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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무명촌은 작았다. 집이 서른 채도 안 됐다. 흙길 양쪽으로 낮은 담이 이어졌다. 담장마다 이끼가 껴 있었다.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도 섞였다. 공기 냄새를 맡았다. 흙냄새, 거름 냄새, 그리고 아주 옅은 쇠 냄새. 게임 화면 너머로만 봤던 마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냄새가 있었다. 소리가 있었다. 발밑에서 흙이 부서지는 감촉이 있었다. 박덕수는 나를 데리고 마을을 돌았다. "여긴 무기 상점." "여긴 방어구 상점." "여긴 여관." 그가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었다.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알고 있었다. 전부. 나는 전부 알고 있었다. 지도를 손바닥처럼 외웠던 곳이었다. 플레이 타임 몇백 시간. 초반 마을 구조는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오, 저기는 뭐예요?" 일부러 물었다. 낡은 창고를 가리키며. 게임에서는 그냥 배경 오브젝트였던 건물이었다. "저긴 그냥 창고다. 신경 쓸 거 없어." 박덕수가 대답했다. 예상한 답이었다. 안심이 됐다. 데이터가 맞았다. "넌 던전 학원 입학시험을 준비해야 한다." 박덕수가 말했다. "학원이요." "1021개 직업 중에서, 정식으로 클래스를 받으려면 학원을 거쳐야 해. 무직으로는 오래 못 버틴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무직으로 오래 버티는 게 목표였다. 직업을 받는 순간 게임 시스템에 완전히 종속된다. 그건 원치 않았다. 그가 모르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무직이 왜 안 좋은 거예요?" "스탯 성장이 절반이야. 마나도 안 쌓이고. 던전 들어가면 반나절 만에 시체 된다." "학원 시험은 어려워요?" "쉽진 않지. 매년 백 명 중 열댓 명만 붙는다." 숫자를 들으니 머릿속에서 계산이 돌아갔다. 합격률 15퍼센트. 낮은 확률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확률이 아니라 정답지가 있었다. "그런데." 박덕수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넌 아까 상점 위치를 다 아는 것처럼 걷더구나." 숨이 턱 막혔다. 발끝이 순간 굳었다. "처음 온 마을인데." 그의 눈이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았다. 의심하는 사람의 눈이었다. "그, 그냥 느낌이 좋아서." 말이 헛돌았다. 변명이 부족하다는 걸 스스로도 알았다. "허." 박덕수는 웃었다. 의심이 아니라 그냥 신기해하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 안도감이 확 밀려왔다. 어깨에 힘이 풀렸다. "머리는 좋은데 건망증이 있는 것 같구나. 사흘 전 일도 기억을 못 하고." 건망증.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나는 뭔가를 잊었다. 뭘 잊었는지는 몰랐다. 사흘. 그 사흘 동안 내가 뭘 했는지, 어디서 뭘 겪었는지, 아무 기억이 없었다. 숲에서 발견됐다는 것 말고는. "제가 사흘 동안 뭘 했는지 아세요?" 물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썼다. "글쎄. 넌 열이 심했다. 헛소리도 좀 하고. 우리도 자세히는 몰라." 헛소리. 무슨 말을 했을까. 혹시 게임 얘기를 한 건 아닐까.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가자. 최기철한테 인사부터 시켜야겠다." 박덕수가 앞장섰다. 나는 뒤따랐다. 머릿속은 여전히 사흘의 공백을 더듬고 있었다. 무기 상점 문을 열었다. 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칼과 창이 벽을 따라 줄줄이 걸려 있었다. 검신마다 기름칠이 되어 반짝였다. 카운터 위에는 숫돌과 가죽끈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어이, 덕수." 덩치가 큰 남자가 카운터에서 손을 흔들었다. 팔뚝에 화상 자국이 있었다. 대장간 일을 오래 한 사람 특유의 흔적이었다. "이 녀석이 그 숲에서 발견된 애야?" "그래. 이하준이라고 한다." 최기철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의 시선이 내 손목, 어깨, 발끝을 차례로 지나갔다. 평가하는 눈이었다. "쓸 만해 보이네."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 최기철은 초반 서브퀘스트를 주는 NPC였다. 도시락 배달 퀘스트. 완료하면 초반 최고 성능의 단검을 준다. 공격력 12, 치명타율 5퍼센트 추가. 랭커 유저들이 시작 지역에서 무조건 챙기던 필수 퀘스트였다. 서버 초기, 그 단검 하나로 초반 사냥터를 씹어먹었다는 후기를 몇 개나 읽었는지 모른다. "저기, 뭐 도와드릴 일 없어요?" 나는 먼저 말을 걸었다. 이 대화를 유도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최기철이 눈을 크게 떴다. "이야, 눈치 빠르네." 그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사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데요." "내 아내가 밭에 나가 있는데, 도시락을 못 갖다줬어. 가게 비울 수가 없어서." 그의 목소리에 미안함이 섞여 있었다. 가게를 비우면 손님을 놓친다. 당연한 걱정이었다. "제가 갖다드릴게요." "진짜?"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눈꼬리가 접히면서 주름이 깊어졌다. "고맙지. 대신 뭐라도 챙겨줄게." "뭘요?" "그건 갖다주고 나서 얘기하자." 대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냥 '뭐라도'. 게임에서는 확정 보상이었다. 퀘스트창을 열면 아이템 이름과 수치가 정확히 떠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말이 다르면 결과도 다를 수 있었다. 나는 그 애매함이 마음에 걸렸다. 확률로 치면 도박이었다. 그런데도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확정 보상이 아니어도, 단검이라는 결과값 자체는 데이터에 남아 있었으니까. "밭 위치는요?" 물어봤다. 알고 있었지만, 물어보는 게 자연스러웠다. "마을 서쪽 끝, 큰 느티나무 옆." "멀어요?" "걸어서 이십 분쯤 될 거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느티나무의 위치, 밭의 모양, 그 옆으로 흐르는 작은 도랑까지. 말하지 않고 도시락 바구니를 받았다. 바구니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안에서 뭔가 국물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밖으로 나오자 박덕수가 나를 불렀다. "조심해서 다녀와라." "네." "밭길이 좀 험해. 넘어지지 말고." 평범한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이상하게 든든했다. 누가 나를 걱정해준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이 삶에서도. 서쪽으로 걸었다. 흙길이 점점 좁아졌다. 주변 풀숲이 무릎까지 올라왔다. 바짓단에 이슬이 묻어 축축해졌다. 어딘가에서 벌레 소리가 났다. 걷는 동안 나는 계속 계산했다. 이 퀘스트를 완료하면 단검을 얻는다. 단검은 초반 전투에서 결정적이다. 무직 상태에서도 무기 성능만큼은 스탯을 뛰어넘는다. 게임 데이터가 그렇게 말해줬다. 공격력 12. 초반 슬라임 한 방, 코볼트 두 방. 숫자들이 머릿속에서 착착 정렬됐다. 그런데 뭔가 께름칙했다. 계속 뒷목이 서늘했다. 사흘의 공백. 건망증이라는 단어.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감각. 그게 뭔지 짚어내려 할수록 더 흐려졌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지는 느낌이었다. 혹시 게임 지식이 원래 완벽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혹시 이 세계가 게임과 조금씩 다른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지도는 정확했다. 상점 위치도 정확했다. 최기철의 퀘스트 대사도 거의 그대로였다. 그럼 뭐가 문제일까. 느티나무가 보였다. 멀리서도 그 크기가 짐작됐다. 줄기가 세 사람이 손을 잡아도 두르지 못할 만큼 굵었다. 가지 끝에서 그늘이 넓게 퍼져 있었다. 그 아래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등이 굽어 있었다. 밭일을 하다 잠깐 쉬는 것 같았다. 손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였다. "저기요." 내가 부르자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낯빛이 좋지 않았다. 입술이 조금 하얗게 튼 것 같았다. 눈 밑에 그늘이 짙었다. 게임 속 대화창에서는 이 장면이 그냥 짧은 컷씬이었다. 대사 세 줄, 아이템 인도, 끝. 나는 그 컷씬을 몇 번이나 클릭해서 넘겼는지 기억도 안 났다. 그때는 그냥 지나가는 텍스트였다. 그런데 지금 여자의 얼굴에는 뭔가 다른 게 있었다. 피곤함이 아니라, 뭔가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숨을 고르게 쉬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도시락 갖고 왔어요." 나는 바구니를 내밀었다. 손이 살짝 떨렸다. 이유는 몰랐다. 여자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눈빛이 오래 머물렀다. 사람을 판단하는 눈이 아니라, 뭔가를 확인하려는 눈이었다. "기철이가 보냈니." "네."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됐다. 평범한 대사였다. 게임 대사창과 거의 똑같았다. 여자의 손이 바구니를 받으며 떨렸다. 작게 떨렸다. 게임 대사창에 없던 디테일이었다.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바구니 손잡이를 놓는 그 짧은 순간, 여자의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멍처럼 보이는 얼룩이 소매 밑으로 살짝 비쳤다. 아니, 잘못 본 걸까. 빛이 이상하게 비친 걸까. 이게 정말 내가 아는 그 퀘스트일까. 게임 지식이 정말 이 세계에서 그대로 통할까. 확신이 흔들렸다. 여자가 바구니 뚜껑을 열었다. 안을 들여다보는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배고픔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고맙다." 여자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갈라져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여자의 손끝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느티나무 그늘이 유난히 서늘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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