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대행 7년, 돌려받은 건 추방

3화

필체 확인이라는 말을 들은 뒤로 나는 사흘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상서원 관리들이 내 필체와 오라버니의 필체를 나란히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비교하는 장면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는데, 상상 속에서마저 그들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지는 게 참 재주라면 재주였다. 상서원에서 필체를 비교한다는 게 정확히 무슨 절차를 밟는 건지, 누구의 지시로 시작된 일인지 알아내야 했는데, 왕궁이란 곳은 정보가 돈보다 귀한 곳이어서 함부로 캐물었다가는 오히려 의심을 자초할 판이었다. 궁녀 하나 붙잡고 "혹시 요즘 상서원에서 필체 비교하는 일 있냐"고 물어봤다가는 그날로 내가 대필범이라는 소문이 퍼질 게 뻔했으니까. 대신 나는 은채를 통해 조각조각 정보를 모았다. 은채는 다른 궁녀들과 눈에 띄지 않게 어울리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잡담을 나누는 척 궁 안 소문을 주워왔다. 처음 이틀은 별 소득이 없었다. 은채가 방으로 돌아와 고개를 젓는 걸 볼 때마다 내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는데, 사흘째 되던 날 그녀가 문을 닫자마자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마마, 상서원 서리 하나가 술자리에서 흘린 말을 주워 왔습니다." 그렇게 모은 정보를 종합하면 이랬다. 최근 몇 달 사이 왕궁 안에서 결재된 문서 중 일부가 실제 왕자와 왕녀의 필체와 미묘하게 다르다는 지적이 상서원 내부에서 나왔고, 그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대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국왕 이헌은 최근 들어 왕족의 '통제'를 유난히 강조하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지방 귀족들 사이에서 왕실의 권위가 흔들린다는 우려가 있었고, 그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국왕은 명목상의 위계질서를 더욱 엄격히 세우려는 것으로 보였다. 다시 말해, 왕자와 왕녀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이름으로 각자의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보여야' 했다. 실제로 누가 그 일을 하는지는 상관없었다. 보이는 게 진실보다 중요한 곳이 여기였으니까. 참 편리한 나라다 싶었다. 알맹이는 필요 없고 껍데기만 멀쩡하면 된다는 소리니, 그 껍데기를 만드느라 새벽마다 손목이 시큰거리는 나는 뭐가 되는 건지. 그리고 그 원칙을 정면으로 흔드는 존재가, 바로 나였다.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는 아니었다.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정통성이란 결국 '누가 결정을 내리느냐'라는 형식으로 완성되는 것이니, 셋째 왕녀가 몰래 첫째 왕자와 첫째 왕녀의 이름을 흉내 내 국정을 대신 처리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건 단순한 대필 사건이 아니라 왕실 전체의 정통성 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다. 개연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이 세계에서는 이게 개연성이었다. 나 하나 목이 날아가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라버니와 언니의 자리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내가 대신 일을 해준 덕분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일이, 사실은 나를 지키기 위한 방패가 아니라 스스로 목에 걸어둔 올가미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셈이었다. 손이 떨렸다. 붓을 쥐고 있지도 않았는데 손끝이 저릿저릿한 게, 몸이 먼저 위험을 감지하고 도망치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이런 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보다. 그런데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게 더 무서웠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으로 몇 가지 경우를 그려봤다. 첫째, 모든 걸 사실대로 털어놓는다. 그건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둘째, 지금 당장 대필을 멈춘다. 그건 왕궁 행정이 마비되는 걸 뜻했고, 그 마비의 원인을 캐다 보면 결국 나한테 화살이 돌아올 게 뻔했다. 셋째, 계속한다. 그럼 목이 열 개라도 남지 않을 판이었다. 답은 하나였다. 눈에 띄지 않아야 했다. 나는 밤새 궁리한 끝에 절충안을 만들었다. 서명을 대신 쓰는 대신, 문서의 초안만 작성해 오라버니와 언니의 사람들에게 넘겨 그들이 직접 서명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바꾸기로 했다. 조금 더 번거롭겠지만 흔적을 줄이는 게 우선이었다. 초안만 넘기면 나중에 누가 뭐라 캐물어도 "저는 초안만 잡았을 뿐이고 서명은 마마들께서 직접 하셨다"고 둘러댈 여지가 생기니까. 완벽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완벽한 방법을 찾겠다는 건 애초에 욕심이었다. 또한 상소문이나 결재 문서에 남는 내 필체의 특징을 최대한 지우기로 했다. 오라버니의 서명을 흉내 낼 때 쓰던 힘의 방향, 붓을 잡는 각도까지 조금씩 바꿔가며 흔적이 남지 않도록 신경 썼는데, 이 짓이 새벽마다 내 손목을 더 아프게 했다. 붓끝을 살짝 눕히면 자연스러운 필체가 나오는데, 흔적을 지우려고 일부러 각도를 세우면 손목에 무리가 갔다. 하루는 붓을 놓고 손목을 주무르다가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남의 글씨를 흉내 내는 것도 힘든데, 이제는 내가 흉내 낸 흔적까지 지워야 하는 처지라니. 이쯤이면 필체 위조 장인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 재능 알아줄 사람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게 함정이었다. 이렇게 며칠을 조심스레 흘려보낸 어느 날, 은채가 다급한 걸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평소의 그녀와는 확연히 다른 속도였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나는 붓을 쥔 채로 그대로 굳었다. "마마, 태준 오라버니께서 마마를 찾으십니다. 지금 당장 정전으로 오라 하셨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는 말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라버니는 여전히 요양지에 머물러 있어야 할 사람이었는데, 지금 정전에 있다는 건 무언가 급한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요양이 끝날 날짜를 손가락으로 세어봤지만 아무리 셈해도 아직 한 달은 더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런데 벌써 돌아왔다고? 그것도 나를 부르러 사람을 보낼 정도로? "오라버니가... 돌아오셨다고?" 내 목소리가 떨렸다. 은채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는데, 그 표정이 평소보다 유독 굳어 있었다. 은채가 저런 얼굴을 하는 건 정말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을 때뿐이라는 걸 나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붓을 내려놓고 은채를 따라 나섰는데, 걸음을 옮기는 내내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회피 전략을 세운 지 며칠도 안 됐는데 이렇게 빨리 시험대에 오르게 될 줄은 몰랐다. 복도를 걸으며 별의별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필체가 들켰나. 누가 나를 봤나. 아니면 그냥 요양지에서 뭔가 다른 이유로 급히 돌아온 거고, 나는 괜한 지레짐작으로 심장을 갈아 먹고 있는 건 아닌가. 제발 후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런 간절함이 이루어진 적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있었는지 세어보니 손가락이 다 접힐 필요도 없었다. 정전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미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문 앞을 지키는 시위군의 표정부터가 평소와 달랐고, 안에서는 낮은 목소리가 오가는 게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은채가 조심스레 문을 밀어 열었고,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상서원 관리들 여럿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고, 그 가운데 오라버니가 반년 만에 돌아온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요양지에서 보냈던 편안한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 그의 표정은 내가 아는 태준 오라버니의 것이 아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건 그냥 안부 인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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