있는 거야. 그런데 왜 먼저 말을 안 꺼내시지.' 나는 그 시선의 의미를 캐물을 틈도 없이, 서안 아래 서랍으로 손을 뻗었다. 서랍을 열었을 때 낡은 목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자물쇠도 없이 그저 헝겊으로 몇 겹 싸여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 정성스러운 포장이 오히려 안에 든 것의 무게를 짐작하게 했다. 손으로 들어보니 생각보다 가벼웠지만, 그 가벼움이 왠지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무거운 것이었다면 차라리 금은보화라 짐작하고 넘겼을 텐데, 이렇게 가벼운 걸 이토록 겹겹이 싸매어두었다는 사실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 헝겊을 풀어내자 안에는 낡은 문서 한 장과 작은 도장 하나, 그리고 짧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는 시어머니의 필체 그대로였고, 첫 줄부터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인에게." 그 세 글자를 읽는 순간 목이 살짝 메었지만, 나는 감정을 다스리며 문서의 내용을 먼저 확인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는데, 그게 추워서인지 긴장해서인지는 나조차 알 수 없었다. 문서에는 낯선 한자와 숫자들이 촘촘히 적혀 있었고,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한눈에 다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청암 강씨 가문의 재산과는 별개로 최정숙 여사 개인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무언가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도장 역시 가문의 인장과는 다른, 처음 보는 문양이 새겨진 것이었다. '어머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걸 이렇게 숨겨두신 거예요.' 나는 문서를 다시 헝겊으로 감싸며 근호 아저씨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는 이미 눈치를 챈 듯 조용히 방문 쪽을 살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오래전부터 이런 순간을 대비해온 사람처럼 자연스러워서, 나는 잠시 그가 이 집안에서 정확히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냥 오래 일한 집사가 아니라, 어쩌면 시어머니가 가장 믿었던 마지막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마침 그때 도현이 별채 앞을 지나가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발소리도 없이 다가온 것을 보면 딱히 이곳에 관심이 있어서 온 것도 아닌 듯했다. "뭐 특별한 거라도 나왔어?" 그의 물음은 호기심이라기보다는 형식적인 확인에 가까웠는데, 목소리에도 별다른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마치 안부를 묻듯 툭 던진 질문이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목함을 슬쩍 들어 보이며 오래된 문서 몇 장뿐이라고 대답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였다. '떨지 마, 서인아. 지금 떨면 저 눈치 없는 사람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릴 거야.' 도현은 별 관심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 무심한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안도와 서운함이 동시에 밀려오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 집에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지금은 다행이면서도 조금은 쓸쓸했다. 그 뒤를 따라 안뜰을 지나던 한유나가 마침 마주쳐 잠깐 걸음을 멈추고 별채 쪽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늘 그렇듯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옷차림에, 눈매만으로도 사람을 훑어보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이번에는 그 시선이 나보다는 내 손에 들린 목함 쪽으로 잠깐 머물렀다. "정리는 아직도 안 끝났어요?" 그녀의 말투에는 은근한 짜증이 섞여 있었지만, 그 이상의 관심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짧게 몇 가지 유품이 더 남아서요, 라고만 대답했고, 그녀 역시 낡은 종잇조각 정도로만 여기는 듯 시큰둥한 얼굴로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이 두 사람, 이게 얼마나 큰 실수인지 지금은 절대 모르겠지.' 나는 그들의 무관심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졌는데,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안전장치가 바로 저들의 무지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만약 도현이나 한유나가 이 문서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짐작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목함은 이미 내 손을 떠나 있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두 사람이 사라진 뒤, 근호 아저씨는 목함을 조심스레 다시 감싸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작은 마님, 이건 절대 이 집안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됩니다." 그 말투에는 단순한 조심성을 넘어선 무언가가 담겨 있었는데, 마치 그가 이미 이 문서의 정체를 대략이나마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아저씨, 이게 뭔지 아세요?" 물음이 다급하게 튀어나왔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말만 남기고 방문을 조용히 닫았다. 그의 눈빛에는 분명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으나, 스스로 그것을 삼키는 모습이었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백단향 냄새도 서서히 옅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품 안에 목함을 꼭 끌어안은 채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 그 순간 이 집을 떠나는 날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다가올 수도 있다는 예감에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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