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대행 7년, 돌려받은 건 추방

5화

접견을 청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예전엔 몰랐다. 국왕을 알현하는 데에도 절차가 있었고, 그 절차를 밟는 데에만 사흘이 걸렸다. 상선에게 청을 올리고, 상선이 다시 내명부의 허락을 구하고, 그 허락이 다시 아바마마의 일정을 관장하는 대전 내관에게 전해지는 데까지 하루가 꼬박 걸렸다. 그 사이 나는 협정 초안을 밤낮없이 고치면서도, 그 사흘 내내 아바마마께 올릴 말을 수십 번 곱씹었다. 이렇게까지 준비해야 하나 싶으면서도, 준비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밀려날 것 같아서 멈출 수가 없었다. 접견이 허락되었다는 전언을 받은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 몸단장을 했다. 상궁이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몇 번이고 “저고리 깃이 삐뚤어졌사옵니다”, “허리끈이 너무 조입니다” 하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 잔소리가 오히려 고마웠다. 딴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으니까. 만약 그 시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면 아마 오만 가지 최악의 상상을 다 했을 것이다. 편전으로 향하는 회랑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치맛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가 마치 시간을 재는 초침 같았다. 나는 그 소리에 맞춰 숨을 골랐다. 하나, 둘, 셋. 이렇게 숨을 세다 보면 심장이 덜 뛸까 싶었는데, 별 소용은 없었다. 정전 옆의 편전에서 마주한 아바마마는 생각보다 더 냉랭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곤룡포를 입은 그 모습이 위압적이었는데, 나는 최대한 몸을 낮추며 예를 갖췄다. "소녀 이서아, 아바마마께 청이 있어 이렇게 뵙기를 청했습니다." "말해보아라." 짧고 건조한 대답이었다. 이 어른은 원래 말을 아끼는 성격이었지만, 오늘은 그마저도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마치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삼키고 입을 열었다. "소녀가 지난 몇 해간 왕자님과 왕녀님의 부재 시 국정 실무를 대행해왔다는 사실을 아바마마께서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번 서역 사절단 접견 준비 역시 소녀가 태준 오라버니의 협정 초안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소녀에게 정당한 직함과 그에 걸맞은 권한을 내려주시기를 청하옵니다." 말을 마치고 나니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렇게 정면으로 요청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지금까지는 그저 조용히 뒤에서 처리하는 쪽이 안전했는데, 오라버니의 압박에 밀려 결국 이 자리까지 온 것이었다. 태준 오라버니가 웃으면서 “네가 직접 아뢰어야 힘이 생기지 않겠느냐”라고 했을 때는 그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는데, 지금 이 자리에 서고 보니 오라버니가 나를 방패로 세운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니야, 지금 그런 생각할 때가 아니지. 아바마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무표정함이 더 무서웠다. 편전 안에 있던 상선도, 곁을 지키던 내관도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 정적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나는 그 사이 심장이 몇 번이나 뛰었는지 세어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한참의 정적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네가 실무를 대행해왔다는 건 짐도 들어 알고 있다. 허나 그것이 곧 네게 자리를 내려야 할 이유가 되는 건 아니다." "어째서입니까." 나는 예의를 갖추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되물었다. 속으로는 이 양반이 지금 뭐라는 건가 싶었지만, 표정은 최대한 침착하게 유지했다. 겉으로는 온순한 신하의 낯을 하고, 속으로는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은, 그런 괴리가 이미 몸에 익어버린 지 오래였다. "왕실의 자리는 실무 능력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정통성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네가 아무리 유능하다 한들, 그것은 오히려 이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원인이 될 수 있다. 태준과 서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이름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보여야 백성과 신료들이 왕실을 믿는다. 네가 뒤에서 아무리 그들의 몫을 대신한다 해도, 그건 짐이 원하는 질서가 아니다." 말인즉슨, 내가 잘하는 게 문제라는 뜻이었다. 하늘이 노래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유용해지려고 발버둥 친 모든 노력이, 이 사람 눈에는 위협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무능한 척이라도 하는 게 나았을까. 아니, 그것도 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능하면 버려지고 유능하면 경계당하는 이 판에서, 대체 어느 쪽이 정답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소녀는 앞으로도 이름 없이, 이렇게 지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목소리가 살짝 떨렸는데, 이건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였다. 이런 게 억울하다는 감정인가 보다, 하고 스스로 진단하면서도 그 진단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억울하다고 판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분하다고 아바마마가 마음을 돌릴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다." 아바마마의 대답은 단호했다.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는, 그런 말투였다.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아바마마의 눈을 바로 보았다. 예에 어긋나는 짓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그 눈 속에서 나는 분노나 냉대가 아니라, 오히려 지친 듯한 피로를 보았다. 이 어른도 뭔가와 싸우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곧 지워버렸다. 지금 내 앞에 놓인 문제가 더 급했으니까. "허나 소녀가 계속 이름 없이 일한다면, 그 일의 책임 또한 소녀의 것이 아니게 됩니다. 만에 하나 협정이 어그러진다면, 그 책임은 누구의 것이 됩니까."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건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라, 정말 궁금한 것이었다. 이 판에서 나는 대체 뭘로 존재하는 건가 싶어서. "그건 짐과 태준이 짊어질 몫이다. 너는 그 무게를 짊어질 자리에 있지 않다." 아바마마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동작 하나로 대화가 끝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짐이 지금 네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조용히 지내라는 것뿐이다. 접견 준비는 태준의 이름으로 계속하고, 네 이름은 어디에도 드러나서는 안 된다. 그게 지금 짐이 너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배려다." 배려라니. 이게 배려로 들리나. 나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지만, 속에서는 뭔가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목구멍 어딘가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다가 다시 가라앉는 걸 몇 번이나 반복했다. 이게 화병이라는 건가. 아니면 그냥 화병이 되기 전 단계인가. 편전을 나서면서 나는 아바마마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마지막 배려'라는 그 말이 유난히 걸렸는데,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앞으로 더 이상 배려가 없을 거라는 뜻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배려가 사라진 다음에는 무엇이 남는가. 방치인가, 아니면 뭔가 더 노골적인 압박인가. 회랑을 걸어 나오는 내내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편전 문 앞에 서 있던 상궁 하나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내 시선을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동정이었을까, 아니면 경계였을까. 아니면 그저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보는 눈이었을까. 셋 다 아니길 바랐지만, 그중 하나일 확률이 가장 높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처소로 돌아가는 길, 나는 협정 초안이 든 서류 뭉치를 다시 품에 안았다. 종이 뭉치의 무게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열흘 안에 이걸 끝내야 하고, 그 이후엔 아무 이름도 없이 또 다음 일을 떠맡아야 할 것이다. 담판은 실패했다. 정당한 자리를 얻는 것은 실패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실패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뭔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감이 목덜미를 스쳤을 뿐이었다. 아바마마의 눈빛 속에는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뭔가를 이미 결정해둔 사람의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 확신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이 왕궁 안에서, 나를 둘러싼 무언가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처소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낯익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태준 오라버니였다. 그 표정이 평소와 달리 묘하게 굳어 있는 걸 보고, 나는 직감했다. 아바마마와의 접견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