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그 문서를 발견한 밤, 나는 오랜만에 그날을 떠올렸다. 이 낯선 몸에 눈을 뜬 그날 말이다.
원래의 나는 이런 궁궐에서 살 사람이 아니었다. 서울 어느 회사의 경영지원팀에서 매일 야근을 밥 먹듯 하며 결재 서류에 도장 찍는 일을 반복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상사 눈치 보는 게 일상이었고, 퇴근길에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저녁을 때우는 게 낙이었던, 그야말로 평범한 삼십 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새벽 두 시에 퇴근하다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딘 순간이었다. 그때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가 허공으로 흩날리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이게 마지막 기억이라는 게 참으로 하찮지 않은가. 그다음은 새하얀 정신 속에서 누군가의 흐느낌 소리를 들었고, 눈을 떴을 때는 낯선 비단 이불 속에서 낯선 손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하였다. 손톱 밑에 굳은살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나는 죽은 건가 아니면 꿈을 꾸는 건가 하는 혼란이 몇 날 며칠을 갔다. 잠에서 깰 때마다 제발 이번엔 원룸 천장이길 바랐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늘 낯선 처마와 낯선 창호지였다. 결국 답은 하나였다. 나는 대윤국 제3왕녀 이서아라는 몸에 들어와 있었다.
원래의 서아는 몸이 약하고 존재감이 없는 왕녀였다고 했다. 태준 오라버니는 국왕의 유일한 적통 아들이라는 이유로 태어날 때부터 후계자로 확정되어 있었고, 서윤 언니는 첫째 딸이라는 이유로 온갖 사치와 방종이 허용되었다. 나는, 그러니까 서아는 그저 셋째로 태어난 왕녀였을 뿐이며 국왕도 왕비도 그녀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방치라는 말이 정확했다. 밥때를 챙겨주는 사람도 드물었고, 앓아누워도 의관을 부르는 데 반나절이 걸렸으며, 궁녀들조차 그녀를 소홀히 대했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억울해서 눈물이 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눈물조차 사치였다. 살아남는 게 먼저였으니까.
처음엔 이 상황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목표였다. 이 세계의 규칙을 파악해야 했고, 왕실이란 데서 존재감 없는 왕족이 얼마나 위태로운 처지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궁궐이라는 곳은 겉으로는 화려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서열과 쓸모로 모든 게 결정되는 곳이었다. 쓸모없으면 버려진다. 그것도 아주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그래서 나는 유용해지기로 했다. 국왕의 눈에 들려는 게 아니라, 그냥 밥줄이라도 붙어 있으려면 뭔가 쓸모가 있어야 했으니까.
처음엔 작은 문서 심부름부터 시작했다. 지방 관리가 보낸 민원서를 대신 요약해 상서원에 전달했고, 그게 우연히 이태준 오라버니의 눈에 들어 칭찬 한마디를 얻었다. 그 칭찬 한마디가 얼마나 짜릿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회사 다닐 때는 부장님한테 칭찬 한 번 받으려고 밤새 보고서를 뜯어고쳤던 적도 있었는데, 여기서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 싶었다. 그 후로 서서히, 아주 서서히, 나는 오라버니와 언니가 미뤄둔 잡무들을 대신 처리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방 세금 문서를 정리하고, 궁내 행사 일정을 짜고, 심지어는 오라버니 대신 간단한 답신을 써주는 일까지 맡게 되었다. 처음엔 대필이었다. 그저 초안을 잡아드리는 정도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오라버니의 필체를 흉내 내어 서명까지 대신하게 되었다. "서아야, 이런 건 네가 더 잘 쓰잖니." 그 말 한마디에 홀려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서윤 언니는 원래 글씨가 지저분하기로 유명했는데, 어느 날부터는 언니 이름으로 나가는 서신도 내가 대신 써주고 있었다. 처음엔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 죄책감도 곧 익숙해졌다. 익숙해진다는 게 참 무서운 거다.
돌이켜보면 이게 착취였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게 맞을 것이다. 유용한 존재로 남아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으니까. 회사 다닐 때도 그랬다. 잘리면 안 되니까,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에 스스로를 갈아 넣었다. 여기서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 몸만 바뀌었을 뿐, 사는 방식은 하나도 안 바뀌었다는 게 새삼 서글퍼졌다.
이런 이야기를 회상하다 보니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는데, 그때 문밖에서 은채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 상궁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목소리부터가 다르다. 은채는 원래 말수가 적고 목소리가 낮은 편인데, 지금은 더욱 가라앉아서 마치 누가 엿듣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붓을 내려놓고 그녀를 들어오게 했다.
방문이 조용히 열리고, 은채가 조심스레 들어와 방 한가운데 섰다. 그녀는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주상전하께서 왕족들의 행실을 엄히 살피신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특히 통제를 벗어난 이들을 결코 가만두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더군요."
나는 어젯밤 발견한 그 문서를 떠올렸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이런 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보다, 하고 스스로 진단을 내리면서도 정작 몸은 그 진단보다 빠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등에 식은땀이 스며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 소문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겨냥한 건지는 모르나요?" 나는 최대한 담담한 척 물었지만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는 걸 감출 수는 없었다. 손도 슬며시 소맷자락 안으로 숨겼다. 떨리는 걸 보이면 안 되니까.
은채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레 답했다. "확실하진 않으나… 상서원에서 마마의 필체를 확인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필체.
그 두 글자가 머릿속에서 종을 울리듯 쟁쟁하게 울렸다. 내 손끝으로 흉내 낸 오라버니의 서명, 언니의 서명. 몇 달간 밤을 새워 연습했던 그 필체들이 전부 발각될 위기에 놓여 있다는 뜻이었다. 처음엔 오라버니 필체를 흉내 내려고 수십 장의 파지를 만들었고, 언니의 삐뚤빼뚤한 획까지 완벽히 따라 그렸던 그 노력이, 이제는 나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갈 증거가 된 것이다.
역시 개연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친 게 이제 와서 목을 조르는 밧줄이 되다니. 이게 무슨 인생인지 모르겠다. 회사 다닐 때는 야근으로 죽어라 일했다가 상사한테 배신당해 잘렸고, 여기서는 대필로 죽어라 일했다가 이제 그 대필 자체가 목숨을 위협하고 있으니.
"확인이라니… 언제부터 그런 움직임이 있었나요?" 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이미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은채는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이르면 며칠 안에 상서원 관리들이 마마의 처소를 살피러 올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며칠 안에.
나는 순간 숨을 쉬는 법을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