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웃으며 유산만 챙기겠습니다

4화

한유나가 안채로 나를 직접 찾아온 건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오후였다. 가을볕이 유난히 맑아서 마당의 감나무 그림자가 댓돌 위까지 길게 늘어져 있던 날이었는데, 그 그림자를 밟으며 짙은 홍색 한복 자락을 끌고 마당을 건너오는 그녀의 자태는 확실히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 데가 있었다. 걸음걸이 하나까지도 계산된 듯 우아했고, 저 정도면 도현이 저렇게 미쳐 있는 것도 이해는 간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가 곧 시들해졌다. 미쳐 있는 게 이해가 간다고 해서 내가 겪는 일이 덜 억울해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방문 앞에서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언니, 요즘 많이 힘들죠." 목소리에는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지만 그 걱정이라는 게 꼭 잘 다듬어진 것처럼 매끈해서, 진심보다는 연습의 흔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언니라는 호칭이 낯설게 들렸지만, 나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자리를 권했다. 이럴 때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건 상대에게 카드를 먼저 까 보이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들어오세요. 차라도 드릴게요." "언니가 직접 타 주시는 거예요? 어머, 부담스러워서 어떡해." 부담스럽다면서도 그녀는 자리에 앉기 전부터 이미 방 안을 훑고 있었다. 대화가 오가는 내내 유나의 시선은 자꾸만 방 안의 장식품들을 훑고 있었다. 자개함, 백자 병, 시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아끼시던 산호 노리개까지, 그녀의 눈길이 물건 하나하나를 스치는 동안 나는 그 시선의 방향을 놓치지 않고 하나씩 따라가고 있었다. 마치 재산 목록에 체크 표시를 하는 손끝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이 집 물건들이 다 어찌 그렇게 좋은지 몰라요." 지나가듯 흘리는 그 말 한마디에서 그녀가 정말로 궁금한 게 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동정하러 온 게 아니라 재고 조사하러 온 거구나.' 나는 속으로 그렇게 정리하며 겉으로는 그저 옅게 웃어 보였다. "오래된 물건들이라 그래요. 저희 어머님 살아 계실 때부터 있던 것들이니." "그러니까요, 이런 걸 다 어떻게 두고 가시나. 저는 상상도 못 하겠어요." 두고 가는 건 이미 정해진 일처럼 말하는 그녀의 화법에 나는 찻잔 손잡이를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정해진 척하는 것도 사람 다루는 재주 중 하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내가 곧 이 집을 떠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고,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미안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저도 처음엔 오빠한테 안 된다고 했었어요. 언니한테 너무 죄송해서." 안 된다고 말했다는 그녀의 표정에서 죄송함보다는 승자의 여유가 훨씬 짙게 느껴졌는데, 이 여자는 동정이라는 감정을 도구로 쓰는 데 아주 능숙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죄송할 것까지야." 나는 별다른 대응 없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화제를 돌렸다. "차가 다 식었네요. 새로 내올까요." "아니에요, 언니. 저 금방 가야 해서." 금방 갈 거면서도 그녀는 좀처럼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대신 방 안을 한 번 더 훑어본 뒤에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까지도 시선은 산호 노리개 위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녀가 돌아간 직후, 부엌 쪽에서 낮은 다툼 소리가 들려와 마당으로 나가보니 가정부 김순임이 근호 아저씨를 붙잡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이번 달 월급도 또 미뤄진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 외침에 근호 아저씨는 진땀을 흘리며 사정을 설명하려 애썼지만, 순임 언니의 얼굴에는 이미 결심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지난달도 그러시더니, 이번 달도 이러시고, 그다음 달은 또 뭐라고 하실 건데요." "순임아, 조금만 더 참아. 곧 나올 거야, 곧." "그 곧이 언제까지인데요! 저도 애가 있어요, 아저씨." 삼 년 넘게 이 집에서 안살림을 도맡아 온 그녀가 이렇게 대놓고 불만을 터뜨리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기에, 나는 마당 한쪽에 서서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게 단순히 한 번의 소란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순임 언니는 나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에 미안함과 원망이 반쯤 섞여 있는 걸 나는 모르지 않았다. 근호 아저씨는 나를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마님, 별일 아닙니다. 그냥 좀 늦어져서요." 별일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의 이마에 그렇게 땀이 흐르는 걸 나는 처음 보았다. '월급이 밀리는 게 이번 한 번뿐일까.' 시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상상도 못 했던 풍경이 이 집에서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었고, 나는 그 조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곳간이 넉넉할 때는 사람 사이의 인심도 넉넉해지고, 곳간이 비면 그 인심부터 먼저 마른다는 걸, 나는 이 집에서 살면서 뼈저리게 배우고 있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그 장면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밥상 앞에서 도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국을 뜨고 있었는데, 저 무심한 얼굴 뒤에서 집안 곳간이 야금야금 비어가고 있다는 걸 알기는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묻는다고 대답해 줄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날 밤 근호 아저씨가 조용히 나를 찾아와 순임 언니가 결국 다음 달을 못 기다리고 그만둘 것 같다는 말을 전했을 때, 나는 그 소식이 놀랍기보다는 오히려 예상보다 조금 늦게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님, 순임이가... 죄송하게 됐습니다. 사람 구하는 대로 바로 채워 넣겠습니다." "아니요, 아저씨 잘못이 아니죠. 순임 언니 사정도 이해가 가고요." "그래도 이 집에서 오래 있었던 사람인데, 이렇게 나가게 돼서." 근호 아저씨의 목소리에는 진짜 미안함이 묻어 있었다. 적어도 이 사람은 유나처럼 잘 다듬어진 미안함이 아니라, 정말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미안함이었다. "아저씨, 요즘 집안 형편이 많이 안 좋은 거죠." 나는 에둘러 묻지 않고 곧바로 물었다. 어차피 짐작하고 있는 걸 돌려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근호 아저씨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씀은 못 드리지만... 마님도 곧 아시게 될 겁니다." 곧 알게 될 거라는 말이 어쩐지 협박처럼 들리는 밤이었다. 청암 강씨 가문의 곳간이 겉보기와 달리 얼마나 비어가고 있는지, 그리고 이 무너짐이 나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나는 그 밤 등불 아래에서 조용히 되새기고 있었다. 유나가 훑고 간 자개함과 백자 병, 그리고 이제 곧 이 집을 떠날 순임 언니의 뒷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 이 집이 무너지는 순서가 정해져 있다면, 그 순서에서 내가 몇 번째일지, 나는 등불이 다 사그라들 때까지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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