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대행 7년, 돌려받은 건 추방

4화

정전으로 오라는 전갈을 받은 게 아침 댓바람부터였다. 시녀가 문을 두드리며 "왕녀님, 제1왕자께서 급히 찾으신다 하옵니다" 하고 고했을 때, 나는 이불 속에서 이미 육감으로 알았다. 좋은 일로 부를 리가 없다는 걸. 반년 만에 요양지에서 돌아온 오라버니가, 돌아온 지 사흘도 안 되어 나를 불러들이는 것부터가 수상했다. 아프다고 몇 달을 놀다 온 사람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새벽부터 사람을 찾는단 말인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는 온갖 최악의 경우가 스쳐 지나갔지만, 설마 그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경우를 뽑는 재주가 나한테 있을 줄은 몰랐다. 정전에 들어서자 대감들이 이미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숫자가 심상치 않았다. 보통 왕자 하나 부르는 데 이렇게 많은 관리들이 모일 이유가 없었으니까. 심장이 슬쩍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지만, 표정만은 평소처럼 무심하게 유지하려 애썼다. 이런 데서 얼굴에 티가 나면 그날로 끝이라는 걸 몸으로 배운 지 오래였다. "서아야." 오라버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밑바닥에 짜증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나는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지만, 속으로는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나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요양지에서 살이라도 좀 붙었을까 싶어 슬쩍 훑어봤는데, 얼굴은 오히려 전보다 핼쑥해 보였다. 요양은 무슨, 저기서도 뭔가 사고를 친 게 분명했다. 상서원 대감 하나가 앞으로 나와 문서 뭉치를 내밀었다. 두께가 제법 되는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두꺼운 문서는 대체로 좋은 소식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게 내 경험상의 법칙이었다. "제1왕자께서 서역 상단과 체결하신 무역 협정 초안에 문제가 있습니다. 협정 조건 중 일부가 이미 우리 조정이 서역 사절단과 합의한 접견 예법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으며, 이대로 진행되면 사절단 접견 당일 큰 외교적 파열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파열이라니. 대감이 쓰는 단어치고는 제법 폭력적인 표현이었는데, 서류를 넘겨받아 실제로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그 단어가 오히려 온건한 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첫 장을 넘기고, 둘째 장을 넘기고, 셋째 장에서 나는 눈을 몇 번이나 비볐다. 잘못 읽은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오라버니가 요양지를 순회하며 체결한 것으로 되어 있는 이 협정은, 사절단이 대윤국의 관례를 존중하지 않고 자국 방식대로 접견을 진행하도록 허용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협정 제3조(접견 예법·국서 교환·혼약 절차)는 양국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핵심 조항이었는데, 오라버니가 가져온 초안은 그 내용을 정면으로 뒤집고 있었다. 그것도 한 줄 슬쩍 끼워넣은 게 아니라, 조항 세 개에 걸쳐 아주 상세하게, 마치 서역 쪽에서 불러주는 대로 받아쓴 것처럼 정성스럽게 명시되어 있었다.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이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조정 전체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사안이었다. 접견 당일 사절단이 대윤국의 예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굴어도 그게 협정상 정당한 권리가 되는 셈이니, 그날 조정 대신들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는 상상만 해도 아득했다. 왕이 절을 받아야 할 자리에서 서역 사신이 고개만 까딱하고 지나가는 그림이 떠올랐다. 그것도 우리 쪽 서류에 도장까지 찍혀서. "이걸… 오라버니께서 직접 서명하셨습니까?"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물었지만, 속으로는 이 새끼야 하는 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하려고 어금니를 슬쩍 물었다. 오라버니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내가 직접 다 확인할 순 없었다. 현지 사정이 복잡했고, 통역이 급했으니…" 요컨대 대충 서명하고 넘겼다는 뜻이었다. 현지 사정이 복잡했다는 말은, 아마 술자리가 복잡했거나 잠자리가 복잡했다는 뜻이겠지. 통역이 급했다는 건, 통역관 말을 반쯤만 듣고 나머지 반은 대충 짐작으로 채웠다는 뜻일 테고. 여섯 달 동안 요양지에서 이 인간이 뭘 하고 지냈는지 갑자기 아주 선명하게 그려졌다. 대감들의 시선이 일제히 오라버니에게 향했다가, 이내 나에게로 옮겨왔다. 그 시선의 방향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미리 짜놓은 각본처럼, 시선이 오라버니에게서 시작해 나에게 도착하는 그 짧은 순간의 흐름이 너무 매끄러웠다. 이거 각본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스쳤다. "제3왕녀께서 이런 사안을 다뤄본 경험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접견 당일까지 이 협정을 수정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경험이 있다고 들었다니, 누가 그런 말을 흘렸는가. 나는 눈알을 굴리며 오라버니를 쳐다봤는데, 그의 표정에서 답을 읽을 수 있었다.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슬쩍 피하는 그 눈동자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이 양반이 자기 실책을 나에게 떠넘기기 위해 미리 손을 써둔 것이었다. 아마 요양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혹은 돌아오기도 전에 벌써 대감들에게 슬쩍 흘려뒀겠지. 제 동생이 실무에 밝다고, 이런 일쯤 눈 깜짝할 사이에 처리한다고.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정말 잠깐 스쳤다가 사라졌다. 여기서 표정 관리 못 하면 그날로 끝장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제가 나설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일단 거절부터 시도했다. 회피 전략을 세운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대놓고 판에 끌려 들어가면 그 전략이 다 무너지는 것이었으니까. 조용히 숨어 지내며 눈에 띄지 않는 게 목표였는데, 이런 큰 판에 이름이 오르면 그 목표는 물 건너가는 거였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아야, 지금 이 상황에서 겸양을 부릴 때가 아니다. 사절단 접견까지 열흘도 안 남았어. 이걸 수정 못 하면 조정 전체가 망신을 당하는 거다." 망신을 당하는 건 조정이 아니라 당신이겠지, 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삼켰다. 대신 나는 서류를 다시 한 번 훑으며 시간을 벌었다. 대감들도 오라버니의 편을 들며 나를 압박했다. "제3왕녀께서 평소 실무에 밝으시다는 건 궁 안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번만 도와주십시오." 다른 대감 하나가 옆에서 덧붙였다. "지난번 곡물세 문서 정리하신 것도 다들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세 번째 대감까지 나서서 "이런 재주를 왕녀께서 가지고 계신 걸 아바마마께서도 아셔야 할 텐데" 라는 말을 흘렸는데, 그 말이 위로인지 협박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었다. 평소 실무에 밝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는 그 문장이 뒤통수를 때렸다. 회피하려 애썼는데, 소문은 이미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퍼져 있었던 것이다. 필체를 지우고 흔적을 줄이려 애쓴 게 다 무슨 소용이었나 싶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동안 밤을 새워가며 흔적을 지운 노력이, 결국 이런 식으로 소문이 되어 되돌아올 줄이야. 누가 흘렸는지는 몰라도, 그 입방정을 조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결국 나는 그 서류를 받아들었다. 거부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거부하면 오라버니의 실책이 더 크게 드러날 것이고, 그 화살은 결국 나에게 돌아올 게 뻔했다. 대감들 앞에서 오라버니의 잘못을 대놓고 지적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었거니와,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이 일에서 완전히 빠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다면 최소한 협상은 해봐야 했다. "수정은 해드리겠습니다." 서류를 품에 안으며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여기서 조건 하나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렇게 대놓고 끌려들어가는 판에, 최소한의 대가는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이 일이 끝나면 제 이름으로 정식 직함을 청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십시오." 나는 짐짓 담담한 척 조건을 걸었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손끝이 살짝 저릴 정도였으니까. 이런 조건을 내가 감히 걸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동시에 이게 통할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이상하게 후련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차피 일은 내가 다 할 텐데, 최소한 이름값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정전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대감들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왕녀가 이런 자리에서 조건을 거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을 테니, 다들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게 눈에 보였다. 오라버니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 "그건 아바마마께 직접 여쭤야 할 일이지,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피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 사람 이거 완전히 책임 회피의 달인이네. 실책은 자기가 저질렀는데 수습은 내가 하고, 보상 문제는 다시 아바마마에게 던져버리는 이 구조가 어이없을 정도로 편리했다. 하지만 지금은 따질 여유가 없었다. 대감들 앞에서 오라버니와 언성을 높이는 건 여기서 더 나쁜 소문을 만드는 지름길이었으니. 나는 서류를 품에 안고 정전을 빠져나왔는데, 뒤에서 대감들이 안도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안도하는 건 저들이었고, 나는 그저 새로운 폭탄을 하나 더 안고 걷는 기분이었다. 복도를 걷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품에 안은 서류 뭉치가 실제 무게보다 훨씬 더 무거운 것 같았다. 열흘. 이 협정을 수정하고, 접견 예법을 다시 정리하고, 그러면서도 필체와 흔적을 지워야 하는 이중 작업을 열흘 안에 끝내야 했다. 밤을 몇 번이나 새워야 할지 계산하다가 이내 그만뒀다. 계산해봐야 답은 뻔했으니까. 자는 시간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끝에는 오라버니가 던진 애매한 답변, 그러니까 아바마마께 직접 여쭈라는 그 말이 남아 있었다. 처음엔 그 말이 그저 회피용 방패막이라고 생각했는데, 걷다 보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회피라면 회피대로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아바마마께 직접 여쭤야 할 일이라면, 정말로 여쭈면 될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말로 여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회피 전략이니 조용히 숨어 지내느니 하는 계획은 이미 물 건너간 것 같았고,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판을 키워서 아바마마 앞에 직접 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다만 그 판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아바마마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맞이할지는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다. 복도 끝 모퉁이를 돌자 익숙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그 그림자를 보고 나는 속으로 아, 하고 짧은 탄식을 삼켰다. 오늘은 정말 쉬운 날이 하루도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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