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재 속에서 태어난 용

5화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왔다. 산비탈에는 눈이 녹은 자리마다 여린 풀잎이 돋았고, 학원의 담장 안으로는 벚꽃 잎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위덕수가 사라진 산길에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반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그동안 이청은 흑기 처소에서 지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학원의 규율을 익혔다. 경맥이 막혀 무공을 배우지 못하는 처지였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쫓겨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문제는 서류였다. 학원의 정식 문서에 이름을 올리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백기(白旗) 세력을 이끄는 조엄관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신분이 불분명한 자를 어찌 흑기의 명부에 올린단 말입니까." 조엄관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출신도, 근본도 알 수 없는 아이입니다. 원장님." "조 원장." 이효운이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손끝이 종이를 누르는 힘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 아이의 신분은 내가 보증하겠네. 더는 이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보증이라 하심은…." "내 이름을 걸겠다는 뜻일세." 이효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도 부족한가?" 원장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조엄관은 몇 번이고 입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효운의 결기를 꺾을 재간이 그에게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조엄관이 결국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자리에서 물러나며 스치듯 던진 눈빛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의구심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렇게 이청은 유풍학원 흑기(黑旗)의 정식 제자가 되었다. *** 흑기 처소의 아침은 오늘도 소란스러웠다. 이청이 눈을 뜨자마자 들려온 것은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야 이 자식아! 내 활 어디다 뒀어!" "내가 왜 알아, 이 멍청아! 니가 어디 처박아 놓고 나한테 왜 지랄이야!" 두 소년이 마당 한복판에서 서로 멱살을 잡고 있었다. 한쪽은 덩치가 크고 다혈질인 목소리를 가진 남기였고, 다른 한쪽은 마른 체구에 눈매가 매서운 청하였다. 남기의 손가락이 청하의 옷깃을 틀어쥐자, 청하도 지지 않고 남기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놔, 이 자식아!" "니가 먼저 놔!" 그 옆에서는 소은이 발을 동동 구르며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그, 그만해요! 소, 손 원장님 오시면 다, 다 혼나요! 지, 지난번에도 벌서고 그랬잖아요!" 아무도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남기의 어깨가 씰룩거렸고, 청하의 눈매는 더욱 매섭게 좁혀졌다. 이청은 그 광경을 마루에 걸터앉아 지켜보았다. 반년째 보아온 풍경이었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시끄럽구나." 낮은 목소리 하나가 마당을 가로질렀다. 손이화였다. 그녀가 나타나자마자 두 소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멱살을 풀고 자세를 바로 했다. 남기는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고, 청하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활은 창고 뒤편에 있더구나. 남기 네가 어제 손질하고 그대로 두고 온 것이다." 손이화가 짧게 말했다. 남기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게…." "되었다." 손이화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이청 쪽으로 돌렸다. "오늘부터 정식으로 흑기 명부에 이름을 올린다. 각오는 되었느냐." 이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눈빛이었다. 경맥은 여전히 막혀 있었고, 수련은 시작조차 못 하고 있었지만, 그는 이제 이곳이 자신이 머물 곳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손이화의 시선이 잠시 이청의 가슴께에 머물렀다. 옷깃 아래 감춰진 목함을 아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 잘됐다! 이, 이제 진짜 흑기예요!" 소은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남기와 청하도 슬그머니 따라 웃었다. "흠, 그럼 오늘부터 저 녀석도 우리랑 같이 훈련장 청소 돌리는 건가?" 남기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이 멍청아. 명부에 이름 올랐으면 잡일도 같이 해야지." 청하가 받아쳤다. "누가 너한테 물어봤냐?" "…또 시작이네." 소은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청은 그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아주 조금 입꼬리를 올렸다. *** 같은 날 오후, 원장실에서는 다른 종류의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벚꽃 잎이 바람에 실려 날아갔지만, 방 안의 공기는 그와 어울리지 않게 무거웠다. 이효운의 앞에는 천서성주 남검호가 보낸 서신이 놓여 있었다. 봉인을 뜯은 흔적 위로, 그의 손끝이 몇 번이고 종이 모서리를 매만졌다. "대성 제국이 다시 사절을 보내겠다는군." 이효운이 서신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이번엔 항복 문서에 도장을 받으러 오겠다는 뜻이겠지." 부관이 조심스레 물었다. "남 성주께서는 뭐라 답을 주셨습니까?" "아직 답하지 않으셨네." 이효운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다만…"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창밖을 향하던 시선이 다시 서신으로 돌아왔다. "곧 각 학원 간의 대형 비무(比武) 행사가 열릴 거라는 소식일세. 대성 제국 쪽에서 그 자리를 빌려 무언가를 시험해 보려는 모양이야." "무엇을 말입니까?" 이효운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흑기 처소 쪽으로 향했다. 저 멀리 마당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남기의 고함과 소은의 웃음소리가 봄바람에 실려 여기까지 닿았다. "글쎄. 아직은 나도 알 수 없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다만 이 학원 안에, 저들이 눈여겨볼 만한 것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지." 부관은 더 묻지 않았다. 다만 이효운의 굳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무언가를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뿐이었다. 창밖으로 저물어가는 햇살이 원장실 바닥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 끝에서, 이효운은 조카의 품속에 여전히 감춰져 있는 목함을 떠올렸다. 반년 전, 위덕수가 사라진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은 그것을. 대성 제국이 정말로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머지않아 그 답을 알게 될 것이라는 예감만은, 뚜렷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서신 위에 찍힌 천서성의 인장이, 저물어가는 햇살 아래 유독 붉게 보였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