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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다음 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다시 시도했다. 엄마 얼굴을 떠올리려고. 안 됐다. 또 안 됐다. 세 번째도 안 됐다. 눈을 감고, 이마에 힘을 주고, 관자놀이가 아플 정도로 집중했다. 그래도 안 됐다. 대신 다른 조각들이 떠올랐다. 엄마가 끓여준 된장국 냄새. 작은 부엌의 형광등 소리, 지지직거리던 그 특유의 잡음. "밥은 먹었어?" 라는 말투. 현관문을 열 때마다 들리던 삐걱거리는 소리. 전부 선명했다. 그런데 얼굴만은, 정확히 얼굴만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마치 사진에서 얼굴 부분만 도려낸 것 같았다. 가위로 오려낸 자리처럼, 그 언저리만 하얗게 남아 있었다. 나는 다시 시도했다. 머리카락 색깔은 기억났다. 갈색이었나, 검은색이었나. 그것조차 흔들렸다. 눈매는. 코 모양은. 입술은. 아무것도 없었다. 숨이 가빠졌다. 나는 촌장 집 마루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봤다.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풍경이었는데, 그것마저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이러다 저 구름의 모양도 잊어버릴까봐. 오전 9시 12분. 박덕수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나무 마루가 그의 무게에 눌려 삐걱, 소리를 냈다. "밤새 잠을 설쳤구나." 목소리에 걱정이 섞여 있었다. "...네." 나는 짧게 대답했다. 목이 잠겨서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왔다. "뭘 잃어버렸냐?" 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떻게 아셨어요?" 박덕수가 한숨을 쉬었다. 주름진 얼굴에 오래된 피로가 겹쳐 보였다. "이 마을에 너처럼 갑자기 나타나는 애들이 몇 있었다. 다들 뭔가를 놓고 오더라." "놓고 온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직업을 받으면, 그만큼 뭔가를 내놓아야 한다는 뜻이지." 숨이 턱 막혔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저는 임시 직업이에요. 정식으로 받은 것도 아닌데." 나는 항변하듯 말했다. 억울했다. 아니, 억울한 게 아니었다. 무서웠다. "임시든 정식이든 시스템은 공평하지 않아." 박덕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무서웠다.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 만큼, 그는 이미 여러 번 비슷한 일을 봐온 사람이었다. "뭘 잃었냐?" 그가 다시 물었다. "엄마 얼굴이요." 말하고 나니 목이 메었다. "엄마의 얼굴이 기억이 안 나요." 말을 뱉는 순간 눈물이 나야 했다. 그런데 나오지 않았다. 이상했다. 슬퍼야 하는데, 슬픔이 있어야 할 자리가 그냥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눈물마저 얼굴과 함께 빼앗긴 것처럼. 박덕수는 잠시 침묵했다. 바람이 마루를 스치고 지나갔다. "되돌릴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그 말에 심장이 튀어 올랐다. "진짜요?" 나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두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을 뻔했다. "학원에 가면 '기억 사서'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다더라.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준다고 들었다." "그럼 지금 당장 가면 안 돼요?" "학원 입학시험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어. 그것도 몇 달은 걸린다." 몇 달. 그 시간 동안 다른 기억도 더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가슴이 조여왔다. 몇 달 후에는 엄마의 목소리도, 그 된장국 냄새도, 형광등 소리도 다 사라질지 몰랐다. "그럼 지금 직업을 포기하면요? 무직 상태를 풀면?"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면 잃은 게 돌아올지도 모르지. 대신..." 박덕수가 나를 똑바로 봤다. 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네가 노리는 그 히든 클래스는 완전히 사라진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내가 무직을 유지하는 이유를.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떻게 아세요." "오래 살면 눈치가 생긴다." 그는 웃지 않고 말했다. 그 무표정한 얼굴이 오히려 더 진실처럼 느껴졌다. 나는 단검을 손에 쥐었다. 허리춤에서 뽑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내려다봤다. 칼날에 아침 햇살이 반사되어 눈이 시렸다. 어제 얻은 보상. 첫 성공의 증거. 이걸 포기하면, 무직 상태를 풀면 엄마 얼굴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확신이 없었다.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냥 '그럴지도 모른다'는 말뿐이었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주식으로 치면 근거 없는 소문 하나에 전 재산을 거는 것과 같았다. 반대로 지금 이대로 밀고 나가면, 최강 직업까지 가는 길이 열려 있다. 확실한 길이었다. 이미 검증된 종목이었다. 숫자로 증명된 상승 곡선이었다. 둘 중 하나. 확실한 이득과, 불확실한 되돌림. 나는 손에 쥔 단검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칼자루의 감촉이 손바닥에 익숙하게 남아 있었다. 이걸 놓으면, 어제의 그 전투도, 그 순간의 긴장도, 다 무의미해지는 걸까.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엄마를 떠올려봤다. 하얀 안개.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목소리는 아직 남아 있었다. "밥은 먹었어?" 그 짧은 한마디가 귓가에 생생하게 울렸다. 억양까지도. 살짝 올라가는 끝음까지도. 그 목소리만으로도,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얼굴이 없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얼굴을 잃었다고 해서 그 사랑까지 잃은 건 아니었다. 그 생각에 이르자, 이상하게도 마음 한쪽이 조금씩 단단해졌다. "저 앞으로 나갈래요." 내가 말했다. 내 목소리가 스스로도 놀랄 만큼 확고하게 들렸다. 박덕수가 나를 쳐다봤다. 그의 눈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기색이 잠깐 스쳤다. "후회 안 하겠냐?" "모르겠어요. 그런데..." 나는 단검을 다시 허리에 찼다. 칼집에 부딪히는 짤깍,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미 지나간 건 지나간 거예요. 저는 앞으로 얻을 걸 지켜야 해요." 말하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불안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마치 결정을 내린 것만으로도 절반은 해결된 기분이었다. 박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느리고, 무겁게. "좋다. 그럼 계속 준비해야지. 학원 입학까지 시간이 많지 않다." "뭘 준비해요?" 나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경험. 마을 상인들 심부름부터 시작해야 할 거다. 그게 다 시험 점수에 들어간다." "심부름이요?" "별거 아닌 것 같아도, 학원 입학시험엔 그런 것도 다 포함된다. 마을 평판, 기여도, 그런 것들." 나는 잠시 그의 말을 곱씹었다. 심부름이라니. 던전에서 몬스터를 잡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화려한 전투가 아니라, 꾸준히 쌓아 올릴 수 있는 무언가였다. "어디부터 가면 돼요?" "저기 저 대장간부터 가봐라. 주인이 성격이 좀 까칠한데, 부탁만 잘 들어주면 평판 점수가 꽤 올라간다." 박덕수가 손가락으로 마을 한쪽을 가리켰다. 낡은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굴뚝에서 옅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에 힘을 주자 다리가 살짝 저렸다. 어제의 전투 여파가 아직 남아 있었다. "고맙습니다, 촌장님." "고마울 거 없다. 네가 선택한 거니까." 그가 짧게 대답했다. 나는 마루에서 내려와 마당을 가로질렀다. 발밑에서 흙먼지가 조금씩 일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단검이 허리춤에서 가볍게 부딪혔다. 선택은 끝났다. 엄마의 얼굴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걸어야 했다. 대장간으로 가는 길, 나는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엄마를 떠올려보았다. 여전히 하얀 안개뿐이었다. 그런데 그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무언가 다른 감각이 스쳤다. 엄마의 손 감촉. 거칠고 따뜻했던, 내 이마를 짚어주던 그 손. 그 감각만은,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 감각에 집중했다. 사라지지 않길, 이건 사라지지 않길. 그렇게 속으로 되뇌면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대장간 문 앞에 다다르자, 안에서 쇠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나오고 있었다. 깡, 깡, 깡. 나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문이 벌컥 열리고, 덩치 큰 남자가 나를 쏘아보았다. "뭐냐."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촌장님이 보내셨어요. 심부름거리가 있다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가 코웃음을 쳤다. "심부름? 그런 애송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 말에 순간 발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애송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거슬렸다. 나는 어제 몬스터를 베던 감각을 떠올렸다. 그 단검의 무게. 그 성공의 순간. "해보기 전엔 모르는 거잖아요." 내가 말했다. 남자가 나를 잠시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말은 잘하네. 좋아, 그럼 저 광석들 옮겨봐. 창고까지." 그가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광석 더미가 쌓여 있었다. 나는 침을 삼키고 다가갔다. 첫 번째 광석을 들어 올리는 순간, 팔이 뻐근하게 당겨왔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다시 시작해야 했다. 엄마의 얼굴은 사라졌지만, 그 목소리와 손의 감촉은 아직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적어도 지금은. 광석을 옮기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앞으로 몇 달 동안, 또 무엇을 잃게 될까. 기억 사서를 만나기 전까지, 얼마나 더 많은 조각들이 사라질까. 그 생각에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그런데 그 순간, 등 뒤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착각인가. 나는 다시 광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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