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재 속에서 태어난 용

1화

대진 제국의 황궁, 그 깊은 곳에 있는 서고에는 밤마다 등불 하나가 켜졌다. 창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굵은 눈송이가 기와 위에 쌓이고, 처마 끝에서 고드름이 자라나는 소리가 서걱, 서걱 울렸다. 바람이 잦아들 때마다 눈은 더욱 소리 없이 쌓였고, 그 적막함이 서고 안의 무거운 공기를 한층 짓눌렀다. 서고 안에는 다섯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등불 하나가 그들의 얼굴을 비췄지만, 그림자는 등불보다 짙어 다섯의 표정을 절반쯤 삼키고 있었다. 중앙에는 전조(前朝) 중신 이효림이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검은 목함 하나가 놓여 있었고, 함 뚜껑이 열리자 은은한 청록빛이 방 안을 물들였다. 아홉 마리 용이 새겨진 인장, 구룡문장(九龍紋章)이었다. 빛은 등불보다 차가웠고, 그 냉기가 좌중의 숨소리마저 가라앉히는 듯했다.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제국은 이름만 남고 사라질 것입니다." 이효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 앉은 노인, 위덕수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끝은 옷소매 안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오. 남쪽에서 올라오는 반란군의 기세가 심상치 않소." 위덕수의 목소리에는 체념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나머지 셋도 말없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누군가는 고개를 떨궜고,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이 방 안의 결정이 앞으로 남은 목숨의 길이를 결정하리라는 것을. "그렇기에 지금 결사를 맺어야 합니다." 이효림이 목함을 다시 닫았다.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우리 다섯이 이 문장을 지키는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누구 하나가 쓰러지더라도, 나머지가 이어받아야 합니다." 좌중은 말이 없었다. 창밖에서 바람이 문풍지를 울렸고, 등불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 속에서 다섯 사람의 그림자도 함께 일렁였다, 마치 이미 정해진 운명을 예감이라도 하듯이. 한참 만에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중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결사의 이름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이효림이 목함 위에 손을 얹었다. "이름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이것이 곧 우리의 이름이 될 테니까요." 그것이 시작이었다. 대진 제국의 마지막 밤, 다섯 사람의 결사가 맺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들 자신뿐이었다. 등불은 새벽이 오기 전에 꺼졌고, 그들은 각자의 처소로 흩어졌다. 아무도 다시 그 밤을 입에 담지 않았다. *** 석 달 뒤, 황궁은 불타고 있었다. 붉은 화염이 지붕을 타고 넘실거렸고, 검은 연기가 밤하늘을 가리며 눈송이마저 재로 물들였다. 사람들의 비명과 말발굽 소리, 창칼이 부딪히는 쇳소리가 뒤섞여 궁궐 전체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었다. 반란군의 깃발이 성문 위로 오르는 순간, 이효림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뒷문으로 뛰었다. 이청, 이제 겨우 열한 살 난 소년이었다. 소년의 발이 젖은 돌바닥에 미끄러졌지만, 아버지의 손이 그를 붙잡았다. 그 손아귀의 힘이 평소와 달리 아플 정도로 세었다. "아버지,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이청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눈앞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 빛이 낯설고 무서웠다. "묻지 마라. 지금은 그냥 뛰어야 한다." 이효림의 목소리는 평소의 온화함을 잃고 갈라져 있었다. 뒤편에서 함성이 들렸다.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이 뒤섞여 밀려왔다. 발밑에서 눈이 붉게 물든 것을 이청은 보지 못했다. 다만 아버지의 손이 점점 더 차가워지는 것만을 느꼈을 뿐이다. 담벼락을 몇 개 넘고, 좁은 골목을 지나쳤을 때, 이효림이 걸음을 멈췄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그는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품속에서 목함을 꺼내 아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걸 반드시 지녀야 한다. 누구에게도 보이면 안 돼." 목함을 건네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는요?" 이청의 목소리가 떨렸다. 목함의 서늘한 감촉이 손바닥에 닿자,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대답 대신, 이효림은 아들을 담벼락 뒤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검을 뽑았다. 검신이 불빛을 받아 붉게 번뜩였다. 서걱― 짧은 파열음과 함께 그림자 하나가 담을 넘어 들어왔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그 눈은 새까만 구멍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귀도지네였다. 그것의 움직임은 사람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 매끄러웠고, 걸음마다 발밑의 눈이 검게 물들었다. 이효림의 검이 그것을 베었으나, 베인 자리에서는 피 대신 검은 안개가 새어 나왔다. 안개는 흩어지지 않고 다시 뭉쳐 사람의 형상을 만들었다. 마치 벤 것이 무의미하다는 듯, 그것은 다시 천천히 일어섰다. "청아, 뛰어라!" 아버지의 외침이 마지막이었다. 이청은 뒤를 돌아보지 못한 채 담을 넘어 달렸다. 두 다리가 제 것이 아닌 듯 멋대로 움직였고, 눈앞은 눈물인지 눈보라인지 모를 것으로 뿌옇게 흐려졌다. 등 뒤에서 들려오던 검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다가, 어느 순간 뚝 끊겼다. 정적. 소년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발걸음을 멈추면 그 의미가 현실이 될 것 같아, 이청은 더 세게 다리를 움직였다. 눈이 내리는 밤, 이청은 목함을 품에 안은 채 불타는 황궁을 등지고 달렸다. 발바닥은 이미 감각이 없었고, 숨은 목구멍을 찢을 듯 뜨거웠다. 옷자락은 눈과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무겁게 다리에 감겼다. 등 뒤로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따라붙는 기척이 느껴졌다. 뒤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소년은 오직 앞만 보고 뛰었다. 골목을 몇 개나 지났을까, 이청의 발이 마침내 힘을 잃고 눈밭 위로 고꾸라졌다. 무릎이 까지고 손바닥이 시렸지만, 그는 품속의 목함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온전했다. 청록빛이 옷자락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과 화염의 열기가 등을 덥혔지만, 이청의 몸은 오히려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다시는 듣지 못할 목소리라는 것을, 소년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 이청은 자신이 누구인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소년이 되었다. 눈밭 위에 남은 것은 작은 발자국과, 그 발자국을 따라 스며드는 검은 안개의 흔적뿐이었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