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웃으며 유산만 챙기겠습니다

5화

김순임이 정말로 짐을 싸서 나간 건 그로부터 열흘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방을 정리하는 모습을 문틈으로 지켜보았는데, 손에 익은 물건들을 보퉁이에 싸는 손길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걸 보며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을 다잡아 온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도현은 그녀를 붙잡기 위해 다음 달 월급을 우선 챙겨주겠다는 말을 건넸지만, 순임 언니는 그런 회유 따위는 이미 몇 번이나 들어봤다는 듯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증서 한 장 요구하지 않은 채 그대로 대문을 나섰다. '증서라도 받고 나가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몇 년을 이 집에서 부엌일을 하고 아이들 옷가지까지 봐주던 사람이, 마지막 인사조차 남기지 않고 떠나는 걸 보면서 나는 묘한 서글픔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이 집에서 오래 일한 사람일수록 미련보다 무관심이 먼저 자리 잡는다는 걸, 그 뒷모습을 보고서야 확실히 알았다. 다들 어지간히 지쳤다는 뜻이었다. 유나는 그 소란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새로운 사람을 구하면 될 일이라며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넘겼다. "요즘 세상에 일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하나 나가면 둘 들어오는 게 이 바닥인데." 그녀는 손톱을 매만지며 그렇게 말했는데, 그 태연함이 오히려 이 집의 위태로움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 같았다. 곳간이 비어가고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나로서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순임 언니가 나가고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 마당 청지기와 부엌 일꾼까지 차례로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들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부엌 일꾼은 몸이 안 좋아서 고향에 내려가야 한다고 했고, 청지기는 아들이 장가를 가서 손을 도와야 한다고 했다. 그럴듯한 사정들이었지만 결국 한 가지로 모였다. 월급이 몇 달씩 밀리고, 다음 달도 확실치 않다는 불안이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이 나가면 다음 사람은 훨씬 쉽게 나간다.' 나는 그 이치를 새삼 깨달았다. 처음 한 명이 나갈 땐 다들 눈치를 보고 조심스러워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가 되면 오히려 남는 쪽이 이상하게 보이는 법이었다. 이 연쇄적인 이탈이 단순한 우연의 겹침이 아니라 이 집안 곳간이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확실한 신호라는 걸, 나는 근호 아저씨와의 짧은 대화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했다. "작은 마님, 사실 지난 몇 년간 곳간 장부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근호 아저씨는 밤늦게 내 방을 찾아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털어놓았다. 그는 등불 앞에 앉아 손에 든 종이를 몇 번이나 접었다 펴며 말을 이었는데, 도련님이 벌인 무리한 사업 투자와 유나가 슬쩍 흘리며 부추긴 씀씀이가 곳간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처음엔 몇백 냥 수준이었던 게 지금은 셈하기가 두려울 정도로 불어나 있다고, 그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었고, 그래서 시어머니가 남긴 그 목함을 그토록 조심스럽게 챙겨둔 것이었다. 도현이 사업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눈빛이 이상하게 들뜨는 걸 보면서, 나는 이미 이 집의 곳간이 오래가지 못할 거란 걸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이 집에서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남을 순 없지.' 나는 근호 아저씨에게 목함을 안전한 곳에 옮겨두었는지 확인했다. "그거야 진작에 처리해 두었지요." 그는 낮게 웃으며 답했는데, 이미 처가 쪽 지인의 집에 맡겨두었다는 말을 조용히 전해주었다. 그 지인이 입이 무겁고 도현과는 안면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했다. 적어도 이 집이 완전히 무너져도 내 손에 남는 것 하나는 있을 거란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도현은 여전히 이 모든 조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용인 몇 명이 나가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새로 사람을 구하면 그만이라는 태도였는데, 저녁상을 물릴 때조차 "사람 구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하며 태평하게 국그릇을 비웠다. 그 무신경함이 나로서는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그가 진짜로 위기를 감지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성가신 방식으로 나를 붙잡으려 했을 테니 말이다. 이혼 서류에 서명할 날을 기다리는 나로서는, 그가 곳간 사정을 눈치채고 갑자기 다정해지는 것보다는 저렇게 무디게 있는 게 훨씬 편했다. 나는 방 안에 앉아 서류에 서명할 날을 기다리며, 옷가지와 몇 가지 소지품을 조금씩 정리해 나갔다.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는 척했지만, 서랍 하나씩 열어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을 구분하는 손길에는 나름의 조급함이 배어 있었다. 이 집을 떠날 채비를, 나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갖춰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근호 아저씨가 다급한 얼굴로 다시 나를 찾아왔다. 평소라면 문 앞에서 기척을 두어 번 내고 들어오던 사람이 이번엔 그럴 여유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작은 마님, 지금 곳간 관리하는 사람이 몰래 다녀갔는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그의 표정에서 평소와는 다른 긴장이 느껴졌다. 손에 든 등불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목소리도 평소보다 한 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이 집안의 무너짐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고 훨씬 크게 다가오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구나.' 등불 아래 흔들리는 그의 그림자를 보며, 나는 이 집을 떠날 날이 내 예상보다 훨씬 앞당겨질 수도 있다는 예감에 조용히 마음을 다잡았다. 근호 아저씨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짧은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