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벽 네 시, 아직 닭도 울지 않은 시각에 눈을 뜨는 버릇이 든 지도 벌써 몇 해째인지 헤아리기가 귀찮아졌다. 처음에는 억지로 눈을 떴다면 지금은 몸이 저절로 깨어나 버리는데, 이게 습관인지 병인지 모를 지경까지 왔다는 게 문제였다. 접견일까지 남은 날짜를 손가락으로 꼽아보니 열사흘, 그러니까 열사흘 안에 서역 사절단이 이 왕궁의 정전 앞에 도착할 것이고 그 전에 처리해야 할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뜻이었다. 씨발, 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삼켜졌는데, 왕녀의 몸으로 그런 말을 입 밖에 냈다가는 궁 안 소문이 하루도 안 돼 정전까지 닿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우아하게 웃는 낮으로 속으로만 육두문자를 뇌까리는 것, 이것도 어느새 특기가 되어버렸다.
촛불 하나를 밝히고 서안 앞에 앉으니 어젯밤 미처 다 못 본 상소문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지방 조세 문제, 국경 부근 수비군의 군량 청원, 그리고 서역 사절단을 맞이할 접견 예법 초안까지. 종이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머릿속에서 우선순위를 매기는 나 자신이 낯설었는데, 이게 다 내 일이던가, 아니 애초에 내 일이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일이 되어버린 것들이었다. 조세 문제는 급하지만 국경 군량은 더 급하고, 예법 초안은 미뤄도 되지만 사절단이 도착하는 날 예법을 몰라 실수하면 그건 나라 망신이니 결국 셋 다 오늘 안에 끝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결론이 났으면 뭐 하나, 손은 하나뿐인데.
나는 붓을 들어 태준 오라버니의 이름으로 결재해야 할 서류에 그 특유의 삐뚜름한 서명을 흉내 내 그려 넣었는데, 손목을 살짝 꺾고 마지막 획을 흐릿하게 흘리는 그 버릇까지 정확히 복제해내는 내 솜씨에 스스로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어색하게 삐뚤빼뚤했던 필체가 지금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아졌다는 게, 이걸 잘한다고 좋아해야 하나, 아니면 슬퍼해야 하나. 상서원 관리들도 이제는 의심 한 번 없이 서류를 받아 가니, 이건 재능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었다.
이런 게 정상은 아니라는 걸 나도 안다. 왕자의 인장을 대리하는 자는 정해진 상서원 관리들뿐이고, 왕녀가 오라비의 서명을 대신 쓴다는 건 발각되면 목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짓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매일 새벽 이 짓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오라버니는 국외 요양이라는 명목으로 반년 가까이 궁을 비웠고, 그가 처리해야 할 결재는 산처럼 쌓였고, 그걸 방치하면 왕궁의 행정 자체가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도 안 하니까 내가 했을 뿐이었다. 처음 한두 번은 정말로 어쩔 수 없어서 손댄 거였는데, 그게 반년 가까이 이어지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내 팔자인 거다. 팔자라는 말을 쓰기엔 아직 젊은 나이인데, 벌써 팔자 운운하는 내가 좀 서글프기도 했다.
서윤 언니의 서명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하게 흘려 쓰는 필체에 마지막 점을 톡 찍는 버릇까지 익혀두었는데, 언니는 무도회와 도박판을 오가며 밤을 새우기 일쑤였고 낮에는 숙취로 정신을 못 차렸다. 어젯밤에도 어느 대감댁 자제와 밤새 골패를 돌렸다는 소문이 이미 궁 안에 파다했으니, 오늘 아침 언니의 방에서 나는 술 냄새가 하루 이틀 일이 아닐 터였다. 그러니 그녀의 명의로 나가야 할 상궁 인사 발령이나 연회 물품 조달 결재도 결국 내 손끝에서 완성되었다. 상궁 하나를 어디로 보낼지, 연회에 쓸 비단이 몇 필이나 필요한지, 그런 걸 정작 당사자인 언니는 관심도 없는데 나만 머리를 쥐어짜고 있으니, 이런 걸 능력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병이라고 불러야 할지 나조차 헷갈렸다. 언젠가 이 사실이 밝혀지면 나는 충직한 여동생으로 칭송받을까, 아니면 왕실 문서를 위조한 대역죄인으로 끌려갈까. 답은 뻔한데 자꾸 물어보고 싶은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지쳐 있는 모양이었다.
문 밖에서 조용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전담 궁녀 은채가 소반을 들고 들어왔다. 미역국 한 그릇과 잡곡밥 반 공기, 그게 그녀가 매일 아침 챙겨오는 전부였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국그릇을 보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는데, 이 새벽에 붓만 놀리다가 이제야 밥 생각이 나는 나 자신도 어지간히 무디긴 무디다 싶었다. "마마, 식전에 서류부터 보시면 속이 상하십니다." 은채의 목소리는 늘 무미건조했지만, 그 안에 담긴 배려까지 무미건조한 건 아니었다. 매일 같은 잔소리를 듣는데도 매일 새로 뜨끔한 걸 보면, 이 여자는 잔소리에도 재능이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붓을 내려놓고 숟가락을 들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상소문 위에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던 은채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드시면서 보십시오, 그럼 저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지는데, 그 뒷모습에서마저 못마땅함이 뚝뚝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나가고 난 뒤, 나는 미역국을 반쯤 삼키다가 서류 뭉치 아래 깔린 낯선 문서 한 장을 발견했다. 처음엔 그저 어젯밤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잡문서인가 했는데, 종이의 질감부터가 달랐다. 얇고 매끈한 상소문 용지가 아니라 두껍고 결이 살아 있는 관용지, 그것도 아무나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종류였다. 붉은 인장, 국왕의 그것이었다. 평소 내 서안까지 국왕의 친서가 흘러들어올 일은 없었기에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는데,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 건가 싶어서였다. 밤새 이 방을 드나든 사람이 있었던가. 은채 말고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은채가 이런 걸 가져다 놓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대체 누가.
손끝이 떨리는 걸 느끼며 조심스레 문서를 펼쳤다. 종이를 펼치는 그 짧은 순간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는데, 마치 손이 저 혼자 시간을 늘려놓은 것 같았다.
거기엔 딱 한 줄, '통제를 벗어난 왕족의 행태를 살펴 보고하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작게 적힌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서아.
나였다.
숨이 턱 막혔다. 이게 뭔가, 이게 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건가. 미역국 그릇을 든 손이 허공에서 멈춘 채로, 나는 그 문서를 다시 한번 읽고 또 읽었다.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서였는데, 세 번을 읽어도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글씨체는 분명 국왕의 그것이었고, 필체 끝의 힘 있게 꺾이는 획까지 익히 봐온 그대로였다. 위조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위조라면 오히려 마음이 놓였을 것이다. 진짜였으니까 이렇게 손끝이 얼어붙는 것이었다.
누가 이걸 여기 두었을까. 실수로 흘러들어온 걸까, 아니면 누군가가 일부러 내게 보라고 놓아둔 걸까. 만약 후자라면 그 누군가는 나에게 경고를 하려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미 내가 오라버니와 언니의 서명을 대신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 그걸 넘어서서 국왕 본인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이런 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보다, 새삼스럽게 자각하면서도 나는 문서를 든 손을 내려놓지 못했다.
밖에서 은채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문서를 소맷자락 안으로 밀어 넣었다가, 다시 꺼내 서안 서랍 깊숙이 숨겼다가, 그마저도 불안해서 품속에 다시 집어넣었다. 어디에 두어야 안전한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는 걸 보면, 나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건, 나를 향한 첫 번째 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