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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오전 11시 30분. 마을 회관 앞 게시판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던전 학원 입학시험 - 3개월 후] 숨이 조여들었다. 3개월. 생각보다 짧았다. 손끝으로 종이 끝을 만졌다. 종이는 거칠었고 잉크는 아직 덜 마른 것처럼 진했다. 날짜를 세 번 다시 읽었다. 세 번 다 같은 숫자였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이제 이틀째. 이틀 만에 시험 날짜가 확정됐다는 게 무서웠다. 그 안에 최대한 많은 서브퀘스트를 완료해야 했다. 게임에서는 초반 지역 서브퀘스트가 곧 스탯과 아이템의 기반이었다. 초기 장비가 부족하면 던전 학원 입학시험에서 최하위권으로 밀린다. 최하위권이면 배정되는 반이 달랐다. 배정되는 반이 다르면 이후 얻을 수 있는 인맥과 정보가 완전히 갈렸다. 머릿속으로 8000시간의 플레이 기록을 되짚었다. 초반 튜토리얼 마을에서 놓치면 안 되는 퀘스트가 몇 개나 있었는지. 손가락을 접어가며 셈했다. 최소 다섯 개. 지금 완료한 건 하나뿐이었다. 박덕수가 옆에서 종이를 같이 봤다. "이 마을 상인들이 다들 일손이 부족해. 도와주고 다녀." "최기철 아저씨 말고 다른 상인도 있어요?" "방어구 상점 정갑수가 있지." 정갑수. 나는 그 이름도 알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 두 번째 초반 필수 퀘스트를 주는 NPC였다. 소포 전달. 완료하면 초반 최고 성능의 버클러를 준다. 버클러 하나가 이렇게까지 간절할 줄은 몰랐다. 초반 방어력 수치로 따지면 다음 등급 방패보다 12퍼센트 낮았지만, 무게가 절반이라 회피형 빌드에는 최적이었다. 회피형으로 갈 생각이었다. 탱커는 못 한다. 체력이 낮았다. 어제 최기철의 도시락 배달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뭔가 반복될 것 같았다. 똑같은 구조. 부탁, 심부름, 보상. 패턴을 알아챈 게 스스로도 신기했다. 게임 지식이 이 세계에서 정말로 통한다면, 이건 반복되는 시스템이었다. 시스템이라면 예측할 수 있다. 예측할 수 있으면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접근하기로 했다. 어제처럼 상황에 감정을 다 쏟지 않기로. 정순임의 떨리는 손을 떠올렸다. 그 손끝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나는 아직도 기억했다. 그 순간 마음이 흔들렸던 게 사실이었다. 계획에 없던 지출이었다. 감정도 자원이다. 자원을 아껴야 오래 간다. 이번엔 더 담담하게, 더 계산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박덕수를 따라 마을 중앙로를 걸었다. 오전 11시 47분. 해가 정수리 위에 있었다. 그림자가 짧아졌다. 방어구 상점은 마을 중앙로 끝, 대장간 냄새가 옅게 풍기는 골목 앞에 있었다. 간판은 낡았지만 글씨는 또렷했다. [정갑수의 방패와 갑옷]. 문을 열었다. 갑옷과 방패가 벽에 걸려 있었다. 가죽 갑옷, 사슬 갑옷, 크고 작은 방패들. 그중 하나가 유난히 반짝였다. 버클러였다. 게임 아이콘에서 본 그 모양 그대로. "누구냐." 중년 남자가 카운터에서 고개를 들었다. 팔뚝에 화상 자국이 있었다. 대장간 일도 겸하는 사람 같았다. "이하준이에요. 박덕수 촌장님이 소개해주셔서요." "덕수가?" 정갑수가 나를 훑어봤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시장에서 물건 감정하듯. "쓸 만한 애가 왔나 보네." "뭐 도와드릴 거 있으세요?" 내가 먼저 물었다. 정갑수가 눈을 크게 떴다. "어제 기철이한테 들었는데, 진짜 눈치가 빠르구나." 그는 카운터 아래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는 손바닥 두 개 정도 크기였다. 겉면에 밧줄이 십자로 묶여 있었다. "이걸 옆 마을 대장간에 전해줘야 하는데, 가게를 비울 수가 없어." "어느 마을이요?" "동쪽으로 반나절 거리." 나는 이미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 게임 속 동쪽 마을, 광산촌. 그곳까지 가는 길에 초반 사냥터가 있었다. 소포를 전달하는 김에 몬스터 몇 마리 잡으면 경험치도 챙길 수 있었다. 초반 슬라임과 코볼트 정도. 위험도는 낮았다. 적어도 게임에서는 그랬다. "제가 갈게요." "고맙지. 대신 뭐 챙겨줄게." 또 '뭐'였다. 확정되지 않은 보상. 어제도 이런 식이었다. 최기철도 처음엔 '섭섭하지 않게 해준다'고만 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지만, 그건 운이었다. 운에 맡기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번엔 물러서지 않고 물었다. "버클러 주실 수 있어요?" 정갑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버클러를 어떻게 알아?" 실수였다. 너무 정확하게 짚었다. 심장이 한 박자 빨리 뛰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말을 고르는 시간이 길어지면 더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그, 그냥 방패 종류 중에 그게 좋다고 들어서요." 정갑수가 나를 잠시 쳐다보다가 웃었다. "좋아, 재밌는 애네. 소포만 잘 전해주면 버클러 주지." 계약이 성립됐다. 어제보다 더 명확한 조건이었다. 물건 하나, 방패 하나. 등가교환.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이게 맞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정갑수가 상자를 내밀며 덧붙였다. "대장간 주인 이름은 최달성이야. 얼굴 보면 알 거야, 눈썹이 이만큼 짙어." 손으로 자기 눈썹을 두 배쯤 부풀려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에서도 최달성이라는 이름을 본 기억이 있었다.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났지만, 어딘가 익숙했다. 소포를 받아 들고 상점을 나서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정갑수가 불렀다. "그런데." 나는 돌아봤다. "그 마을에 요즘 이상한 소문이 있던데." "무슨 소문이요?" "광산에서 사람이 몇 명 사라졌다더라." 등골이 서늘해졌다. 게임에는 그런 이벤트가 없었다. 적어도 내가 플레이했던 8000시간 동안은, 초반 지역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이벤트는 없었다. 튜토리얼 지역은 안전 구역이었다. 몬스터 스폰율도 낮고, NPC 사망 이벤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데이터베이스를 뒤졌다. 패치노트, 이벤트 로그, 공략 게시판 글까지. 아무리 뒤져도 걸리는 게 없었다. 없어야 할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었다. "확실한 소문이에요?" "확실한 건 아니고. 그냥 광부 몇 명이 안 돌아왔다는 얘기야." "안 돌아온 지 얼마나 됐는데요?" "한 열흘쯤 됐나." 열흘. 게임 시간으로 치면 아무 일도 아닌 기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게임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이 세계는 게임 데이터를 그대로 따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가능성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조심해서 가라." 정갑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평소 장난스럽던 어조가 사라졌다. 그것만으로도 상황이 가볍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소포를 품에 안고 동쪽 길을 향해 걸었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며 뒤를 돌아봤다. 박덕수가 멀리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뭔가 걱정하는 것 같은, 아니면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좀 더 오래 바라봤다. 박덕수는 이 마을에서 오래 산 사람이었다. 게임에는 없던 정보를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물어볼까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그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내가 캐물으면 의심을 살 수 있었다. 이하준은 이 세계에 온 지 이틀 된 사람이어야 했다. 너무 많은 걸 아는 사람처럼 보이면 안 됐다. 나는 다시 앞을 보고 걸음을 옮겼다. 게임 지식이 이 세계에서 통한다는 건 이미 확인했다. 최기철의 도시락 배달, 정갑수의 소포 퀘스트, 버클러의 존재까지. 전부 게임 그대로였다. 하지만 게임에 없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그 지식이 언제까지 통할지는 알 수 없었다. 오후 12시 5분. 마을을 벗어난 지 십오 분. 길가의 풀들이 점점 낮아지고, 대신 자갈이 많아졌다. 초반 사냥터 진입로였다. 게임 지도로 보면 여기서부터 슬라임이 나오기 시작했다. 오후 12시 20분. 슬라임 한 마리가 길 옆 풀숲에서 튀어나왔다. 예상대로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피했다. 슬라임은 느렸다. 게임대로였다. 안심이 됐다. 적어도 이 구간은 아직 데이터와 일치했다. 하지만 그 안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동쪽 길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해는 아직 하늘 높이 떠 있는데, 길 자체가 어두웠다. 나무가 우거진 것도 아닌데 빛이 스며들지 않는 느낌이었다. 게임 그래픽으로 봤던 낮 시간의 이 길과는 명도가 달랐다.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소포를 품에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열흘 전에 사라진 광부들. 그 사람들도 이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나는 그 생각을 억지로 밀어냈다. 지금은 계산해야 할 때였다. 감정에 자원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걸음은 자꾸 무거워졌다. 앞으로 반나절. 그 반나절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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